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만난 사람-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정성철 악장
“아플 때도 바이올린만 연주하면 아프지 않아요”
무대 설 때 가장 행복. 훌륭한 연주자 좋은 선생으로 남고 싶어
지역내일
2009-06-24
(수정 2009-06-24 오전 10:30:02)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악장이기도한 정성철(45)씨. 인터뷰 시간에 늦게 도착했는데도 괜찮다며 활짝 웃으며 편하게 해주는 모습이 소년 같았다.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스타일에 솔직히 조금 놀랐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에너지가 많아 젊어 보이지요. 그런데 난 철도 없어요. 내가 1등이고 최고다. 내가 가장 잘났다라고 기만에 빠지기도 했거든요. 하하”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정성철 악장
의·약사 집안에서 혼자만 음악인
그는 6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해 지금까지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형은 피아노, 동생은 첼로, 어릴 땐 형제끼리 트리오로 연주하곤 했는데 형과 동생은 중학교에 가면서 공부 때문 그만뒀단다. 현재 그의 형과 동생은 의사다. 할아버지가 한의사, 아버지는 약사, 어머니는 의사인 의·약사 집안에서 그가 음악을 전공하겠다하자 부모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는 10년 동안 등지고 살만큼 갈등이 심했다.
그는 중3때부터는 한 번도 부모로 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단다. “할아버지께서 다행히 용돈을 많이 주셨어요. 몰래 용돈을 모으고, 교외에서 반주하고, 아르바이트해서 번돈으로 서울까지 가서 교수에게 레슨 받았어요”
경영대학에 입학했지만 대부분 음악학과 강의를 들었고 졸업 후 실내악단과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바이올린 수석으로 연주활동하며 대학원에 가서 음악을 전공했다.
오케스트라 창단으로 악기에는 차압딱지까지
생명력 있는 연주단체를 만들고 싶었던 그는 1996년 몇몇 젊은 연주자를 모아 ‘부산스트링스챔버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그러나 그에게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그는 연습실 임차료와 관리비는 물론, 적잖은 연주회 경비 일체를 책임졌다. 단원들에게 소액의 연주료를 지급하면서 카드대출과 사채 빚도 늘어났다. 연습실은 단전·단수되기 일쑤였고 비치된 악기에는 차압딱지가 붙었다. 아버지는 못마땅했지만 상당액수의 빛을 갚아주었다.
부산을 대표하는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10년 후 악단은 사단법인 인코리안심포니로 거듭났지만 그의 어깨는 여전히 무거웠다. 개인 레슨에 하루 10시간 이상 꼬박 매달려도 여전히 빚이 남아있다.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뛰어난 연주력과 음악적 열정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성장해온 데는 그의 음악적 열정과 노력 때문 아닐까? 현재 그는 동아대 외래교수이면서 부산예고, 부산예중, 브니엘 예고에 출강하고있고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악장으로 청소년 교향악단 ‘인코리안유스오케스트라’ 교육도 담당하고 있다.
훌륭한 연주자이면서 진정으로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좋은 선생으로 남고 싶은 게 그의 변함없는 꿈이다.
여전히 개인레슨도 하면서 부지런히 뛰고 있지만 생활인으로서 삶, 음악인으로서의 삶, 두 삶을 다 만족스럽게 살기는 힘들단다.
“음악에 너무 치중하다보면 생활이 낙후되고, 생활에 치중하다보면 음악인으로서는 퇴보하게 되죠. 예술에만 전념하기에는 한 인간으로서 부족한 게 너무 많아요”
좋은 연주를 많이 하고 오케스트라 문화가 활성화 된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학연과 지연을 초월해 많은 음악인을 수용하고 배출할 수 있는 경쟁력있는 오케스트라로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내 연주 집중해서 듣고 있는 관객을 볼 때 가장 행복
“음악을 좋아한다는 그 자체가 재능"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음악을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단다.
“아플 때도 바이올린만 연주하면 아프지 않고 악기를 내려놓으면 아파요. 무대에서 즐기면서 연주할 때, 내 연주를 집중해서 듣고 있는 사람을 보면 너무 행복해요”
인터뷰 내내 느낀 게 있다. 그와 함께 함께 할 수 있는 많은 후원자가 생겼으면 하는 거다. 경제적인 후원 외에도 후원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을듯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자주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순화 리포터 jsh0136@hanmail.net
“음악을 하는 사람은 에너지가 많아 젊어 보이지요. 그런데 난 철도 없어요. 내가 1등이고 최고다. 내가 가장 잘났다라고 기만에 빠지기도 했거든요. 하하”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정성철 악장
의·약사 집안에서 혼자만 음악인
그는 6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해 지금까지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형은 피아노, 동생은 첼로, 어릴 땐 형제끼리 트리오로 연주하곤 했는데 형과 동생은 중학교에 가면서 공부 때문 그만뒀단다. 현재 그의 형과 동생은 의사다. 할아버지가 한의사, 아버지는 약사, 어머니는 의사인 의·약사 집안에서 그가 음악을 전공하겠다하자 부모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는 10년 동안 등지고 살만큼 갈등이 심했다.
그는 중3때부터는 한 번도 부모로 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단다. “할아버지께서 다행히 용돈을 많이 주셨어요. 몰래 용돈을 모으고, 교외에서 반주하고, 아르바이트해서 번돈으로 서울까지 가서 교수에게 레슨 받았어요”
경영대학에 입학했지만 대부분 음악학과 강의를 들었고 졸업 후 실내악단과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바이올린 수석으로 연주활동하며 대학원에 가서 음악을 전공했다.
오케스트라 창단으로 악기에는 차압딱지까지
생명력 있는 연주단체를 만들고 싶었던 그는 1996년 몇몇 젊은 연주자를 모아 ‘부산스트링스챔버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그러나 그에게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그는 연습실 임차료와 관리비는 물론, 적잖은 연주회 경비 일체를 책임졌다. 단원들에게 소액의 연주료를 지급하면서 카드대출과 사채 빚도 늘어났다. 연습실은 단전·단수되기 일쑤였고 비치된 악기에는 차압딱지가 붙었다. 아버지는 못마땅했지만 상당액수의 빛을 갚아주었다.
부산을 대표하는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10년 후 악단은 사단법인 인코리안심포니로 거듭났지만 그의 어깨는 여전히 무거웠다. 개인 레슨에 하루 10시간 이상 꼬박 매달려도 여전히 빚이 남아있다.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뛰어난 연주력과 음악적 열정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성장해온 데는 그의 음악적 열정과 노력 때문 아닐까? 현재 그는 동아대 외래교수이면서 부산예고, 부산예중, 브니엘 예고에 출강하고있고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악장으로 청소년 교향악단 ‘인코리안유스오케스트라’ 교육도 담당하고 있다.
훌륭한 연주자이면서 진정으로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좋은 선생으로 남고 싶은 게 그의 변함없는 꿈이다.
여전히 개인레슨도 하면서 부지런히 뛰고 있지만 생활인으로서 삶, 음악인으로서의 삶, 두 삶을 다 만족스럽게 살기는 힘들단다.
“음악에 너무 치중하다보면 생활이 낙후되고, 생활에 치중하다보면 음악인으로서는 퇴보하게 되죠. 예술에만 전념하기에는 한 인간으로서 부족한 게 너무 많아요”
좋은 연주를 많이 하고 오케스트라 문화가 활성화 된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학연과 지연을 초월해 많은 음악인을 수용하고 배출할 수 있는 경쟁력있는 오케스트라로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내 연주 집중해서 듣고 있는 관객을 볼 때 가장 행복
“음악을 좋아한다는 그 자체가 재능"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음악을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단다.
“아플 때도 바이올린만 연주하면 아프지 않고 악기를 내려놓으면 아파요. 무대에서 즐기면서 연주할 때, 내 연주를 집중해서 듣고 있는 사람을 보면 너무 행복해요”
인터뷰 내내 느낀 게 있다. 그와 함께 함께 할 수 있는 많은 후원자가 생겼으면 하는 거다. 경제적인 후원 외에도 후원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을듯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자주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순화 리포터 jsh013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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