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따스하던 날씨가 눈 온 후 갑자기 추워졌다. 겨울답다. 이런 날은 흙 부뚜막이 울컥 그리워진다. 아궁이 가득 장작을 때면 따끈하게 덥혀지던 부뚜막, 그 위에 엉덩이를 붙이면 몸이 녹고 마음이 풀려 노곤해지던 향수는 아직도 아리다. 오늘 같은 날 저녁 어스름에 그 온기 앞에 조촐히 술상을 내고 좋은 사람과 마주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 낡은 양은 주전자가 어울리고 투박한 옹기 잔이라면 맛은 더욱 좋을 것이다. 묵은 김치면 어떻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라도 한 쪽 놓으면 훌륭한 안주다. 그걸로 시가 되고 그림이 되는 풍경, 이런 자리에서는 도시서 쫓기듯 살았던 얘기처럼 우울한 것들은 모두 빼고, 그냥 눈이 오는 얘기 바람 부는 얘기나 하며 잔을 기울이다 보면, 막걸리에 취하고 아궁이 장작불에 취해 몸이 더워질 것이다. 앞에 앉은 사람에게도 때로 취하다 보면 앞에 두고도 그가 또 그리워질 것이다.
막걸리는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과 마실 수 있는 술이다. 비싼 곳에서 부담되게 마시지 않아도 된다. 격식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과 마실 수 있다. 이름도 편하다. ‘막’은 ‘마구’, ‘함부로’란 뜻이고 ‘걸이’는 ‘거르다’는 뜻으로 ‘막 걸러낸 술’이란 의미다. 이름처럼 아무렇게나 만들고 마실 수 있는 술이지만 같이 마시는 사람은 아무나가 아닌, 편하고 좋은 사람이라야 제 맛이다.
막걸리에는 추억이 많다. 80년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안 돼 5.18로 휴교령이 내려졌다. 고향에 갔을 때 한창 모내기철이라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모를 심었다. 그 때 논 한 복판에서 흙 묻은 손으로 받아 마시던 막걸리 맛은 지금도 아찔하다. 지루했던 화학실험시간 갑갑증에 못 이겨 학교 옥상에 막걸리 통을 숨겨놓고 학우들과 수업시간 몰래 마셨던 막걸리도 기억이 난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하던 찻집 귀천 주변을 배회하며 마셨던 인사동 골목의 막걸리, 종로 빈대떡집 허름한 2층에서 마셨던 막걸리는 지금도 취한다. 큰 딸이 어렸을 때 데리고 아파트 옆에 있는 수리산을 자주 갔다. 숨이 턱에 찼을 때 정상에서 얼음을 띄운 잔 막걸리를 팔았다. 그 때도 그립다.
오늘은 아궁이 앞에 차려놓은 소박한 막걸리 맛을 챙기고 싶다. 취하면 정선아리랑이나 한오백년 같은 늦은 가락의 소리도 한 자락하는 풍경이 그립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런 집에 살고 싶다.
김경래 리포터 oksigol@oksig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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