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에 있어 텍스트라는 독(毒)
독(poison)을 적절한 시기와 적합한 양만 사용하면 약이 된다. 반대로 약이 시기와 양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된다는 것은 모두에게 상식이다. 학습과 성장에서 텍스트는 약과 독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글을 만 4세 전후로 깨치고 책꽂이에 가득한 책을 보거나 읽기를 강요당한다. 유치원 7세반부터 초등학교 적응훈련차원에서 책읽기와 받아쓰기를 하고,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날부터 아이들은 알림장을 흉내 내서 그린다. 중고등학교 학습은 참고서와 문제집을 빼고 말할 수 없다. 교사의 설명이나 인터넷강의 내용은 주어진 딱딱한 텍스트를 말랑한 텍스트로 바꾸어줄 뿐 새로운 컨텐츠가 아니다. 말하기/쓰기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듣기/읽기만 반복할 때 텍스트는 독으로 변한다. 아무도 말하기에서 스토리텔링을 하지 않고, 쓰기에서 메모 수준을 넘지 못한다.
약이 밥은 아니지 않는가. 텍스트는 약이다. 밥이 따로 있다. 사운드로서 음성언어가 밥이다. 우리 아이들은 밥을 매우 적게 먹으면서 약으로 배를 채우는 기형적인 성장을 해왔다. 어찌 약이 독이 되지 않겠는가. 당신의 자녀가 학습을 통한 올바른 성장, 제대로 발전하기를 바란다면 약을 끊고 밥을 먹여야한다. 그것은 21세기형 “하이퍼글쓰기”를 체득하는 것이다.
대학입시가 완전자율화 되면 지식의 양을 묻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구조화 정도를 측정하게 된다. 구조화된 지식만이 쓸모 있기 때문이다. 구조화되지 못한 지식은 새로운 정보가 입력되더라도 낡은 정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 가치의 구분 없이 혼재할 뿐이다. 새로운 정보는 기존 정보를 의심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미 알고 있거나 가지고 있는 자기 생각에 의문을 갖는 것이 지식을 구조화시키는 길이다.
그런데 이제 정보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사운드, 이미지, 동영상, 작도, 수식, 통계표 형태 등 다양한 미디어 형태를 갖는다. 대학은 미디어 통합으로 리포트를 작성하게 하고 나아가 작성자가 직접 프리젠테이션 하도록 요구하게 된다. 이것이 “하이퍼글쓰기” 형태의 통합논술이다. 현재의 텍스트 위주 논술은 논제 전개력을 측정하는 것이지만 4년 후 본고사 역할을 하는 통합논술은 멀티미디어 정보를 어떻게 배치하는가를 보는 구조화 능력을 가늠하는 것이다.
길은 하나다. 독해력 증진이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독서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1년에 수백 편 영화를 본다고 그가 영화평론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영화평론가가 되는 훈련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많은 영화를 봐야 한다. 전자는 의심 없이, 구조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낡은 정보를 새 정보로 대체할 계획 없이 책을 보는 사람이고, 후자는 내용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지식구조화를 전제하고, 정보의 갱신을 늘 추구하는 사람이 독서하는 것이다.
후자의 독서가 의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훈련하는 것이 독해력 증진 프로그램이다. 이 때 읽기와 말하기가 반드시 같이 가야한다. 쓰기는 말하기의 보조 역할로 배치된다. 심청전을 읽으며 왜 효도해야하는지, 왜 자기 목숨을 희생해야 하는지, 왜 스님은 많은 공양미를 원했는지, 왜 용왕과 같은 절대 권력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지, 왜 심학규는 청이를 그리워했는지, 왜, 왜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의문 없는 독서는 학습의 측면에서 무의미하다.
꼬리를 무는 의문은 말로 표현돼야한다. 사람은 듣는 상대가 없으면 혼자서는 얘기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라. 그래서 대화가 가장 좋은 학습도구이다. 20세기 해석학의 태두 게오르크 가다머가 “교육은 자기교육이며 대화만이 가능한 방법이다”고 말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육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학교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새로운 학교는 어떻게 설계돼야하는가. 교사는 어떤 마인드로 학생과 만날 것이며 학습을 포함한 학생들의 학교생활은 어떻게 달라져야할 것인가. 이러한 고민이 교육당국이나 학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를 비롯한 대중의 고민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나라 교육이 바로 설 것이다.
박준규 단재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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