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

나만의 진로, 어렵지만 해내야만 하는 숙제

지역내일 2017-04-07

1. 저는 대학 안 갈래요
담임을 맡은 반에 30~40여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존재하니 모든 학생들이 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인데 그중에서 확고한 ‘진로의식’을 가지고 당당히 비진학의 길을 선언하는 학생들을 간혹 본다. 담임교사로서 그들의 선택이 얼마나 확고한지 근거가 확실한지를 확인하고 나서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졸업을 하고나면 바로 현장에 뛰어든다. 취업 후 이런저런 소감을 묻는다. 잘 해낼 거라는 다짐과 생각보다 고된 현장의 어려움이 뒤섞인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졸업생이 다시 찾아와 이러저러한 사회생활 경험담과 고충을 토로한다. 그리고는 머지않아(또는 곧바로) 대학 진학을 해야겠다면서 공부를 시작한다고 한다.

2. 저는 아무 학교나 다 갈래요
수시전형을 원하는(?) 대로 쓰고 수능을 보고 나면 대부분 학생들이 본인의 희망과 거리가 먼 결과를 받게 된다. 약 3주 정도의 짧은 휴가를 보내고 성적표를 받고나면 본격적인 정시 상담을 한다. 상당수는 수시지원 때보다 현실적 여건을 충분히 고려해 지원을 한다. 이때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수능 성적이 기대에 많이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이다.
받아든 성적으로만 보면 지원할 수 있는 학교가 거의 없는 상황인데도 학생이나 학부모는 어떡하든지 진학을 희망한다. 어찌 어찌해서 추가모집까지 마무리 되고나면 상당수는 어떤 방식으로든 대학에 진학을 한다. 빠르면 대학의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면 학교로 찾아와 대학 생활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한다. 재미가 없다거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거나 힘들다거나 대부분 비슷비슷한 고충을 이야기한다.

3.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학생은 공부를 딱히 잘하거나 완전히 못하는 것도 아니다. 주변 환경의 성화에 이길 수 없어 몸은 학교-학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성실히 생활한다. 주변에서 하도 뭐라고 하니 공부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무엇이 하고 싶은지 불분명하다. 고1 때라면 그나마 괜찮은데 고3이 되어서도 여전히 나름대로의 답을 정하지 못했다.
공부한다고 노력을 했으나 결과가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진로를 결정해야하는 시기가 다가왔는데도 진학을 할지 말지 본인의 확신은 부족한 상태로 부모나 학교가 그래도 고민의 기회를 가져보라며 진학을 권유하니 진학을 하는 쪽으로 결정한다. 정작 합격했음에도 그다지 기쁘거나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이 뚜렷해지지는 않는다.
나에 대한 탐색과 고민의 시간 아쉬워
이상 3가지 장면을 교직에 몸담는 동안 진로 상담을 하면서 자주 보게 되는 장면들이다. 추수지도라는 이름으로 졸업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 포함해 진로 상담을 하면 주인공과 시간만 다를 뿐 패턴은 비슷해서 상담을 하는 나 스스로조차 이전 졸업생의 상황과 혼동하기까지 한다.
덴마크계 미국인인 발달심리학자 에릭슨이 발표한 이론에 따르면 인간 생애를 통틀어 심리사회적으로 8단계의 발달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청소년기에는 정체감 대 역할 혼란(Ego identity vs. role confusion)을 겪으며 성장한다고 한다. 이 시기의 핵심과업은 자신에 대한 개인적 인식과 사회적 인식을 통일시키고, 자신의 능력, 역할, 책임에 대한 분명한 인식, 다시 말해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자신이 롤 모델이나 또래집단과 상호작용을 하며 일생을 통틀어 헌신할 가치 기준을 세워야 한다. 만약 이를 달성하지 못해 적응을 못하면 역할 혼란을 겪으며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환상을 갖기도 한다. 즉, 청소년 시기에는 내가 누구인지 타인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파악하면서 어른이 되어간다.
나는 우리나라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발달의 과업을 충분히 수행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대학입시에 초점을 맞춘 환경은 ‘나에 대한 탐색과 고민’의 시간을 충분히 주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탐색의 기회, 아니 그럴 여유조차 주지 못하는 빡빡한 사회적 환경에서 인간으로서 성숙해지기 위한 발달의 과정을 충실히 밟아나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대학입시라는 무게에 눌려 자신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학생들, 특히 학업성취도에서 두각을 보이지 못하는 상당수의 학생들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지낸다. 그 결과가 진학의 방향을 결정할 때 위에서 보여지는 상황들이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어렴풋한 기대로 자신이 무엇이 되겠다며 선뜻 진로를 세우고 사회로 바로 도전하거나, 자신에 대한 확신도 없이 그저 남들이 이야기하는 방향을 따라 진로를 결정한다. 더러는 아예 모든 것을 귀찮아하며 고민하기를 포기하는 모습들이 생각할수록 안타까울 뿐이다. 나 역시 교사라는 직업인으로서 이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기회를 빼앗는 ‘부역자’는 아니었는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가는 한국사회의 교육이라는 배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외치고 있는 선원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책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박정득 교사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진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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