내일신문이 만난 사람들-문학동아리 글터
희로애락이 담긴 진솔한 글에 마음을 빼앗기다
서호노인복지관 문학동아리 글터
마음에 담아 두었던 사연, 글이 되어 하나둘 풀려나다
때로는 생명을 싹틔우고 때로는 신명나는 놀이의 공간이 되는 ‘터’. 04년 서호노인복지관에 둥지를 튼 또 하나의 터인 ‘글터’에는 더디지만 어르신들의 진솔한 글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60~80대 어르신들이 살아 온 세월의 흔적은 어느새 머리엔 하얀 서리를, 얼굴 곳곳에는 깊은 고랑을 남겼다. 하지만 정성스레 적어 놓은 글 앞에서 보이는 수줍은 미소와 두근거리는 마음은 영락없는 문학소년·소녀 그대로다.
문학동아리 글터는 다양한 시, 한자나 고사 성어를 포함한 글쓰기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해온 고은영 선생이 함께 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조금씩 눈을 떠가고 있어요. 못 배운 설움, 고단했던 지난 삶에서 오는 응어리가 가식 없는 한 편의 글을 완성하게 합니다.” 비록 화려하거나 우수하지는 않아도 나름의 연륜이 묻어나는 특색 있고 질박한 글 차림을 해 내고 있단다. 소박한 일상의 잡기여도 좋고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남다른 감상이어도 좋았다. 고 선생은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런저런 사연들을 풀어 놓음으로써 내면의 성찰을 통해 삶의 건강한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이 글터의 큰 매력이라고 설명한다.
글터는 1주일에 한 번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수업을 함께하며 창작열(?)을 불태운다. 가끔씩 일월저수지나 농촌진흥청 등으로 나들이도 간다. 봄이면 푸른 새 생명과 벚꽃의 흩날리는 군무를 보면서 문학적 감성을 떠 올린다. 가을에는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 쓸쓸한 감상에 젖어들기도 한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나면 한 해의 곡식을 추수하듯 작품집을 내 놓는다.
작품 엿보기
작품1-내 안에서 되살아나는 문학적 감성
‘기다리고 있던 시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구월을 등 떠밀려 어서 가라니 ....... 다시 오마 내년을 기약하며 아쉬움에 뒤돌아보니/ 어느새 시월이 방문 앞에 서 있네 <김영희>’
퇴직 후 복지관 문학동아리에 참여해 온 김영희 회장은 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가족여행이라도 가면 작가인 어머니가 자연 속에서 영감을 취할 수 있게 며느리들은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기에 분주하다. 비록 잘 쓰지는 못하지만 겪어 왔던 일을 되새기면서 글을 쓰고 작품집까지 내니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겨났다고. 처음으로 글을 써서 책으로 만들어 봤다는 이도순 회원. 어느 가을 날 11층에서 내려다 본 은행나무들은 시심(詩心)을 불러일으켰다. “꽃이 피거나 눈이 내리는 계절의 변화가 그냥 허투루 보이지 않고 소녀 같은 감수성이 되살아난다”는 그녀는 자신이 쓴 시야말로 평생의 가장 소중한 것이 되었다고 자랑이다. 한글을 배우려고 참여했다는 강희숙 회원은 한 편의 글을 쓰고 있는 자신에 스스로 놀라고 있다. 청일점 이태훈 씨는 ‘평화의 댐을 다녀와서’란 기행문을 썼다. 오랜만에 써보는 글이라 힘들었지만 책자로 남아 있어 볼수록 흐뭇하단다.
작품2-잊고 사는 말, 고맙습니다!
‘항상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하는 말인데도 늘 잊고 사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늘 불평만하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땅에 태어 난 것도 고마운 것이고, 내가 80 평생을 건강하게 살아온 것도 고마운 일인데 무엇을 불평한단 말인가...... <송병례>’
어르신들은 유독 고마움을 많이 표시한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글터 회원들, 고은영 선생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모르는 한자성어를 배워 손자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어 행복하다는 송병례 회원. 문학이라는 말에 겁부터 먹었지만 피상적으로 알던 것을 정확하게 배울 수 있어 더 없이 만족스럽다는 박소규 회원. “항상 하고 싶은 말들이 가슴에 차 있었어요. 글로 표현하게 도움을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를 간호해 수원시 효부상을 탄 강금순 회원의 감사 앞에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백호숙 씨를 비롯한 회원들은 공부하며 생활에 필요한 알찬 상식을 배워가고, 자아실현까지 되니 글터의 존재는 고마움 그 자체라고 거듭 강조한다.
작품3-관조의 세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노랑색 은행 단풍잎/ 지나간 봄에는 파랑색/ 애기 꽃잎이더니 ...... 노랑 은행잎 가을바람에/ 휘날리네 내 나이와 같이/ 겨울이 오고 있네 <이도순>’
이제는 인생의 황혼녘에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회원들의 말과 글에는 잔잔한 삶의 지혜가 묻어져 나온다. ‘산 너머 행복을 멀리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행복은 웃으면서 내 곁에 머물 것이다’라는 백수용 회원의 글이 어느 문장가의 말보다 마음에 와 닿는 건 그녀의 체험이 녹아 있기 때문. 그저 앞만 보고 달려 생의 벼랑 끝에 매달려서야 자연의 순리가 가슴 깊이 새겨진다는 박서희 회원에게서는 인간사 희로애락에 대한 깊은 통찰과 반성이 애잔하게 전해져 온다. 정다운 이들과 살아온 이야기를 함께 나눠가며 나의 삶을 반추해 가는 글터. 그 세월만큼 무궁무진한 어르신들의 얘기들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고 있다.
권성미 리포터 kwons02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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