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밤도 깊어 으슥한 시간, 학교 지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쿵작 쿵작 쿵작~’ 다소 코믹하고 박력 넘치는 노래 소리를 따라가 보니 교실 한 가득 중년 남성들이 모여 합창 연습을 하고 있다. 가사가 틀리고 음정이 맞지 않아도 괘념치 않고 웃음꽃을 피워내는 이들, 명덕여자중학교(교장 박상권) 아버지합창단 단원들이다.
송정순 리포터 ilovesjsmore@naver.com
일요일 저녁, 아버지들이 학교로 모이다
명덕여중 아버지 합창단은 지난 2008년 3월 창단됐다. 명덕여중이 개교 30주년이 되면서 ‘30주년 행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벤트를 계획하던 중 이선옥 교사의 ‘아버지 합창단’을 만들어 무대에 올려보자는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우리 딸이 중학생이었는데 아빠하고 서먹해지다 못해 관계가 안 좋아지더라고요. 우리 집도 사정이 이런데 학생들 집도 마찬가지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 아빠가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자는 생각에 아버지 합창단이 창단됐습니다.”
3월 학부모 총회를 기점으로 합창단원 모집에 들어갔다. 가정통신문도 돌리고 총회에 참석한 유일한 아빠에게 지원서를 내밀었다. 드디어 일요일 오전 합창단의 연습이 시작됐다. 반주도 없이 카세트를 틀었다. 과묵하신 아버지들은 말이 없고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래만 불렀다. ‘회사 일이 바빠 앞으론 나올 수 없다’는 통보를 하러 온 아빠들은 선생님의 열정에 차마 말을 못 때고 조용히 눌러앉았다.
드디어 무대에 오르는 날,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아이들이 불러주는 노래에 맞춰 아빠들이 등장했다. 그 때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 콘서트 보다 더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첫 곡인 ‘여자보다 귀한 것은 없네’ 를 박자도 음정도 잊은 채 긴장한 상태로 불렀다. 안무에 맞춰 다음 곡인 ‘희망사항’을 부르려니 몸이 더 뻣뻣하게 굳어짐을 느끼는 아빠들. ‘하나란 아름다운 느낌’을 전교생이 같이 부르면서 강당은 울음바다가 되고 회원들은 누구의 아버지가 아닌 전교생의 아버지가 됐다고 그 때 상황을 고백한다. 아빠의 도전을 처음엔 부끄럽게 생각했던 딸들과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던 아빠들이 이번 합창을 계기로 좀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자리가 됐다.
합창이 끝나자마자 감동을 잊어버리기 전 참여한 아빠와 가족, 교사들이 글을 써 ‘꿈을 노래하는 시간’이란 문집도 발간했다.
지휘자를 갖춘 정식 합창단이 되다
3기 회원부터는 더 이상 카세트를 틀어놓고 연습을 할 수는 없었다. 지휘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차 성악을 전공한 아빠의 재능기부로 비로소 합창단의 모습을 갖춘 명덕여중 아버지 합창단이 재탄생했다.
이제 아버지 합창단은 학교 축제 때 마다 출연하는 것은 물론 강서교육청이나 서울시교육청 행사 때도 등장한다. 노래 범위도 넓혔다. 민요, 가곡, 트로트, 팝송까지 두루 섭렵하며 진가를 올리고 있다.
때로는 학교 체육행사에 회원들이 참여하기도 하고 아버지 합창단 전 가족이 강원도로 캠프를 떠나기도 하면서 회원들의 결속력은 더욱 단단해져간다.
매번 파트 연습, 맞추고 또 맞추고
현재 명덕여중 아버지 합창단은 총 35명이다. 사실 아직 합창단 회원들은 악보도 잘 볼 줄 모른다. 음정 박자는 틀리기 일쑤. 파트 연습도 매주 모일 때마다 3~4번씩은 해야 합창을 맞춰볼 수 있어 한 곡 연습 시간이 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일요일 저녁,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오롯이 딸을 위해 노래를 부르러 나오는 회원들. 하지만 이제 노래는 아버지들 삶에 기쁨이 됐다.
임권빈 회원은 “딸의 권유로 아이에게 선물을 준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연습과 모임을 더해갈수록 오히려 딸에게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고 전한다. 한영철 회원은 “딸과 친해지고자 하는 마음에 합창단에 가입하게 됐다”며 “무대에서 딸과 눈이 마주쳤을 때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한다”고 전한다. 윤용 회원은 “일요일 저녁 시간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하는데 합창단 연습 때문에 가족과 더 멀어졌지만 오히려 나를 찾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염윤철 회원은 “아버지합창단은 50대 아빠들의 로망”이라며 “합창단원이 되고부터 노래를 부르며 감동을 받는다”고 전한다. 민성준 회원은 “합창은 호흡도 맞춰야 하고 파트에 따라 나누어 불러야 한다. 자기 소리를 죽여야 합창이 된다는 걸 새삼 알았다”고 강조한다.
어느새 1기 회원들의 딸은 대학생이 됐고 곧 결혼한다는 얘기가 나올 때가 됐다. 회원들 중 딸이 결혼을 할 때 원하기만 하면 아빠들이 무대에 설 의향이 있단다.
“내 딸을 찾아보고자 무대에 올랐지만 막상 무대에 서니 모두 내 딸같이 보였다. 목이 메여 목소리가 안 나왔다”는 아버지들의 고백처럼 전교생의 아버지가 돼 버린 아버지합창단의 따스함이 계속 전해지기를 기대해본다.
미니인터뷰
이선옥 지도교사
“아버지 합창단은 에너지원입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연습에 참여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오히려 제가 감동을 받고 일요일 저녁 연습시간이 기다려집니다. 바쁘신 일정을 조절해가며 참여하시는 아버지들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최성욱 지휘자
“1기 회원들이 반주도 없이 카세트에 맞춰 반복 연습 만으로 무대에 섰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합창단 지휘를 맡고 보니 음악적 감각은 부족하더라도 열정과 사랑으로 뭉친 아빠들의 노력이 지금의 아버지합창단을 있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오종열 회원
“엄마 대신 처음으로 학부모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중학생이 된 딸의 학교가 궁금해 참석했는데 합창단 지원서를 내미셨어요. 거절하기 힘들어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지원했지만 지금은 합창단원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김동찬 회원
“제 허락도 없이 합창단에 가입이 돼 있었습니다. 처음 연습 때 못한다 말하려고 나갔으나 열정적으로 지도하시는 선생님을 보면서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 번 두 번 참석하다 무대에서 오르고 그 감동으로 지금까지 오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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