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집이 선망의 대상이던 때가 있었다. 어릴 적 우리집은 집 한 채만 덩그러니 있는 외딴 집이었다. 어린걸음으로 30여분을 걸어 친구들이 사는 동네에 다다르면 담과 담이 이어지고 까만색 기와지붕이 그림처럼 예쁜 동네가 보였다. 벌써 오래 전 아파트촌으로 변한 그곳에선 더 이상 기와집을 볼 수 없게 됐다. 봄바람 불던 날, 옛 마을 풍경이 그리워 무작정 전주 한옥마을로 출발했다.
전주한옥마을의 역사는 1910년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오른다. 전주에 온 일본인들이 전주성 안으로 진출하자 이에 반발해 전주 사람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을 짓고 모여 살면서 지금의 한옥마을을 이루게 됐다.
하루 코스 일정으로 계획없이 내려온 터라 먼저 관광안내소에 들렀다. 관광지도 소책자를 찾자 안내소 직원이 친절하게 현재 위치와 가볼만한 장소를 동그라미를 치며 알려준다. 추천해준 곳 중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전주 한옥마을의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오목대.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본향인 전주에 들러 여러 종친과 승전고를 울리며 자축한 곳이다. 이후 고종이 친필로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문을 새겨, 태조 이성계가 머무른 곳이라 전하고 있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산책로를 따라 10분 정도 오르자 한눈에 한옥마을의 전경이 들어왔다. 까만 기와지붕을 사이에 두고 빙 둘러 높이 솟아오른 현대식 빌딩들. 전통과 현실이 공존하는 대조된 공간감에 회한이 느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서성이듯 조심스럽게
오목대에서 내려오면 한옥마을을 관통하는 태조로로 들어선다. 경기전까지 쭉 이어진 길이다. 어느 골목에서 구경하든지 태조로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한옥마을을 헤매지 않고 차분히 돌아볼 수 있다. 한옥마을은 1977년 보존지구로 지정되고 난 후, 지금까지도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꾸준히 정비해 왔다. 태조로가 한옥마을의 종적인 축이라면 횡적인 축은 은행로다. 6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이름이 붙여졌다. 두 축을 기준으로 좌표를 좇으면 지도를 보기 수월하다. 산책하듯 느린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면 마을을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눈에 담고 싶은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면 그만이다.
멋스러운 가로수길 태조로의 양 옆으로 골목길에 정적이 감돈다. 한 걸음 한 걸음 서성이듯 조심스럽게 걸어본다. 어느 골목길은 고고하면서 단아하고, 또 어느 골목길은 손때 묻은 회색 담 벽 아래로 아기자기한 화분들이 놓여있다.
전주 한옥마을에는 전통문화시설도 많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한지와 술, 풍물, 전통혼례, 다도, 춤 등 다양한 테마를 담은 전통문화 체험시설이 발길을 붙잡는다. 집집마다 술을 빚던 가양주의 전통이 오롯이 살아있는 전통술박물관, 한지공예품 등 명장의 숨결을 느껴보는 전주공예품전시관, 전주부채 등 명품을 감상하고 쇼핑하는 전주명품관, ‘혼불’ 작가 최명희의 삶과 문학을 엿보는 최명희문학관은 골목길에서 만나는 한옥마을의 명소다.
차량이 다니는 일방통행 도로에서, 작은 수로를 마주한다. 마치 논가에 흐르는 작은 실개천 같은 느낌이다. 수로를 따라 곳곳에 작은 정자와 분수대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도 좋다.
빼 놓을 수 없는 코스, 경기전과 전동성당
수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 보면 경기전 이정표가 나온다.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태종 10년에 창건됐다. 당시 이름은 ‘태조진정’이라 했다. 경기전은 세종 때 붙여진 이름으로 경사스러운 터에 지은 궁궐이라는 뜻이다.
입구에서 쭉 걸어 들어가니 태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이 나타났다. 표현할 수 없는 장엄한 기운이 흘렀다. 그 뒤쪽 고즈넉한 뒷마당엔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목숨 걸고 지켜낸 전주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다른 곳에 보관한 실록은 모두 불타거나 소실됐으나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은 이곳 선비들이 내장산, 묘향산까지 안전하게 대피시켜 현재까지 보존돼 있다고 한다.
경기전 맞은편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붉은 성당 건물이 눈길을 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전동성당이다. 2014년에 준공 100주년을 맞는 전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진 사적지다. 전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정책의 최대 피해지이기도 했다. 수많은 순교자가 이곳에서 두 손을 모으고 구원을 바랐다. 전동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여행자들을 위한 성가책이 마련돼 있어 준비가 없어도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 영화 ‘약속’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며 결혼식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고.
한옥마을의 이곳저곳 골목길과 경기전, 전동성당까지 둘러보니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다시 오목대에 올라 석양 아래 전주시내를 내려다 본다. 하루코스로 아쉽게 돌아본 한옥마을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백인숙 리포터 bisbis680@hanmail.net
▶ 전주 한옥마을은
전주 완산구 교동(校洞)·풍남동(豊南洞) 일대 25만2000여㎡에 700여 채의 전통 한옥으로 이뤄져 있는 특별한 곳이다. 을사조약 이후 전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부성의 서쪽 외곽을 주거지로 택했다고 한다. 본래 상인이나 천민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차지한 일본인들은 현대적인 기술을 도입해 신식 건물을 짓고 도로를 정비했다. 침입자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주 사람들이 풍남문 동쪽에 형성한 것이 바로 한옥마을이다. 해방 당시 한옥마을은 재력가들이 사는 동네였지만, 점차 퇴락해 슬럼화가 진행됐다.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정해지면서 개발이 어려워진 탓이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 지금은 팔작지붕의 한옥들이 조선시대 건축물과 함께 독특한 풍광을 빚어내고 있다. 전북지역 최초로 국제 슬로시티로 지정되었으며 미국 뉴욕타임즈에 국내·외 식도락가들이 꼭 한 번쯤은 들러야 하는 문화명소로 소개되며 전 세계 관광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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