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3 등굣길 풍경 : 우리나라에서 고3 수험생의 생활은 온 국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엾어 할 정도로 분주하다. 아침 6시면 졸린 눈을 비비며 고양이 세수를 한다.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뻑뻑한 토스트 한 장을 입에 억지로 우겨넣고 우유 한잔 들이키고 집을 나선다. 등굣길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친구끼리 삼삼오오 수다를 떨고 장난치며 환한 얼굴로 등교하는 모습은 시대극이나 나의 아버지 세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부모의 차에서 상투적인 인사만 하고 내린 후 매정하게 뒤돌아서는 친구들, 운동화를 질질 끌며 버스 정류장에서 부터 걸어오는 친구들, 십중팔구는 죄다 이어폰을 꽂고 주변과 스스로를 단절한 채 학교로 향한다. 수험생의 등굣길 풍경 속엔 다정함도, 생동감도, 에너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 주위에 관심 갖기 어려운 현실 : 에너지라면 누구 못지않게 충만했던 나조차도 막상 고3이 되고 보니 주변을 돌아볼 겨를도, 그 흔한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에서 친구와 소통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 오지랖이 넓어 친구들을 잘 챙기는 편이지만 현실과 마주하게 되면 친구를 챙긴다는 것은 오히려 서로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바쁘지만 친구들은 더 바쁘다. 학교에서의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학원으로, 독서실로, 혹은 과외 수업을 위해 집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학교생활의 고단함, 친구와의 갈등, 선생님에 대한 불만, 이성 친구에 대한 고민, 부모님과의 의견충돌 등의 주제는 더 이상 친구들과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문제, 혼자 풀어야하는 숙제가 되었다. 선생님과 부모님께 말 못할 수많은 고민거리를 내어놓고 풀어낼 상대가 줄어들었다. 아니 없어졌다.
# 학교폭력,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 : 요즘 들어 부쩍 학교폭력에 대한 뉴스가 많아졌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다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다. 솔직히 우리학교에서는 학교 폭력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진 적이 없다. 정이 넘치지는 않지만 대체로 교우 관계가 끈끈하고 활기찬 편이다.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 봤다. ‘좋은 학생만 모인 명문고라서?’, ‘선생님들의 학생지도가 효과적이어서?’, ‘서로 무관심해서?’, 셋 다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남학생들끼리 몸을 움직이면서 서로의 땀 냄새를 맡고 부대끼며 지내다보니 알게 모르게 우정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체육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 : 얼마 전 나는 대학 진학 목표를 체육학(Sports Science) 분야로 결정하면서 체육 분야의 가치와 비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교내 학술동아리인 모의 UN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관심분야나 향후 진로 분야에 대해 발표 할 기회가 생겨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자료를 조사했다. 스포츠과학 잡지도 구독하고 논문도 몇 편 접해 보았다. 그러면서 체육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부 연구 분야도 매우 다양했다. 처음 관심을 끈 스포츠경영 분야, 인간 움직임의 원리를 생리학·심리학·역학적으로 분석하는 분야, 스포츠 현상에 대해 인문학적인 접근을 시도한 많은 연구는 나의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신체 활동은 단순히 육체적인 건강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인지적, 심리적, 교육적인 다양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운동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며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점에서 체육학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학문’, ‘감동적인 학문’인 것이다.
# 체육 통해 행복한 학교 만들기 : 큰 덩치에 비해 소심한 편인 나는 학교에서 주로 운동을 하며 친구들과 친해진다. 사소한 일로 다툰 친구와 축구 시합을 한 후 친해져 2학년 때는 함께 교내 축구 대표선수로 활약하면서 환상의 콤비를 이뤘다. 서로 이름도 몰랐던 옆 반 친구는 우연히 농구를 같이 하고 음료수를 나눠 마신 일을 계기로 지금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친한 친구들과 다툰 후에는 주로 축구나 농구를 통해 무언의 화해를 하기도 한다. 고3이 된 뒤로 살이 쪄서 쉬는 시간 마다 낮잠을 자던 나는 꾸준히 운동한 이후 체력적으로 건강해진 것을 느낀다.
돌이켜보면 체육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너무나 행복한 변화들이다. 내가 경험한 행복한 변화가 우리학교는 물론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에게도 일어나면 좋겠다. 학교에 경찰이 배치되면 과연 일진회가 없어질까? 학교폭력자치위원회가 조직되면 학교폭력을 근절할 수 있을까? 가해 학생이 단기간의 특별교육을 이수하면 스스로 반성하게 될까?
문제는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가 아니라 ‘어떻게 변화시킬까?’라고 생각한다. 신체적인 활동을 통해 체육의 긍정적 가치가 학교에서 실현된다면 학교폭력 근절은 물론 행복한 학교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한 팀에 소속되어 같은 목표로 땀을 흘린 동료를 괴롭히고 따돌리고 구타할 수 있을까? 철천지원수가 아니라면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휘문고 3학년 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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