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단풍을 말할 때면 나도 모르게 꼭 “아!”란 감탄사가 저절로 따라붙는다. 치악산 자락에 살며 그리된 것 같기도 한데, 실은 산마을에서 나고 자란 태생적 DNA영향이 더 클 것이다.
“아! 단풍”이 들고 있다. 온통 원색의 물결로 천지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들뜨게 만드는 나날이다. 매일이 감사하고 자랑하고 싶은 계절이다. 곧 온 산과 마을이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릴 게다. 이맘때 쯤 산마을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단풍이 불 탄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 한다. 단풍은 산꼭대기부터 온다. 잠깐 사이 마을까지 내려와 울타리, 가로수 하나씩 색이 변하기 시작해 순식간에 온 동네 나무들로 불이 옮겨 붙는다.
나뭇잎의 마지막 향연이 그렇게 펼쳐진다. 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광합성을 하지 않는 잎을 자신의 몸에서 하나씩 떼어 낸다. 여름내 일을 시킨 잎사귀에게 먹이를 주지 않아 말라 죽으며 색소가 변해 단풍이 된다. 최후의 발악처럼 마지막은 화려하다. 그 잔인한 화려함에 취해 감탄한다. 경기장에서 검투사의 죽음을 즐기며 환호했던 로마인들처럼…
전국을 떠돌다 만난 단풍의 기억이 많다. 이사 오기 전 치악산 상원계곡 안쪽 전불이란 마을을 찾았다 불처럼 타는 단풍을 보고 주저앉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자동차를 타고 가며 감상할 수 있는 단풍길로는 한계령이 유명하다. 가을 강원도 길은 어딜 가나 단풍터널이지만 특히 평창 진부에서 정선으로 가는 길, 강릉에서 임계로 가는 삽당령길, 임계에서 동해로 나가는 백봉령길을 가보지 않고는 단풍길을 제대로 말할 수 없다.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에서 본 단풍은 고풍스러웠고 군산의 간이역인 임피역사를 수북히 덮고 있던 은행나무 낙엽은 너무 평화로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정주의 고향인 고창 질마재마을 미당시문학관 마당에서, 국화 무리 속에 홀로 노랗게 물들어 석양을 받던 은행나무는 나에게 너무 외롭고 고독한 기억이다. 신라 때 최치원이 조림한 숲 함양 상림의 꽃무릇 무더기와 이내 맞았던 단풍은 지리산처럼 장엄했다.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붉은 단풍은 핏빛이라 발을 멈추었다. 남한강길을 따라 가다 만난 가을들판과 감국 무리와 까치밥 몇 개 남은 감나무 단풍은 풍요롭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다.
단풍이 지는 곳은 계곡이다. 산꼭대기에서 시작한 단풍이 계곡에서 진다는 것을 산에 살아보면 안다. 떨어진 단풍잎이 계곡물에 모여 떠내려가다 쌓이기도 하고, 시리도록 투명한 물속에 잠기기도 한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계곡물로 떠나가는 단풍들이 빛 바래 사라지면 곧 겨울이 된다. 겨울나기를 준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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