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말씀은 틀렸다. 남자가 부엌에 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꾸로 좋은 일만 늘어났다. 주부의 어깨가 가벼워졌고 아이들의 입맛은 다양해졌으며 더 많이 웃게 됐다. TV 속 스타보다 인기 있는 우리 집 셰프, 요리하는 남자들을 소개한다.
리포터 공동취재
동패동 정하영씨 남편 마승표씨
교하의 차줌마라 불러 주세요
정하영씨의 남편 마승표씨는 퇴근 후 반찬을, 주말에는 특식을 만든다. 최근에는 방송에 나오는 셰프들을 따라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처음부터 요리를 좋아한 건 아니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바쁘게 일하는 아빠를 간절하게 찾는 아이의 모습을 본 다음부터다. 아내는 육아로 지쳐있고 가족 내 유대감은 희미해지는 것도 고민이었다.
“결국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사는 거고 사회적인 성공보다 가정의 안정과 안락함이 우선이라는 깨달음이 왔어요.”
안타깝게도 남편의 요리는 종종 아내의 구박으로 이어지곤 한다.
“차줌마 짬뽕 만들겠다고 오징어 새우 꽃게 더덕 오징어 홍합 등 재료비만 10만 원은 들었다니까요. 맛이고 정성이고 고맙기는커녕 고함만 나오더라고요. 5천 원짜리를 10만 원에 먹냐? 대충 좀 해! 라고요.”
그래도 정씨는 늘 고맙다. 늦도록 일한 몸을 끌고 부엌을 책임져주는 진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으뜸으로 꼽는 남편의 요리는 볶음밥이다.
“남편이 정말 할 거 없을 때 볶음밥을 하는데 저는 세상에서 그게 제일 맛있어요. 냉장고에 남은 재료들로 볶아주는 주말 아침의 볶음밥이 제일 좋고 맛있고 특별해요.”
주엽동 박원경씨 남편 홍종기씨
상남자 남편의 반전 매력
대학교에서 유도를 했다는 홍종기씨. 그는 상남자 포스가 물씬 풍기는 외모와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이러한 그도 주방에만 들어서면 여느 주부의 손길이 부럽지 않은 섬세한 남자가 되곤 한다. 특히 한껏 늘어지고 싶은 토요일 오전, 그는 살림에 지쳤을 아내, 박원경씨에게 모처럼의 여유로운 아침을 마련해주고자 아침 식사 장만을 자처한다. 메뉴는 초등학생 아들과 아내 모두 좋아하는 볶음밥 종류가 주를 이룬다. 부인 박원경씨는 “남편이 일주일동안 냉장고에 남은 갖은 야채 모아서 볶음밥을 만드는데 가끔은 볶음밥 위에 소스로 하트 문양이나 스마일 얼굴을 그려주기도 한다”며 웃음 지었다.
간혹 집에서 손님 초대 요리를 해야 할 때에도 남편은 요리를 한다. 소갈비찜이나 감자탕 등 난이도 높은 요리도 만드는데 이를 맛본 손님들 반응이 아주 좋단다. 또 야외로 캠핑을 가서는 스테이크나 소시지 요리 등 근사한 캠핑 요리도 만들어 가족 모두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요샌 체리를 사다가 체리청을 만들어 병에 넣어두었는데 뚜껑 개봉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박원경씨는 이러한 남편의 요리 솜씨 비결에 대해 “TV나 인터넷 등에서 눈여겨 봐두었던 요리를 직접 만들어보는 남편의 습관 덕분”이라고 귀띔했다.
마두동 김미숙씨 아들 허진석군
엄마의 슈퍼파워는 아들의 ‘볶음밥 그라탕’~
김미숙 씨는 남편이 운영하는 사업체에서 함께 일하는 워킹 맘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사업을 했으니 전업주부처럼 아이들을 잘 챙기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김씨의 아들 허진석군은 작년에 제대하고 복학한 대학생이다. 평소 요리를 즐겨한다기보다 필요(?)에 의해 하는 편이라는 허군이 주로 하는 요리는 된장라면 해물라면 라면볶음 등 라면에 멋 부리기 정도.
김미숙씨는 “요 몇 년 사이 사실 사업이 이전 같지 않았지만 혹 군대에서 방황할까봐 티를 못 냈죠. 마음 같아선 제대하는 날 축하 파티도 해주고 싶었고 또 오랜만에 엄마의 집 밥도 해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요. 그런데 아들이 어느 날 식탁 위에 쪽지와 함께 볶음밥 그라탕을 해놓고 갔더라고요”며 감격스러워 한다. 볶음밥 그라탕은 라면요리에 지친(?) 아들이 밥이 먹고 싶을 때 냉장고에 있는 야채들로 볶음밥을 만들고 그 위에 치즈를 올린 후 렌지에 돌려 만들어 먹는 특식이라고. 어느 새 훌쩍 자란 아들, 말하지 않아도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엄마, 아들만 믿으셔’라는 쪽지와 함께 만들어준 요리. 김씨는 “내 아들의 요리, 그보다 더 한 슈퍼파워가 없겠죠”라고 한다.
탄현동 손영재씨 남편 배정현씨
내가 아니어도 아이 밥쯤은 책임져 줄 든든한 사람
영국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지 6개월 정도 됐다는 손영재씨 가족. 외식문화가 한국과 다른 외국 생활은 남편 배정현씨가 주방과 친해진 계기가 됐다.
손씨는 “외식이 거의 없으니 삼시 세끼를 꼬박 차려야 하는 게 힘들어 보였는지 남편이 주말에는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요리를 하기 시작했지요”라고 한다. 평소 일 덕분에 유럽 쪽 문화를 많이 접하기도 했고, 20대 때 독일에서 공부한 적이 있던 터라 파스타를 시작으로 메인요리 한두 개쯤은 뚝딱 만들어내곤 했다.
“영국에 있을 때 남편이 칸틴(구내식당) 셰프와 친해졌어요. 하루는 셰프와 함께 수산시장에 가서 재료들을 잔뜩 사와서 함께 요리를 해주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상차림이었어요”
손님 초대를 워낙 좋아하는 남편 덕에 한국에 들어와서도 주방에 함께 설 일이 많다는 손씨 부부. 또한 도자기 공부까지 했다는 남편은 출장을 가서도 그릇과 주방집기를 사올 정도로 조예가 깊다고. 손씨는 “보통 남편들은 그릇을 사 모은다고 하면 싫어하잖아요. 근데 저희는 ‘음, 이건 아니야’ ‘이건 잘 샀네~’하며 평까지 해줄 정도예요”라고 웃음 지었다.
앞치마를 두른 남편을 볼 때마다 손 씨는 감사하고 든든하기까지 하다.
“제가 집을 비워도 우리 아이 밥은 잘 챙겨줄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든든하고 고맙기도 해요. 반찬 하나를 먹더라도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정성이 아이에게도 좋은 기운을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대화동 김은숙씨 남편 김봉중씨
먹고픈 것 다 해주는 남편은 ‘백주부’ 급 요리사!
“저는 음식을 다 남편한테 배웠어요.”
24살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결혼한 김은숙씨의 ‘요리 사부’는 남편 김봉중씨였다. 은숙씨는 남편에게 밥부터 국, 찌개, 반찬 등 음식 하는 법을 하나하나 배웠다. 봉중씨는 군대에서 ‘장군을 모시며’ 음식을 배웠다고 한다. 그 솜씨는 주말에 가끔 일품요리 하나 하는 정도가 아니다.
“제가 먹고 싶은 걸 해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해줘요. 호호”
직장에 다닐 때도 봉중씨는 일주일에 2~3번 아내에게 음식을 해줬고, 퇴직한 지금은 더 자주 앞치마를 두른다. 봉중씨가 자주 선보이는 음식은 소고기무국, 부추전, 오징어튀김, 수제비 등. 그 중 은숙씨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개운한 멸치육수에 호박을 썰어 넣고 끓인 수제비다. 수제비 반죽을 얇게 잘 떼어내는 남편은 아내가 원할 때마다 수제비를 끓여준다고.
“제가 밀가루 음식 소화를 잘 못시켜요. 근데 20년 전쯤 우리밀이 나오기 시작할 때 남편이 방부제 없는 통밀가루를 사와서 수제비를 만들어줬어요. 그때 그 수제비 맛이 지금도 기억나요.”
봉중씨는 십 수 년 전 은숙씨의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해마다 김장도 함께 담근다. 날마다 저녁 식사 준비도 함께 한다는 부부.
“제가 가지 찌고 콩나물 무치면 남편은 옆에서 마늘을 까죠. 백년해로 하는 분들이 왜 하시는지 알겠더라고요.(웃음)”
성사동 심혜정씨 남편 황철승씨
아이들이 제가 하는 것보다 아빠 요리를 더 좋아해요!
인천 도로교통공사에 근무하는 황철승씨는 세 아이의 아빠이자 남편이다. 평소에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주말이 되면 맛있는 음식으로 식구들의 입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요리사로 변신한다고.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운 적은 없지만 학생 때 했던 오랜 자취생활이 그의 요리 비결. 거기에 가족을 위한 사랑까지 더해졌다.
요리를 잘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요리하는 것을 즐긴다는 황씨. “신혼 초부터 요리를 곧잘 해주곤 했어요. 더구나 아이들이 셋이고 저도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날 때는 요리를 자주 해주는 편이에요. 지난 2년간 제가 일하느라 많이 바빴거든요. 그래서 토요일 아침과 저녁식사는 늘 남편이 준비했죠. 아이들이 제가 만든 음식보다 아빠가 만든 음식을 더 좋아해요. 제가 먹어도 제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더라고요.(웃음)” 아내 심혜정씨의 말이다.
“남편이 해준 음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오븐에 구운 돼지고기를 여러 가지 채소를 곁들여 씻은 묵은 지에 보쌈처럼 싸먹는 요리예요. 그날은 평일이었는데 저녁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남편이 그 요리를 해서 아이들을 맛있게 먹이고 있더라고요. 눈물 나게 고마웠죠. 아이들에게 늘 친구처럼 대해주고 2년간 제 대신 요리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하고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어요, 여보~.”
탄현동 김연신씨 남편 허윤회씨
“요리 잘하는 남편 덕에 뱃살만 늘었어요”
남편 허윤회씨는 술안주를 잘 만든다. 주말이면 아내 김연신씨와 맥주를 즐겨 마시는데 그럴 때마다 허윤회씨가 나서서 안주를 해결한다. 요리 실력도 수준급이다. 평소에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가 남달라 주부들도 흉내 내기 힘든 요리를 척척 잘도 만든다. 골뱅이 무침부터 주꾸미볶음, 전복, 삶은 소라, 회 무침까지 주로 제철에 나는 해산물 요리를 자주 한다.
“요즘 남편이 사업(유통)하느라 바빠서 주말에는 꼭 맥주를 한 잔씩 해요. 지난주엔 소라를 삶아줬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아플 때나 화해할 때, 술 마신 다음날도 요리를 해줘요. 결혼한 지 16년짼데 요리 잘하는 남편 덕에 요리 실력은 늘지 않고 뱃살만 늘었다니까요.”
허윤회씨가 요리를 처음 시작한 건 신혼 때다. 공항에서 근무하는 아내를 위해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이고 뱃속 아기를 위해 과일을 깎아낸 게 시작이었다. 지금은 차와 커피는 기본이고 쌍화차, 꿀차도 문제없다. 하나씩 하다 보니 재미가 생기고 요리 실력도 쑥쑥 늘었다고. “살아보니 집안이 편안해야 바깥일도 잘 되는 거 같아요. 바쁘더라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가끔 조미료의 힘(?)을 빌리기도 하지만 아내는 항상 맛있다고 해요. 요즘은 딸도 아빠 요리를 좋아하는데 두 여자가 맛나게 먹어주니 요리가 더 즐겁네요.”(남편 허윤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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