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모닥불 지피고, 무쇠 난로에서 군고구마 익는 냄새 구수한 그 집 마당엔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끓이지 않는다. 1000여 평이 넘는 널따란 마당이 외갓집 앞마당처럼 푸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안주인의 넉넉한 인심 때문 아닐지. 허허벌판 30평 비닐하우스에서 시작해 800석이 넘는 초대형 오리구이 전문점을 일궈낸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수수한(?) 옷차림, 그래서 더 돋보이는 가나안 덕 이선자(55) 대표를 만났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삶, 신앙으로 버텼다
고향 광주에서 그는 공무원의 아내로 안정적인 삶을 살던 평범한 주부였다. 만약 남편 정덕연씨가 공직자로 계속 근무했다면 지금의 ‘가나안 덕’은 없었을 테고, 이렇게 멋진 반전도 이뤄내지 못 했을 터. 공직생활을 접고 사업에 뛰어든 남편의 잇따른 사업실패로 말 그대로 빈털터리, 생활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광주에서 우리가 다니던 교회 신도가 1000여 명이 넘는데 그중에서 제일 가난했다”고 회상하는 그는 그래도 장사나 사업은 꿈도 꾸지 않았다고. 더더구나 식당이라니? 가진 것도 없이 경험도 없이 오리구이 집을 하겠다고 나선 남편과는 이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심각했단다. 하지만 세 아이를 두고 이혼할 수는 없는 일.
여기저기 어렵게 얻은 300만원을 갖고 김포 허허벌판에 무허가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오리구이 집을 시작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부부사이도 멀어지게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버티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 신앙은 곧 생활이고 기도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 힘”이었다는 그는 무허가 영업이라 단속을 받는 일이 잦았지만 그래도 2년여 김포 비닐하우스에서 버티어낸 것도 기도로 이뤄낸 일이라고 믿는단다.
개천가 비닐하우스에서도 희망 잃지 않아, 꿈을 꾸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더 이상 김포에서 무허가 영업을 할 수 없게 되자 부부는 1998년 지금의 가나안 덕 한쪽, 개천가 비닐하우스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나안 덕엔 참숯 오리구이 단일메뉴 뿐이지만 별다른 가미 없이도 잡냄새 없고 담백한 오리구이의 맛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날로 손님이 밀려들었다.
“남편이 개천가 비닐하우스에서 볼품없이 장사를 할 때도 앞의 허허벌판 공터를 바라보며 앞으로 이곳에 이렇게 마당을 꾸미고 가게 터는 이렇게 저렇게 잡겠다고 했어요. 처음엔 기지도 못하면서 날 생각만 한다고 지청구를 줬는데 나도 모르게 그 꿈과 비전에 동화가 되더라고요.(웃음)” 이후 기적처럼 비닐하우스 한 채가 두 채가 되고, 두 채가 세 채가 되면서 제법 음식점다운 모양새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1998년에 일산에 들어와 풍동 한 자락에 30평 비닐하우스로 시작한 가나안 덕이 10여 년이 흐른 지름 이젠 1200평에 800여 석을 갖춘 자타가 공인하는 오리구이전문점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가나안 덕의 성공신화는 이미 많은 매스컴을 통해 몇 백자의 글로 간단하게 표현되곤 했다. 하지만 성공이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인가. 이선자 대표는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되기까지 아픔도 많았다”고 토로한다.
한참 경제적으로 벼랑에 몰렸을 당시 아이들은 사춘기를 맞은 나이였고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라 마음만큼 돌봐주지 못해 아들 둘이 방황하기도 했었다. 때론 인간이기에 기도의 힘으로도 이겨내기 힘든 고비도 있었지만 그가 지금까지 마음에 새기고 다짐하는 것은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가정만큼은 꼭 지키자”는 것.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인 세태다 보니 “어려움이 있어도 인내하라는 말이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비를 넘기면 물 같은 평화가 온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한다. 젊은 시절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때때로 무시로 “이혼해? 말아?” 하면서 사는 것이 결혼생활. “내가 생각해보니 이혼을 해겠다는 문제가 50이면, 이혼 후 문제는 그보다 더 큰 100, 150의 문제가 생기겠더라고요. 특히 아이들에게.” 그 고비를 넘기고 난 지금, 그는? 남편을 ‘머리’로 세우고 자신은 최선을 다해 보좌를 하니 평화롭고 행복하단다.
가나안 덕은 기도와 가족과 직원들이 함께 일궈낸 것, 받은 만큼 나누는 복지사업이 꿈
가나안 덕의 경영철학은 ‘초심을 잃지 않는 것’. 아무리 규모가 커져도 좁은 비닐하우스에서 정성으로 오리를 굽고 손님을 대하던 그 초심대로 지금까지 이어온 신념과 고집이 성공비결이다. 또 하나,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도록 식구처럼 대하는 그의 마음씀씀이도 빼놓을 수 없다. “비닐하우스에서 장사할 때 조선족 등 직원들에게 제가 엄마였어요. 타국에 나와 있으니 챙겨줄 사람도 없고 그러니 자연 그들의 엄마노릇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사업의 최대위기였던 AI가 유행했을 때 매출이 10분의1로 줄어들어 타격이 심했지만 그는 직원을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을 닫고 직원들과 함께 단체여행을 다녀왔다. “남편이 타고난 사업가고, 난 기도밖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지만 사람관리 잘하는 그야말로 사업기질을 타고난 것 아닐까.
직원도 직원이지만 가나안 덕은 가족들이 똘똘 뭉쳐 최고의 팀워크로 이뤄낸 곳. 장사 초기에는 누구를 쓸 처지도 못 되고 아이들과 부부가 함께 할 수밖에 없어 고생이 많았다. 지금은 그때 고생담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장성한 아들 둘은 사업장을 맡아 가나안덕의 2세대를 열어가고 있고, 그 덕분에 부부는 예전보다 자유시간(?)이 많아졌다.
“가나안 덕은 가족과 직원들이 함께 일궈낸 곳이죠. 또 하느님이 도와주신 덕도 크고요. 사업이 이만큼 자리 잡게 된 것은 분명 제게 할 일이 있다는 뜻이겠죠. 이젠 받은 만큼 나누고 베풀어야죠.”
매년 노인들을 초대해 오리구이를 대접하고 군부대 장병들을 초대하는 등 크고 작은 선행을 베풀고 있는 그의 꿈은 복지사업. 이를 위해 한일장신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다. 거창하게 떠벌리지 않는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욕심내지 않고 나눌 줄 아는 그는 속이 더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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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까지 내려간 삶, 신앙으로 버텼다
고향 광주에서 그는 공무원의 아내로 안정적인 삶을 살던 평범한 주부였다. 만약 남편 정덕연씨가 공직자로 계속 근무했다면 지금의 ‘가나안 덕’은 없었을 테고, 이렇게 멋진 반전도 이뤄내지 못 했을 터. 공직생활을 접고 사업에 뛰어든 남편의 잇따른 사업실패로 말 그대로 빈털터리, 생활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광주에서 우리가 다니던 교회 신도가 1000여 명이 넘는데 그중에서 제일 가난했다”고 회상하는 그는 그래도 장사나 사업은 꿈도 꾸지 않았다고. 더더구나 식당이라니? 가진 것도 없이 경험도 없이 오리구이 집을 하겠다고 나선 남편과는 이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심각했단다. 하지만 세 아이를 두고 이혼할 수는 없는 일.
여기저기 어렵게 얻은 300만원을 갖고 김포 허허벌판에 무허가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오리구이 집을 시작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부부사이도 멀어지게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버티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 신앙은 곧 생활이고 기도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 힘”이었다는 그는 무허가 영업이라 단속을 받는 일이 잦았지만 그래도 2년여 김포 비닐하우스에서 버티어낸 것도 기도로 이뤄낸 일이라고 믿는단다.
개천가 비닐하우스에서도 희망 잃지 않아, 꿈을 꾸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더 이상 김포에서 무허가 영업을 할 수 없게 되자 부부는 1998년 지금의 가나안 덕 한쪽, 개천가 비닐하우스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나안 덕엔 참숯 오리구이 단일메뉴 뿐이지만 별다른 가미 없이도 잡냄새 없고 담백한 오리구이의 맛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날로 손님이 밀려들었다.
“남편이 개천가 비닐하우스에서 볼품없이 장사를 할 때도 앞의 허허벌판 공터를 바라보며 앞으로 이곳에 이렇게 마당을 꾸미고 가게 터는 이렇게 저렇게 잡겠다고 했어요. 처음엔 기지도 못하면서 날 생각만 한다고 지청구를 줬는데 나도 모르게 그 꿈과 비전에 동화가 되더라고요.(웃음)” 이후 기적처럼 비닐하우스 한 채가 두 채가 되고, 두 채가 세 채가 되면서 제법 음식점다운 모양새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1998년에 일산에 들어와 풍동 한 자락에 30평 비닐하우스로 시작한 가나안 덕이 10여 년이 흐른 지름 이젠 1200평에 800여 석을 갖춘 자타가 공인하는 오리구이전문점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가나안 덕의 성공신화는 이미 많은 매스컴을 통해 몇 백자의 글로 간단하게 표현되곤 했다. 하지만 성공이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인가. 이선자 대표는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되기까지 아픔도 많았다”고 토로한다.
한참 경제적으로 벼랑에 몰렸을 당시 아이들은 사춘기를 맞은 나이였고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라 마음만큼 돌봐주지 못해 아들 둘이 방황하기도 했었다. 때론 인간이기에 기도의 힘으로도 이겨내기 힘든 고비도 있었지만 그가 지금까지 마음에 새기고 다짐하는 것은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가정만큼은 꼭 지키자”는 것.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인 세태다 보니 “어려움이 있어도 인내하라는 말이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비를 넘기면 물 같은 평화가 온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한다. 젊은 시절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때때로 무시로 “이혼해? 말아?” 하면서 사는 것이 결혼생활. “내가 생각해보니 이혼을 해겠다는 문제가 50이면, 이혼 후 문제는 그보다 더 큰 100, 150의 문제가 생기겠더라고요. 특히 아이들에게.” 그 고비를 넘기고 난 지금, 그는? 남편을 ‘머리’로 세우고 자신은 최선을 다해 보좌를 하니 평화롭고 행복하단다.
가나안 덕은 기도와 가족과 직원들이 함께 일궈낸 것, 받은 만큼 나누는 복지사업이 꿈
가나안 덕의 경영철학은 ‘초심을 잃지 않는 것’. 아무리 규모가 커져도 좁은 비닐하우스에서 정성으로 오리를 굽고 손님을 대하던 그 초심대로 지금까지 이어온 신념과 고집이 성공비결이다. 또 하나,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도록 식구처럼 대하는 그의 마음씀씀이도 빼놓을 수 없다. “비닐하우스에서 장사할 때 조선족 등 직원들에게 제가 엄마였어요. 타국에 나와 있으니 챙겨줄 사람도 없고 그러니 자연 그들의 엄마노릇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사업의 최대위기였던 AI가 유행했을 때 매출이 10분의1로 줄어들어 타격이 심했지만 그는 직원을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을 닫고 직원들과 함께 단체여행을 다녀왔다. “남편이 타고난 사업가고, 난 기도밖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지만 사람관리 잘하는 그야말로 사업기질을 타고난 것 아닐까.
직원도 직원이지만 가나안 덕은 가족들이 똘똘 뭉쳐 최고의 팀워크로 이뤄낸 곳. 장사 초기에는 누구를 쓸 처지도 못 되고 아이들과 부부가 함께 할 수밖에 없어 고생이 많았다. 지금은 그때 고생담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장성한 아들 둘은 사업장을 맡아 가나안덕의 2세대를 열어가고 있고, 그 덕분에 부부는 예전보다 자유시간(?)이 많아졌다.
“가나안 덕은 가족과 직원들이 함께 일궈낸 곳이죠. 또 하느님이 도와주신 덕도 크고요. 사업이 이만큼 자리 잡게 된 것은 분명 제게 할 일이 있다는 뜻이겠죠. 이젠 받은 만큼 나누고 베풀어야죠.”
매년 노인들을 초대해 오리구이를 대접하고 군부대 장병들을 초대하는 등 크고 작은 선행을 베풀고 있는 그의 꿈은 복지사업. 이를 위해 한일장신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다. 거창하게 떠벌리지 않는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욕심내지 않고 나눌 줄 아는 그는 속이 더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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