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0년 전, 세계 굴지의 반도체 공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1960~70년대도 아닌 21세기에 위험한 작업환경 속에서 힘없는 생명들이 사그라져가면서도 거대한 자본에 짓눌려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한 대기업의 산재현장을 고발하며 아직 진행 중인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에게 커다란 힘을 실어 준다.
딸을 잃은 한 아버지의 인생을 건 싸움
강원도 속초에서 택시기사를 하는 한상구(박철민)는 소박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는 평범한 아버지다. 상구의 딸 윤미(박희정)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을 고려해 열아홉 어린 나이에 집안에 보탬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대기업 진성에 취직한다. 누구나 선망하는 대기업에서 열심히 일해 아버지 차도 바꿔드리고 남동생 공부도 시키겠다는 윤미의 꿈은 취직한지 2년도 안 돼 무너지고 만다. 백혈병이라는 무서운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딸 윤미가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악화돼 결국 세상을 뜨고, 어떻게든 돈으로 산재현장을 은폐하려는 진성 측의 행동을 보며 상구는 차갑게 식은 윤미의 손을 잡고 억울한 이야기를 세상에 꼭 알리겠다고 약속한다. 상구는 배운 것은 없지만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정의로운 열혈 노무사 유난주(김규리)를 만나게 되고 이들의 어렵고 긴 싸움은 시작된다.
가슴으로 느낀 기적 같은 실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스토리는 모두가 무모하다고 생각한 재판에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직업병 승소판정을 받아 전 세계가 먼저 주목한 기적 같은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택시운전밖에 몰랐던 소박한 아버지 황상기 씨는 희망과 절망이 반복되는 6년간의 싸움 끝에 2011년 6월 법원으로부터 딸 황유미 씨의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평범한 가족이 가족을 잃은 슬픔을 딛고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회사 측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 맞서 고군분투하며 성장하는 모습은 이러한 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더욱 감동적이다.
윤미의 부모 역을 맡은 배우 박철민과 윤유선의 소박한 연기는 딸을 잃은 부모의 뜨거운 진심을 전하며 명장면들을 선사한다. 겉모습은 배운 것 없고 약하지만 누구보다 강인한 내면을 보여준 이들의 연기는 가슴을 울리고 눈물을 머금게 한다.
영화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물들도 등장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윤미 가족을 회유하고 협박하는 비열한 이 실장, 윤미와 마찬가지로 백혈병 판정을 받았지만 회사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충직한 ‘진성맨’ 교익(이경영), 안정을 위해 정의를 저버리고 배신을 택한 이기적인 직장동료 등 거부하고 싶지만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인물들의 등장으로 현실감을 더해준다.
‘또 하나의 약속’보다 ‘또 하나의 가족’이 어울리는 영화
2014년 1월 현재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 접수된 피해자는 151명에 이르고, 그 중 58명은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상구와 노무사 난주, 그리고 반도체 노동자 피해자 가족들은 대기업과의 힘겨운 싸움을 함께하면서 ‘또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남남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모여 안정과 유혹을 뿌리치고 정의를 위한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던 힘은 서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혼인·혈연관계로 맺어진 물리적인 가족의 의미가 아닌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봤다. 사랑, 따뜻함, 애틋함, 배려, 인정, 포용, 희생 등의 단어가 떠올랐다. 적어도 필요할 때 절친했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외면해버리는 것을 ‘또 하나의 가족’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선이 리포터 2hyeo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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