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역과 귀납은 대표적인 논증방식이다. 그런데 ‘귀납 추리’는 적당한 표현이지만 ‘연역 추리’라고 하면 뭔가 부족하다. 연역은 ''추리''가 아니라 ''도출''이라 해야 그 방식에 맞는 개념을 얻는다. 수학을 생각하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수학에서의 연산이란 대전제나 공리로부터 적확한 답을 ''도출''해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는 뭔가를 ''추리''할 필요가 없다.
물론 수학자나 과학자도 ''추리''를 할 때가 있다. 초기에 ''악마의 수''라고 일컬어졌던 무리수는 피타고라스 학파가 수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추리''하고 연구하던 과정의 소산이다.
집합과 확률이론은 그 결과를 두고 뭔가를 ''추리''해야 하는 숙제를 남긴다. 무리수를 비밀에 부치려다 동료를 죽인 피타고라스 학파나 집합을 수학의 영역에 확립한 일로 학계로부터 배척 당하고 종래에는 정신질환으로 세상을 뜬, 게오르크 칸토어의 운명은 수학의 본령이 ''추리''가 아닌 ''도출''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비극들이다.
이과생들의 소크라테스이자 공자의 아바타들이 ''추리''를 즐긴 예는 더 있다. 통념과 달리 기독교적 세계관을 뒤엎는데 일조한 근대의 수학자이자 과학자들은 대부분 열렬한 기독교 신봉자들이었다. 갈릴레이, 뉴튼, 베이건, 데카르트, 케플러 뿐만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표현의 당사자도 그렇다. 그가 지동설을 주장하게 된 계기는 신의 뜻에 대한 ''추리''였다.
천동설을 근간으로 태양계 행성과 위성들의 운동을 설명할 때 80개 이상의 원을 그려야 했던 그는 신이 이렇게 복잡하게 우주를 설계하셨을 리 없다고 무엄한 ''추리''를 한다. 나아가 ''지동설''이라면 어떨까 하는, 배교적 ''추리''에 기초하여 그는 불과 30여 개의 원으로 태양계를 설명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무슨 얘기를 이렇게 길게 에둘러 하는가. 패러다임을 바꾼 이과생 선배들의 발견은 도출이 아니라 ''추리''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이제 ''수학은 추리''라는 이 칼럼 제목의 반쪽이 설득력을 얻었다. 나머지 반은 어떤가. 국어적 논증은 ''추리''가 적당한가? 나는 지금 그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다음호에 계속)
류달상 원장
소설가
류달상 국어논술 원장, 대전논술학원장 <논술 97~논술 2014>매년 발간
문화공간 대전문화 에스프리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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