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와인 숍들을 취재하다가 분당의 한 와인 숍에서 푸치니의 ‘라보엠’ 중 남자 주인공 로돌포의 ‘그대의 찬 손’ 악보를 발견했다. 와인 숍 대표는 요즘 본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면서 본인의 동호회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분당 정자동에서 50대부터 80대까지 30여명 정도가 매주 모여 우리나라 가곡과 서양의 가곡을 한 분씩 앞에 나가 독창을 한단다. 취재 본능이 꿈틀거렸다.
문하영 리포터 asrai21@hanmail.net
올해로 14년차 순수 가곡 동호회
정자동 가곡동호회 ‘라 돌체비타’는 2002년 봄에 결성돼 올해로 14년차에 접어들었다. 정자3동 주민센터 2층 대강당에서 매주 목요일 오후 1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 모임을 갖는데 특이한 것은 회원들이 매주 본인이 부를 노래를 선정해 연습해 와서 한 명씩 무대에 오른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 같이 모여서 제창하는 형식으로 모임이 진행되었는데 지금은 회원들의 기량이 날로 출중해져서 자신감도 키우고 무대 경험도 쌓을 겸 개인별 독창의 형식으로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정범(정자동·73) 회장은 전했다. 회원들이 본인이 부를 곡을 자유롭게 선정해 목요일 날 모임에 올 때 악보를 3부 가져오는데 한 부는 피아노 반주자에게, 한 부는 본인이, 마지막 한 부는 김화용(정자동·86) 지도교수에게 전달한다. 김화용 지도교수는 중앙대 교수를 거쳐 강남대학교 예술대학장으로 정년퇴임하였다.
“지난 14년간 우리 회원들 실력이 정말 눈에 띄게 좋아졌어요. 2006년 이었나 2007년 이었나 2년 연속 성남시 주최 아마추어 합창대회에서 수상해 소정의 상금을 탔는데 회원들이 한 목소리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자고 했던 것도 기억이 나고, 어떤 분은 성악 전공자도 아닌데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보다 더 기량이 좋은 분도 있어요.”
최고령 88세 회원도 왕성하게 활동 중
김 교수가 말한 성악과 학생들보다 기량이 좋아진 회원은 이 모임의 총무 김수기(정자동·58)씨로 강당 입구에서 계속 무언가를 적은 종이를 들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총무답다.
“좋은 어르신들과 함께 노래 부르는 게 너무 즐겁죠. 우리 가곡들의 가사를 보면 그 어떤 대중가요나 팝송에서 느낄 수 없는 고유의 정서가 있어요. 젊은 세대들이 가곡을 접할 기회가 없다보니 점점 우리 가곡 애호가들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요. 젊은 분들도 많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라며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인 ‘고향의 노래’의 이수인 작곡가를 작년 10월에 초청했던 일이 생각난다고 이야기했다.
‘라 돌체비타’의 회원 수는 현재 33명으로 50대부터 80대까지 있으며 최고령 회원은 88세의 김성민씨로 야탑동에서 정자동까지 매주 대중교통을 이용해 참석하신다.
“하나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몸이 더 건강해졌어요. 노래 부르니 행복해서 마음도 건강해지니 너무 좋아요. 나는 ‘홍매화’라는 곡을 좋아해”라며 수줍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붉은 매화꽃을 닮은 소녀의 모습이다.
가곡과 함께 시작한 제2의 인생
‘라 돌체비타’의 2대 회장을 지낸 손승재(정자동·70)씨는 “아마추어 합창동호회나 노래동호회 등은 많지만 순수 가곡 수업과 레슨을 받을 수 있는 곳은 흔하지 않습니다. 저도 은퇴 후 이곳에서 가곡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시작했는데, 사실 완전 초보자였습니다만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쉬운 곡부터 어려운 곡까지 단계별로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어 어떤 분이라도 음악에 대한 열정만 있으면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발성 연습 후 본격적으로 회원 한 명 한 명 무대에 올라 본인이 연습해 온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순서를 기다리며 연신 보온병에 담아온 물을 마시고 목을 풀며 긴장하는 모습을 보인 함태경(이매동·81)씨는 ‘사공의 노래’의 함호영 작사가의 딸이기도 하다.
함씨는 “오늘 처음 부르는 곡이라 너무 떨리네. 가사를 잊어버리면 어쩌지”라며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함씨가 악보를 김 교수에게 전달하고 무대에 오르자 김 교수는 좋은 곡을 골랐다고 기대감을 표했고, 함씨가 노래를 시작하자 어떤 회원은 눈을 감고 들으며 음악에 한껏 젖어 들었고 또 어떤 회원들은 노래가 끝나자 목청껏 ‘브라보’를 외치며 진심으로 박수치고 격려해주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 최고의 시간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동네 동사무소 강당 무대지만 성실하게 일주일 간 부를 곡을 연습하고 무대에 올라 최고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진지하게 노래하는 모습이 어느 유명 테너나 소프라노의 무대보다도 숭고해 보였다. 새로운 곡을 듣는 기쁨에 얼굴이 환해지는 회원의 모습과 다른 사람이 새로이 해석해 불러주는 곡을 집중해서 듣는 회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라 돌체비타’는 이탈리아어로 ‘달콤한 인생’이라는 뜻이다. 이곳에 모인 인생의 대선배들에게 과연 인생이 달콤했는지 묻는다면 뭐라고 답을 줄까 궁금해졌다. 학창시절 음악 교과서에서 우리의 가곡을 접한 후로 들을 일도, 부를 일도 거의 없었던 가곡이었다. 인생의 후반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의 목소리로 꼭꼭 씹어서 불러내는 가곡의 가사들이 한 소절 한 소절씩 가슴께로 파고들었다.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값있게 살아가리라.”
문의 : 이정범 회장 010-2207-6929
김수기 총무 010-4258-0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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