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뜻하지 않은 일이나 사건 하나로 송두리째 달라지기도 한다.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인연이 그렇고, 한 장 두 장 읽으며 흠뻑 빠져들게 되는 운명적인 책과의 만남도 그렇다. 김혜정 관장 역시 전혀 생각지 않은 순간 고지도를 만나 평생을 지도 사랑에 빠져 살았다. 지난 2002년 평생에 걸쳐 수집한 지도 3000여점과 도자기, 고서적 등 문화재 5만여점을 경희대학교에 기증하기까지 그에게 있어 지도란 ‘삶’ 그 자체다. 경희대는 그 뜻을 기리기 위해 2005년 그의 이름을 딴 혜정박물관을 설립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첫 고지도 전문박물관이 탄생한 것이다.
그 어떤 명화(名畵)보다 아름다운 고지도의 매력
“한두 점 소유하고 있을 때야 내 것이지, 이렇게 큰 규모의 소장품은 나 개인을 넘어 이 사회와 국가의 것이라 생각했어요. 제가 열정을 다해 모은 고지도들이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할 수 있다면, 그땐 지도와 함께 한 제 삶도 찬란하게 빛나는 것일 테니까요.”
그 많은 사료들을 어떻게 대학에 기증할 수 있었는지 결단이 대단하다는 리포터의 말에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 김혜정(64) 관장은 이렇게 답했다. 특히 그는 아이들이야말로 지도를 보며 꿈을 키워가는 존재라고 믿고 있다. 지도를 통해 자신의 꿈을 구체화시키고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박물관 안에 어린이전시관을 따로 만들고 어린이들을 위한 하늘길(천문도), 비단길(실크로드), 바닷길 등 체험전시실과 고지도 전시회를 마련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그 어떤 명화(名畵)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 바로 지도”라고 말한다. 때론 아름답고 화려하며 때론 세밀하고 단아한 고지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수집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남들이 말하는 ‘고지도 전문가’가 되어 있더란다. 그는 제주도 함덕에 정신지체아 시설인 ‘혜정원’을 설립하고 40여 명 아이들의 엄마 역할도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제겐 지도가 꼭 자식 같아요. 소장하고 있는 것 중 어떤 지도가 가장 좋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에요.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곤 하죠.”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지도와의 만남은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던 시절, 어느 허름한 책방에서 고지도를 처음 본 것이 계기가 됐다. 고지도의 아름다움에 빠져 처음엔 호기심으로 한 장 두 장 모으다가 차츰 지도의 학술적 가치를 깨달으면서 본격적인 수집으로 이어졌다.
“요즘도 귀중한 고지도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유명한 외국의 고서점과 경매장은 거의 다 둘러봤죠.”
‘일본해’ 대신 ‘동해’로 표기되면 독도 문제 해결된다
혜정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도는 영국의 대영박물관보다 많다. 지난 2008년에는 소장 중인 고지도 중 ‘경기도·강원도·함경남도·함경북도 지도’ 4점이 국가지정 문화재(보물 제1598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200년 전 가죽에 그려진 ‘잉카지도’, 1595년 벨기에에서 제작한 ‘일본열도’, 우리나라를 한반도로 표기한 1655년의 ‘중국지도첩’ 등은 세계적으로도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저희 박물관은 그동안 모은 유물을 통해 ‘지도 속 동해찾기’에 주력하고 있어요. 한·일간 영토문제는 물론 한·중간 역사문제까지 지도를 열쇠 삼아 실마리를 풀 수 있거든요. 특히 국제적으로 일본해라 불리고 있는 동해(東海)의 명칭을 되찾을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지도에 나와 있습니다.”
‘문턱 낮은 박물관’ 지향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아
그가 처음 지도를 모으기 시작했을 때 동해로 표기된 지도는 10개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현재 발굴된 세계 고지도에서 동해가 표기된 지도는 27% 정도를 차지할 만큼 크게 늘었다.
“구태여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목소리 높여 힘을 뺄 필요 없어요. 독도는 남편이고 아내인 셈인데 어디 가서 내 남편이다, 내 아내다 떠벌리지 않잖아요. 일본해 대신 동해로 표기되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동해가 우리 것이면 독도 역시 당연히 우리 것이 되니까요.”
그의 말처럼 고지도는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 뿐 아니라, 우리의 현재를 비춰 주는 거울이자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사의 지침이다.
김혜정 관장은 “공장은 부도날 수 있지만 문화란 절대 부도날 수 없는 분야”라고 힘주어 말한다. 지구가 존재하는 한 역사와 함께 해 온 문화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것. 그가 국내 고지도 연구 활성화를 위해 정부와 지자체 등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촉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는 ‘문턱 낮은 박물관’을 지향하는 그에게 현실적인 벽은 아직 높기만 하다. 경희대 중앙도서관 4층에 자리한 500여 평 규모의 박물관에는 12~20세기 동서양 옛 지도 130여 점이 전시중이다. 하지만 전시 공간이 좁아 그가 평생 수집한 지도 3000여 점과 도자기, 고서적 등 5만 점은 수장고에 별도로 보관돼 있다.
“박물관 단독건물이 시급한 상황인데 혼자 힘으론 역부족입니다. 대학 캠퍼스 맨 안쪽에 들어와 있는 지금의 박물관 위치도 찾아오시는 분들이 애를 먹으니 사실은 좀 아쉬어요. 지자체나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목마를 따름입니다.”
홍정아 리포터 tojounga@hanmail.net
경희대 혜정박물관은_
경희대 국제캠퍼스(용인 기흥구 서천동) 중앙도서관 4층에 위치한 혜정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최대 규모의 고지도 전문박물관이다.
고지도의 개념과 고지도 보는 방법, 제작과정, 세계의 지도제작자 등을 살펴볼 수 있으며, 고지도에 표기된 동해의 명칭도 확인할 수 있다. 어린이를 위한 고지도 특별전을 비롯해 지도 관련 역사문화교실 프로그램 등을 정기적으로 운영 중이다.
관람시간 월요일~금요일
오전 10시~오후 4시, 입장료 무료.
관람문의 031-201-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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