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지난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하면서 양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국내에서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퍼지는 등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은 그야말로 최악. 이 시점에 지난 3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본을 펴낸 고양시민, 류리수 박사(한일비교문학)를 만나보았다. 그는 “우리가 비난해야 할 대상은 아베를 비롯한 일본 극우세력이지 일반 국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본 시민들과 연대해 함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양국의 우호 관계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일본인들이 우리 국민감정을 이해하고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지니기 위해 백범일지 일본어판이 일본에서 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번역한 『백범일지』 정식 출간해 세상에 낸 딸
2014년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류 박사는 유품을 정리하다 『백범일지』 제6차 수정 원고를 발견했다. 그보다 훨씬 전인 2006년, 류 박사의 아버지 류의석씨는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 원고를 내밀며 일본의 출판사를 알아봐달라고 했다. “당시 일본 출판사로부터 여러 번 거절을 당했습니다. 일본인 대부분은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의 지휘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후 아버지가 번역을 포기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후로도 6차에 이르도록 계속 원고 수정을 해 오신 것입니다.”
수정 원고를 보며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깊이 깨달은 류 박사는 백범일지 일본어판을 아버지의 책장에서 세상으로 내보내야겠다고 결심, 이후 백범일지 일본어판을 내기 위해 여러 사람의 지난한 노력이 시작됐다. 고 류의석씨가 번역한 원고의 컴퓨터 파일이 열리지 않아, 결국 일본문학을 전공한 류리수 박사는 제자들과 함께 모든 원고를 일본어로 한 자 한 자 새로 타이핑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원고의 교정 및 감수 작업을 해줄 이가 필요했다. 이때 가까운 지인인 시인 이윤옥 박사(여성 항일 독립운동가에 관한 기록과 헌시(獻詩)를 엮은 책 『서간도에 들꽃 피다』 10권을 펴낸이로 본보 1219호에 기사 게재)가 시인 우에노 미야코(上野 都)씨를 소개했고 그는 기꺼이 감수를 맡았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일본어로 번역 출간(2015)한 바 있는 우에노 미야코 시인은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본 감수를 맡으며 “역사의 문을 여는 두근거리는 심정”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한다. 이후 9차까지 수정을 거친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본은 끝내 일본 내 출판사에 의한 출간은 거절당하고, 하우출판사 박영호 대표가 손길을 내밀어 지난 3월 드디어 한국에서 출간됐다.
“한·일 양국의 진정한 우호 관계는 올바른 역사 인식 바탕 돼야 가능해”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본 표지에 기재된 저자 이름은 지금은 고인이 된 류의석씨다. 그의 아버지, 즉 류리수 박사의 할아버지인 류규동씨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 위기에 놓여 일본으로 도망친 후 산골마을 기소 후쿠시마(木曽福島)에 정착, 류의석씨는 어린 시절을 일본 산골마을에서 보냈다. 외할아버지도 독립운동으로 고문 받아 타계하고, 아버지도 독립운동으로 도망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집안에서 자랐지만 일본 친구들과 일본문학을 깊이 좋아했던 류의석씨는 70세가 넘어서 평생의 과제를 마무리하듯 『백범일지』를 일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 책이 일본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한·일 양국이 진정한 우호를 이루어가는 한 걸음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맡고 있던 대학의 강의도 그만두고 번역본 완성 작업에 전념해 마침내 출판을 이뤄낸 류 박사는 책 출간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일본인들을 단죄하고자 책을 낸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일반인들, 소시민들이 백범일지를 통해 역사를 바로 알고 한국인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알게 된다면 일본 정부가 지금과 같은 극우적인 행태는 감히 벌일 수 없을 것이고, 양국의 진정한 우호관계가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일동포 학생들에게 『백범일지』 보내려 텀블벅에서 펀딩 진행 중!
류리수 박사는 현재 일본어판 『백범일지』를 일본 내 한국학교 및 조선학교에 보내기 위해 배우 권해효, 가수 안치환 씨 등이 뜻을 합쳐 설립한 조선학교 후원단체 ‘몽당연필’과 함께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 https://www.tumblbug.com/baekbum’에서 펀딩을 진행하고 있다. 프로젝트명은 ‘우리, 일본어 『백범일지』를 재일동포 학생들에게 보내요!’ 9월 16일까지 진행되는 이 펀딩을 통해 70여 개 학교(총 학생 수 7000여 명)에 3~5권씩 보낼 예정이다.
일본어판 『백범일지』는 일본과 한국의 틈바구니에 있는 재일동포 학생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학생들이 시각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 사진, 주석, 연보 등을 꼼꼼히 덧붙였다.
류 박사는 “한일 경제 대립을 겪으면서, ‘우리민족이 자주독립의 의지를 가지고 문화를 꽃피워 세계를 아름답게 이끌어가는 민족’이 되기를 염원했던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가 떠올랐습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재일동포 학생들이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고 느끼며,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정체성을 확립하여 힘차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책을 보내주고 싶습니다”라고 프로젝트 진행 이유를 밝혔다.
지난 7월 21일에는 일산의 한 음식점에서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본 감수자인 시인 우에노 미야코씨가 한국에 방문한 것을 환영하는 조촐한 행사도 진행됐다. 책 출간에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이들과 번역자인 고 류의석씨의 가족, 그리고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이 참여해 자축과 감사의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던 ‘백범일지 일본어판 출판 기념 모임’에 초대된 우에노 미야코 시인은 시종일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자리는 또한 건강한 상식과 역사 인식을 지닌 한·일시민들의 연대를 재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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