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목요일 오전, 일산노인종합복지관 2층 음악감상실에서는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클래식의 향연이 펼쳐진다. 계절마다 바뀌는 호수공원의 풍경 위로 ‘고향의 봄’이 흐르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다본 대관령의 장관이 펼쳐지는 동안 가곡 ‘산길’이 흐른다. 음악감상실 안을 메운 30여 명의 청중들이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음악을 감상하는 2시간 동안 맨 뒤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영상과 음악을 편집한 정병숙(85세)어르신이다. 5년 전부터 일산노인종합복지관 ‘목요 클래식 감상’ 시간에 사용할 DVD를 제작하고 음악회 진행을 맡는 등 봉사활동을 해온 정병숙 어르신. “이렇게 오래 음악감상회를 진행하게 될 줄을 몰랐어요. 우리나이엔 트로트나 가요가 익숙하잖아. 처음엔 무슨 클래식? 하면서 인기가 없었어요. 그런데 한 번 두 번 참석한 이들이 꽤 좋았던가봐. 이젠 음악 감상 시간을 기다리는 이들이 꽤 많아요.” 컴퓨터 활용 능력 하면 젊은이들이 더 뛰어나다(?)는 편견은 정병숙 어르신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피나클, 베가스, 무비메이커, 파워포인트, 스위시, 포토샵 등 젊은이 못지않은 감각으로 다큐멘터리 제작 삼매경에 푹 빠진 어르신을 만나보았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퇴임 후 본격적으로 영상작업 즐겨
“일산노인종합복지관 음악감상실에서 처음부터 클래식을 감상한 것은 아니고, 이전엔 가요나 트로트를 주로 틀었어요. 그것이 좀 아쉬워서 그동안 찍은 영상에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해 클래식 DVD를 만들었지. 그러다 우연히 음악감상실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서현숙 씨가 같이 즐기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고, DVD를 본 복지관 측에서 목요클래식감상 프로그램을 신설하게 됐어요.” 지난 목요일 짧은 시간이지만 음악감상실에서 정병숙 어르신이 제작한 영상과 음악을 접하고 나니 그 시간이 왜 어르신들의 마음을 흔드는 지 알 것 같았다. 문외한의 눈에도 가사의 의미를 잘 살린 영상은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어르신이 지금까지 만든 클래식 DVD타이틀은 300여 편 이상, 사실 그의 작업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지난 해 9월 30일 열린 서울노인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낙원은 고독한가’가 본선 작품으로 선정돼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제6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낙원은 고독한가’ 본선작품으로 선정돼
이 작품은 행복한 노년의 상징으로 알려진 실버타운에서 살다가 나온 노인들의 경험담을 통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편리가 아닌 자유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그려내 주목을 받았다. 어르신은 이 작품을 위해 실버타운을 직접 찾아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실버 세대의 외로움을 영상에 담았다고. “2년 전 노인복지회관에서 친하게 지내던 이가 고급 실버타운으로 이사 가서 그곳에 놀러 갔었어요. 강원도 바닷가 근처 경치 좋은 호텔급 실버타운인데 천국 같았습니다. 그런데 1년 후 그 부부가 다시 돌아온 거예요. 반년을 살고 보니 사람이 그리워서 안 되겠다는 거였죠. 마침 그때 찍어놓은 영상도 있고 해서 그 이야기를 11분짜리 다큐멘터리로 만들었죠.”
다큐멘터리 ‘낙원은 고독한가’가 노인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이전부터 어르신이 쌓아온 영상작업 이력은 만만치 않다. 20대부터 사진과 클래식을 취미로 즐기던 어르신은 1995년 서울 서교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하면서 본격적으로 비디오를 찍기 시작했다고. “학창시절부터 음악도 좋아했고 그때부터 모은 LP판이 3천여 장이 넘어요. 교직생활 중에는 교직자료 담당을 하기도 해서 늘 사진과 영상을 가까이 했지요. 그러다 퇴직 후 본격적으로 영상을 찍기 시작했는데 편집하고 DVD를 만드는 작업이 힘들긴 하지만 내 작품을 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끼고 그 이상 기분이 좋을 수 없어요. 그 맛에 또 카메라를 들고 나가게 돼요.(웃음)”
이렇게 취미를 살려 주변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다큐멘터리들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먼저 알려지기도 했다. 지난 2002년 ‘샘터의 친구들’이란 작품으로 일본 동경 비디오페스티벌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것. “퇴직 후 무료함을 덜기 위해 아침마다 약수터에 나가면서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됐어요. 노년의 동병상련이랄까,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일본에서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이 밖에 강화도를 소개한 ‘강화도 문화와 역사(1999년 작)’와 행주대첩을 소재로 만든 ‘집 없는 영혼을 찾아서(2013년 작)’ 등 열정으로 빚은 작품들이 여럿이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건강비결
어르신은 2012년 고양영상미디어센터에서 일산노인종합복지관에서 함께 컴퓨터교육을 받은 수강생들의 동호회 ‘정진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 ‘프리미어’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을 정도로 실력파다. 하지만 한 편의 DVD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같은 곡을 반복해서 들어야 하고 그에 맞는 영상을 편집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들을 찾고 또 봐야하는 수고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아내와 가족들의 걱정을 듣기도 하지만 어르신은 어떤 일에 몰두하다 보면 아플 새도, 외로울 새도 없단다. “지금까지 거의 약을 먹어 본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한 건 내가 만든 작품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또 그런 모습을 기대하며 영상을 찍는 일을 멈추지 않기 때문 아닐까요.(웃음)”
다른 건 욕심내지 않아도 좋은 영상을 찍기 위한 전문편집시설과 오디오시스템은 집에 갖추고 있다는 어르신, 아무래도 복지관 음악감상실에선 좋은 소리와 영상을 보여주는데 한계가 있어 아쉽다고 한다. “복지관에서 집까지 3.5km인데 늘 이 길을 걸어 다니면서 눈이 바빠요. 좌우로 아름다운 풍경이 너무 많거든. 거리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들과도 인사를 나누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에 아름다움을 발견하죠. 사계절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아름다운 걸 보면 그냥 넘기기 못한다는 심미형(審美形), 꿈을 잃지 않고 열정을 멈추지 않는 영원한 청년. 그래서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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