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삼송지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애잔한 아코디언 소리가 나른한 오후를 깨우고 있었습니다. 좁아졌다가 넓어지는가 하면 작아지는 듯 다시 커지는 아코디언의 선율, 그리고 하모니카 연주로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곳은 바로 아파트 경로당.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스무 명 남짓한 관중도, 연주하는 이들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입니다. 우리 기곡부터 흘러간 옛 가요가 연주되면서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는 동안, 연주단 중앙에서 능숙하게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가진 재능을 십분 발휘, 일주일 내내 아이돌 못지않은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는 실버들의 스타 채경자 씨(73세). 악기강습과 봉사로 일주일이 부족하다는 그의 인생2막,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어릴 적 배운 피아노, 평생 음악과 함께 하게 돼
“매주 월요일은 흰돌종합복지관에서 아코디언 강습이 있고요. 수요일은 신도동 종합복지회관에서, 또 주중에 주엽동 성당이나 어린이집에서도 오카리나나 멜로디언 등 강습을 하고 있습니다. 목요일은 오늘처럼 경로당이나 어린이집, 요양시설 등을 찾아다니며 봉사연주를 하고 있고 주말에도 찾는 곳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는 편이라... 거의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을 때가 많아요.”
일흔 셋, 10kg에 이르는 아코디언의 무게가 버겁기도 하련만 “아코디언의 무게는 봉사를 통해 얻는 보람과 행복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라며 밝게 웃는 그. 집에서 쉬는 날은 몸이 쳐지고 활기가 없다가도 봉사만 나오면 즐겁고 행복하다는 채 씨는 젊은 시절 제법 큰 규모의 음악학원을 운영하던 원장이었다. 교육감이었던 아버지의 권유로 피아노를 배운 것이 계기가 돼 사범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중학교 음악교사를 지낸 그는 결혼 후 소일 삼아 집에 있던 피아노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부모님을 잘 만난 덕에 그 시절에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고, 또 전공을 하게 됐으니 행운이죠. 당시 제 나름대로의 교습법이 입소문이 났던지 서울 목동에서 피아노 23대를 갖춘 음악학원으로 규모가 꽤 컸었지요. 아마 그대로 쭈~욱 잘 나갔다면 지금처럼 봉사에 눈을 뜨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뜻하지 않은 사고로 피아노 접고 아코디언으로
삶은 때로 뜻하지 않은 곳으로 방향전환을 하기도 한다. 잘 나가던 음악학원 원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50대 중반, 채경자 씨도 뜻하지 않은 사고로 피아노학원을 접어야했다. “운동화를 신었어야 했는데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동네 뒷산에 올랐다 살얼음판에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했어요. 허리수술 후 보호대를 차고 피아노 앞에 앉아 강습을 하다 보니 건강에 무리가 돼 학원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평생 피아노를 치고 가르쳤던 터라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진 못했다. 그러던 차 그의 음악적 갈증을 풀어준 것은 아코디언. “10년 전 일산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덕양노인종합복지관에서 아코디언을 강습한다는 걸 알았어요. 피아노를 쳤으니 아코디언의 건반이 익숙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바람통을 접었다 펼칠 때 마다 그 애잔한 음색이 마음을 끌더라고요. 거기다 무게는 좀 버겁지만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음악을 전공한 덕분에 실력도 일취월장, 아코디언을 배운 지 5년 여 만인 지난 2010년 ‘제3회 전국 연주 아마추어 동호인 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고, 마음에 쏙 드는 보랏빛 아코디언도 부상으로 받았다. 무게가 좀 있어서 봉사연주를 나갈 때는 그보다 좀 가벼운 것을 사용하지만 지금도 흰돌종합사회복지관에 그 아코디언을 두고 매주 월요일 강습이 있는 날 꼭 그 아코디언을 사용한다는 채경자 씨. “그 아코디언은 내게 봉사에 눈을 뜨게 해준 악기 이상의 의미”라고 웃는다.
재능기부로 실버들에게 활력을 줄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해
봉사연주 이상으로 그를 행복하고 보람되게 하는 일은 시니어들에게 아코디언, 오카리나, 하모니카 등 악기를 가르치는 것. 수강생들은 50대 이상 시니어들로 악기를 처음 잡아본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수강생들이 동요나 가요 등을 익히면 함께 양로원 요양병원 경로당 등으로 함께 연주 봉사를 다닌다. “우리 나이 때는 음악수업은커녕 악기도 한 번 만져본 적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러다보니 자신이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걸 얼마나 감격해하는 지 몰라. 수업시간이 끝나도 더 배우려고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아서 탈이죠.(웃음)” 그는 요즘 아코디언 뿐 아니라 멜로디언, 오카리나, 하모니카 등을 함께 연주하고 강습한다. “나이든 이들에게 아코디언의 무게감이 좀 부담스럽긴 해요. 그래서 제가 오카리나를 배웠는데 그 음색이 정말 아름다워서 요즘 그 악기에 매료돼 있답니다. 또 아코디언이 없는 이들은 멜로디언으로 연주를 익히게 합니다. 멜로디언이 시니어들에게 접하기 쉬우면서도 훌륭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좋은 악기거든요.”
실버들에게 악기 하나쯤 다룰 수 있도록 가르치고 함께 연주할 때 뿌듯함을 느낀다는 그. 강습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그런 즐거움을 함께 공유하는 보람도 크지만 무엇보다 봉사를 통해 시니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기쁨이 크다고 한다. “몸을 못 쓰는 노인들도 처음엔 반응이 없다가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어깨를 들썩이기도 합니다. 또 요즘은 경로당이나 시설에 아흔 살 넘은 노인들도 많아요. 그 어른들이 그 나이까지 평생 악기연주를 처음 들었다 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 짠하기도 하고 제가 아직 가진 달란트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나이가 더 들어 아코디언이 무거워서 못들 정도가 되면 오카리나나 멜로디언으로라도 봉사연주를 다니고 싶다는 채경자 씨. 세월을 접었다 펴는 듯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그의 모습, 멋지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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