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생생체험노둣돌 원장
얼마 전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거제, 통영 일대를 동료 선생님과 함께 다녀왔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감동적이었으나, 더 큰 감동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장면들은 참가자들의 면면이었다.
30대 젊은 아빠와 함께 온 여덟 살 아들, 50대 아빠와 스무 살 대학생 아들, 역시 50대 엄마와 발랄 20대 딸, 여고 동창생이라던 서로의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던 60대 어머니 두 분, 놀랍게도(!) 부부 동반으로 오신 70대 어르신, 나처럼 직장 동료와 함께 데면데면 다니는 일행도 물론 있고.
내가 가장 놀라웠던 커플(!)은 50대 부모와 함께 온 20대 아들, 딸이었다. 아빠의 키를 훨씬 뛰어넘는 건장한 스무 살의 아들은 손에 든 태블릿 PC로 열심히 메모하고 사진 찍고 때때로 아빠와 어깨동무하며 길을 걸었다. 역시 엄마보다 훨씬 큰 키의 스무 살 딸은 모녀가 아닌 다정한 친구처럼 엄마랑 답사 기간 내내 소곤소곤 수다를 떨며 가는 곳 마다 인증 샷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20대의 대학생 아들, 딸이 엄마, 아빠와 함께 인문학 주제의 답사를 선뜻 나선다는 게 과연 흔한 일일까? 그날 함께 들었던 강연 주제인 이순신의 영웅적 면모와 인간적 고뇌와 아픔에 대해 엄마와 딸이 잠자리에 누워 두런두런 자신이 느낌을 나누는 모습을 옆에서 곁눈질하던 나는 집에 두고 온 두 딸을 떠올렸다.
과연 나는 우리 딸들과 함께 저런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딸들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저렇게 건강하고 대견하게 아이들을 키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부모는 아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 애써왔을까? 명령하고 가르치려들기 보다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냈을까? 우리 딸들이 스무 살 저 또래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과연 저들처럼 함께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아이를 무슨 체험프로그램에 보내고 어디 역사기행에 보내고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스스로 우쭐해 하던 중이었다.
이렇게 쭉 가면 아이는 다양한 정보와 상식이 풍부한 사람으로 클 수 있겠으나 수 년 후 시간이 흘러 부모와 소통하는 아이, 저 멋진 이들처럼 부모와 함께 길을 나설 수 있는 아이가 될 순 없겠다는 확신이 드는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와 함께 길 위에서 만나는 부모가 되겠다는 결심을 해 본다. 그건 아이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이 들어 외롭지 않고 싶은, 내 사랑하는 두 딸아이의 친구로서 자리를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다는 소망이 절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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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거제, 통영 일대를 동료 선생님과 함께 다녀왔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감동적이었으나, 더 큰 감동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장면들은 참가자들의 면면이었다.
30대 젊은 아빠와 함께 온 여덟 살 아들, 50대 아빠와 스무 살 대학생 아들, 역시 50대 엄마와 발랄 20대 딸, 여고 동창생이라던 서로의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던 60대 어머니 두 분, 놀랍게도(!) 부부 동반으로 오신 70대 어르신, 나처럼 직장 동료와 함께 데면데면 다니는 일행도 물론 있고.
내가 가장 놀라웠던 커플(!)은 50대 부모와 함께 온 20대 아들, 딸이었다. 아빠의 키를 훨씬 뛰어넘는 건장한 스무 살의 아들은 손에 든 태블릿 PC로 열심히 메모하고 사진 찍고 때때로 아빠와 어깨동무하며 길을 걸었다. 역시 엄마보다 훨씬 큰 키의 스무 살 딸은 모녀가 아닌 다정한 친구처럼 엄마랑 답사 기간 내내 소곤소곤 수다를 떨며 가는 곳 마다 인증 샷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20대의 대학생 아들, 딸이 엄마, 아빠와 함께 인문학 주제의 답사를 선뜻 나선다는 게 과연 흔한 일일까? 그날 함께 들었던 강연 주제인 이순신의 영웅적 면모와 인간적 고뇌와 아픔에 대해 엄마와 딸이 잠자리에 누워 두런두런 자신이 느낌을 나누는 모습을 옆에서 곁눈질하던 나는 집에 두고 온 두 딸을 떠올렸다.
과연 나는 우리 딸들과 함께 저런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딸들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저렇게 건강하고 대견하게 아이들을 키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부모는 아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 애써왔을까? 명령하고 가르치려들기 보다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냈을까? 우리 딸들이 스무 살 저 또래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과연 저들처럼 함께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아이를 무슨 체험프로그램에 보내고 어디 역사기행에 보내고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스스로 우쭐해 하던 중이었다.
이렇게 쭉 가면 아이는 다양한 정보와 상식이 풍부한 사람으로 클 수 있겠으나 수 년 후 시간이 흘러 부모와 소통하는 아이, 저 멋진 이들처럼 부모와 함께 길을 나설 수 있는 아이가 될 순 없겠다는 확신이 드는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와 함께 길 위에서 만나는 부모가 되겠다는 결심을 해 본다. 그건 아이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이 들어 외롭지 않고 싶은, 내 사랑하는 두 딸아이의 친구로서 자리를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다는 소망이 절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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