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목수였다. 농사짓는 틈틈이 남의 집도 짓고 고치는 일을 했다. 동네에는 아버지가 지은 집이 많다. 손재주가 좋아 집에서 사용하는 소소한 물건들은 직접 만들어 썼다. 지게와 같은 농기구는 물론이고 의자나 책장, 함지박 등 못 만드는 게 없었다. 싸리나무나 칡넝쿨을 다듬어 광주리나 다래끼, 주루먹 등을 만들어 놓으면 주변에서 감탄을 했다.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요즘도 민속품으로 지게를 주문받아 몇 십 개씩 만들어 주기도 하고 때때로 윗방에 자리틀을 펼쳐놓고 부들자리를 매신다. 달그락거리는 고드랫돌 소리만으로도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버지는 일자무식이다. 할아버지는 인근에서 글이 가장 좋은 분이셨다. 할머니 말씀이다. 시골서 한학을 했지만 쓸데가 없었다. 마을 혼례 때나 상을 당했을 때 대신 글을 써 주고 경을 읽는 것이 공부한 것을 써 먹는 전부였다.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와 해방, 6.25사변과 박정희시대 등 격변기를 살며 시골 한학자는 밥도 돈도 안 되는 글 공부를 평생 후회하고 사셨다고 한다. 신학문의 급류 속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책을 읽다 그 울분이 병이 돼 결국 돌아가셨다. 당신이 그러다보니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정띠게 공부하느니 일이나 열심히 배우라는 것이 할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공부를 접은 젊은 아버지는 소문난 일꾼이 됐다. 손재주도 많았고 눈썰미가 있다보니 집 짓는 일까지 아버지한테 맡겼다. 목수 일을 배우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그리됐다고 한다. 수치로 계산할 것이 많은 집 짓는 일을 일자무식이신 아버지는 본인의 셈법과 어림으로 딱딱 맞추어냈다.
방학 때 집에 가면 종종 아버지 조수로 따라다녔다. 원래 말이 없으신 분이었고 그나마 꺼내는 말씀도 칭찬보다는 혼 내키는 것이 많았다. 특히 안 보인다고 당장 쓸모없다고 대충 넘어갔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정도가 아예 없었다. 마당을 쓸어도 검불하나 없어야 했고 안 보이는 구석까지 청소를 해야 했다. 당장 아궁이에 때면 없어질 장작을 쌓아도 선이 맞아야했다. 성품이 그러니 집 짓는 일은 어땠겠는가? 그런 분을 따라다니며 조수노릇을 하자니 죽을 맛이었지만 일을 마치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 성취감이 컸다.
요즘 전원주택 세 채를 짓고 있다. 내가 살 집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팔 집이지만 지으면서 젊은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한다. 자재도 다르고 공법도 아버지 방식은 하나도 없지만 방학 때 조수로 따라다니며 들었던 잔소리는 쟁쟁하다. 대충하다 혼났던 기억을 상기하며 스스로를 챙긴다. 목수들에게도 잔소리를 한다.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집을 짓고 싶다. 상량식 때는 아버지를 모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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