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크림 얹은 빵은 일 년에 한 번이나 먹을까 말까 해요. 유방암 수술 환자들은 절대로 살찌면 안되니까요. 운동보다 더 중요한 게 먹는 것, 식이요법인 것 같아요.”
호리호리한 몸매에 짙은 오렌지컬러의 버버리를 입은 활기 넘치는 사람이 다가와 신문사에서 나왔냐고 묻는다. 씩씩하다 못해 당당함이 느껴지는 그는 국내 최대 유방암 환자 모임인 비너스회 분당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금화(55)씨다.
마주앉은 커피전문점에서 커피와 함께 나온 빵을 한 점 떼먹으며 그가 처음 꺼낸 말은 역시 ‘건강’이었다.
“수술한지 4년이 다 돼가도 아직 마음을 못 놓겠어요. 유방암은 생존율도 높고 예후가 좋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완치란 건 없다고 봐요. 덤으로 얻은 인생, 항상 건강관리에 신경 쓰며 살고 있죠.”
3년 전 유방암 2기 선고받아…우울증 고통
2005년 2월 설 명절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던 박씨의 귓가에 이상한 환청이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가슴을 만져보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 것.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어 그냥 무시했어요. 그런데 두 번, 세 번 자꾸 들려오는 거예요. 순간 먼저 세상을 떠난 큰 언니가 생각났죠.”
그와 8살 터울의 큰 언니는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언니는 종종 그의 꿈에 나타나 도움을 주곤 했다고.
“그길로 당장 미금역 앞에 있는 개인 방사선과를 찾아갔어요. 유방암 2기라는 진단을 받았죠. 진료실 밖에서 저를 기다리던 동네 후배 말론 그때 제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어서 더 묻지 않고도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대요. 그날이 2005년 2월 14일이예요.”
그의 오른쪽 가슴에선 2.5센티미터의 혹이 3개나 자라고 있었다. 당시 분당 구미동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던 터라 생각할 것 없이 집에서 가까운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 않은 상태였고, 수술 예후도 좋았다.
“보름 만에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됐죠. 가족들이 곁에 있는데도 외로움, 슬픔, 분노, 절망 같은 감정들이 가슴을 짓눌러댔어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부터는 우울증이 더 심해졌죠. 그땐 정말 암이 아니라 우울증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구요.”
다행히 직장에 다니던 큰 딸 희영(32)씨가 업종을 바꿔 일을 새로 시작하려던 때라 24시간 엄마 곁에 붙어 수발을 들 수 있었다. 박씨의 오른손엔 언제나 묵주가 들려있던 시절이었다.
“제 딸 말론 ‘그땐 엄마 혼자 두다간 큰일 나겠다’ 싶더래요. 딸이 종교만큼이나 큰 의지가 됐어요.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저를 자꾸 밖으로 데리고 나가 햇볕을 쬐게 하고 그동안 못했던 얘기들도 많이 나누고요. 참, 오늘 입은 이 옷도 다 제 딸이 골라 준거예요. 의류매장에서 일하고 있어서 지금도 컬러풀한 옷들로 기분전환을 시켜주곤 하죠.”
유방암 환자들 대상으로 상담 봉사
수술을 받은 지 3년 8개월이 지난 지금 그의 하루 일과는 가족들이 걱정할 만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일주일에 두 번 분당서울대병원에 상담봉사를 나가는가 하면, 성당의 레지오 모임과 반 모임에도 열심이다. 서울대병원에서는 자신처럼 유방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에게 경험담을 들려주고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상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유방암이라는 청천병력 같은 얘기를 들으면 처음엔 믿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죠. 그 다음에 드는 생각은 ‘내가 뭘 잘못했기에, 왜 하필 내가?’ 라는 억울함입니다. 저도 그런 과정을 겪었으니 잘 알아요. 의사 선생님이나 주변사람들이 걱정 말라고 죽지 않는다고 얘기해도 믿질 못하죠.”
하지만 그가 지금 유방암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듯 발병 당시 그에게 따뜻한 조언과 충고를 해 주는 선배들은 없었다. 박씨는 자신의 우울증이 더 깊어진 것도 ‘혼자라는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동병상련이란 말이 있잖아요. 우리 분당비너스회가 똘똘 뭉쳐 결속이 잘 되는 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너도 겪고 나도 겪은 공통의 시련을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말이 분당비너스회지 강원 부산 광주 울산 할 것 없이 각 지역에 저희 회원들이 많아요.”
분당서울대병원을 중심으로 수술을 받았거나 혹은 항암치료를 받은 유방암환자들이 모이다 보니 회원들의 거주지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1년에 한번 열리는 야유회와 수련회에는 빠지는 회원 별로 없이 높은 출석률을 자랑한다고. 이제는 ‘사람 만나는 게 좋아 모이는 친목계 같은 조직’이 된 셈이다.
웰빙식단으로 식이요법 실천…체중조절 신경써야
유방암은 다른 어떤 질환보다 운동, 체중조절, 정기검진, 식이요법이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등산을 즐기는 박씨 역시 체중조절을 위해 먹는 것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말 그대로 웰빙식단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것 아니면 먹질 않는 편이죠. 고향인 경북 구미에서 친정아버지가 농사지어 올려 보내주시는 배추나 채소들을 주로 많이 먹고 있어요. 무청을 삶아 냉동고에 저장해놨다가 지져먹기도 하고, 들깨가루에 버무린 산나물도 좋아해요.”
집 앞 텃밭에서 상추, 오이, 고추 등 채소들을 직접 가꿔 따 먹기 때문에 외식할 일이 거의 없다는 박씨는 이것저것 음식을 가려먹지 않는 후배 환우들을 보면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다고.
“30대 젊은 후배들은 팥빙수며, 빵이며, 아이스크림까지 가리는 음식 없이 입에서 당기는 대로 다 먹더라구요. 옆에서 잔소리를 안 할 수 없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후배들도 제가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허전하다고 해요. 그만큼 가족 같은 사이가 된 거죠.”
오는 12월 2년간의 회장임기를 마치게 되는 박씨는 “유방암 환우들에게 먼저 겪은 자신의 경험담이 유익한 정보로 받아들여진다면 더 바랄게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 나와 같은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수술자국이 선명한 가슴으로도 비너스회 친구들과 어울려서는 찜질방에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니 정말 신기한 일이죠?”
홍정아 리포터 tojoun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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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호리한 몸매에 짙은 오렌지컬러의 버버리를 입은 활기 넘치는 사람이 다가와 신문사에서 나왔냐고 묻는다. 씩씩하다 못해 당당함이 느껴지는 그는 국내 최대 유방암 환자 모임인 비너스회 분당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금화(55)씨다.
마주앉은 커피전문점에서 커피와 함께 나온 빵을 한 점 떼먹으며 그가 처음 꺼낸 말은 역시 ‘건강’이었다.
“수술한지 4년이 다 돼가도 아직 마음을 못 놓겠어요. 유방암은 생존율도 높고 예후가 좋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완치란 건 없다고 봐요. 덤으로 얻은 인생, 항상 건강관리에 신경 쓰며 살고 있죠.”
3년 전 유방암 2기 선고받아…우울증 고통
2005년 2월 설 명절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던 박씨의 귓가에 이상한 환청이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가슴을 만져보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 것.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어 그냥 무시했어요. 그런데 두 번, 세 번 자꾸 들려오는 거예요. 순간 먼저 세상을 떠난 큰 언니가 생각났죠.”
그와 8살 터울의 큰 언니는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언니는 종종 그의 꿈에 나타나 도움을 주곤 했다고.
“그길로 당장 미금역 앞에 있는 개인 방사선과를 찾아갔어요. 유방암 2기라는 진단을 받았죠. 진료실 밖에서 저를 기다리던 동네 후배 말론 그때 제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어서 더 묻지 않고도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대요. 그날이 2005년 2월 14일이예요.”
그의 오른쪽 가슴에선 2.5센티미터의 혹이 3개나 자라고 있었다. 당시 분당 구미동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던 터라 생각할 것 없이 집에서 가까운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 않은 상태였고, 수술 예후도 좋았다.
“보름 만에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됐죠. 가족들이 곁에 있는데도 외로움, 슬픔, 분노, 절망 같은 감정들이 가슴을 짓눌러댔어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부터는 우울증이 더 심해졌죠. 그땐 정말 암이 아니라 우울증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구요.”
다행히 직장에 다니던 큰 딸 희영(32)씨가 업종을 바꿔 일을 새로 시작하려던 때라 24시간 엄마 곁에 붙어 수발을 들 수 있었다. 박씨의 오른손엔 언제나 묵주가 들려있던 시절이었다.
“제 딸 말론 ‘그땐 엄마 혼자 두다간 큰일 나겠다’ 싶더래요. 딸이 종교만큼이나 큰 의지가 됐어요.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저를 자꾸 밖으로 데리고 나가 햇볕을 쬐게 하고 그동안 못했던 얘기들도 많이 나누고요. 참, 오늘 입은 이 옷도 다 제 딸이 골라 준거예요. 의류매장에서 일하고 있어서 지금도 컬러풀한 옷들로 기분전환을 시켜주곤 하죠.”
유방암 환자들 대상으로 상담 봉사
수술을 받은 지 3년 8개월이 지난 지금 그의 하루 일과는 가족들이 걱정할 만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일주일에 두 번 분당서울대병원에 상담봉사를 나가는가 하면, 성당의 레지오 모임과 반 모임에도 열심이다. 서울대병원에서는 자신처럼 유방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에게 경험담을 들려주고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상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유방암이라는 청천병력 같은 얘기를 들으면 처음엔 믿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죠. 그 다음에 드는 생각은 ‘내가 뭘 잘못했기에, 왜 하필 내가?’ 라는 억울함입니다. 저도 그런 과정을 겪었으니 잘 알아요. 의사 선생님이나 주변사람들이 걱정 말라고 죽지 않는다고 얘기해도 믿질 못하죠.”
하지만 그가 지금 유방암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듯 발병 당시 그에게 따뜻한 조언과 충고를 해 주는 선배들은 없었다. 박씨는 자신의 우울증이 더 깊어진 것도 ‘혼자라는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동병상련이란 말이 있잖아요. 우리 분당비너스회가 똘똘 뭉쳐 결속이 잘 되는 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너도 겪고 나도 겪은 공통의 시련을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말이 분당비너스회지 강원 부산 광주 울산 할 것 없이 각 지역에 저희 회원들이 많아요.”
분당서울대병원을 중심으로 수술을 받았거나 혹은 항암치료를 받은 유방암환자들이 모이다 보니 회원들의 거주지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1년에 한번 열리는 야유회와 수련회에는 빠지는 회원 별로 없이 높은 출석률을 자랑한다고. 이제는 ‘사람 만나는 게 좋아 모이는 친목계 같은 조직’이 된 셈이다.
웰빙식단으로 식이요법 실천…체중조절 신경써야
유방암은 다른 어떤 질환보다 운동, 체중조절, 정기검진, 식이요법이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등산을 즐기는 박씨 역시 체중조절을 위해 먹는 것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말 그대로 웰빙식단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것 아니면 먹질 않는 편이죠. 고향인 경북 구미에서 친정아버지가 농사지어 올려 보내주시는 배추나 채소들을 주로 많이 먹고 있어요. 무청을 삶아 냉동고에 저장해놨다가 지져먹기도 하고, 들깨가루에 버무린 산나물도 좋아해요.”
집 앞 텃밭에서 상추, 오이, 고추 등 채소들을 직접 가꿔 따 먹기 때문에 외식할 일이 거의 없다는 박씨는 이것저것 음식을 가려먹지 않는 후배 환우들을 보면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다고.
“30대 젊은 후배들은 팥빙수며, 빵이며, 아이스크림까지 가리는 음식 없이 입에서 당기는 대로 다 먹더라구요. 옆에서 잔소리를 안 할 수 없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후배들도 제가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허전하다고 해요. 그만큼 가족 같은 사이가 된 거죠.”
오는 12월 2년간의 회장임기를 마치게 되는 박씨는 “유방암 환우들에게 먼저 겪은 자신의 경험담이 유익한 정보로 받아들여진다면 더 바랄게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 나와 같은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수술자국이 선명한 가슴으로도 비너스회 친구들과 어울려서는 찜질방에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니 정말 신기한 일이죠?”
홍정아 리포터 tojoun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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