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산책> ‘건축학개론’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 되살리는 감성영화
어렸을 때 서울의 변두리 동네에 살았다. 얼마 전 그 동네를 지나칠 기회가 있어 살던 집터를 찾아봤다. 벌써 한두 번은 부수고 다시 지었을 세월이다. 살던 집은 흔적조차 없고 다시 지어진 다세대주택이 그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파트가 즐비한 동네 옆에 그 집터와 골목은 그대로 남아 어릴 적 기억들을 하나 둘 되살렸다. 남지 않았을 것 같은 아련한 기억들이 하나의 소재를 시작으로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이 신기하다. 22일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에 대한 아름답고 애달픈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며 감성을 자극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아름다운 기억들
대학교 1학년 때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났던 승민(엄태웅, 이제훈)과 서연(한가인, 수지)이 15년 만에 다시 만났다. 건축사가 된 승민 앞에 불쑥 나타난 서연은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고 의뢰한다. 건축주로 찾아온 것이다. 피아노를 전공했던 서연은 그동안 결혼과 이혼을 했고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제주도에 있는 낡은 집을 새로 짓고자 한다. 승민과 서연이 갈등과 소통을 반복하며 집을 지어가는 동안 아팠지만 아름다웠던 젊은 그들의 기억들도 하나하나 되살아난다.
15년 전, 설렘과 수줍음으로 시작한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 둘의 잔잔하고 평화로운 사랑이 하나로 발전할 wm음 운명의 장난처럼 오해, 질투, 자존심이 고개를 들어 이들의 사랑을 방해했다. 결국 승민은 서연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첫사랑을 지독한 짝사랑으로 마무리했다. 15년 후 집짓는 것을 매개로 다시 만난 그들은 집짓기가 끝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싹트고 젊은 시절 서로의 사랑도 확인한다. 하지만 승민은 젊은 승민이 그랬듯이 그녀 곁을 떠나는 선택을 한다. 폭풍과 같이 격렬했던 첫사랑의 감정까지 살아나기엔 현실의 무게가 컸음일까.
네 명의 배우가 2인 1역으로 과거와 현재 표현
스무 살의 첫사랑 시점인 과거와 15년이 지난 현재를 오가는 스토리 구조의 특색은 2인 1역 캐스팅으로 절묘하게 표현된다. 사랑에 서툰 순수하고 친근한 이미지의 남자 주인공 승민 역은 현재와 과거를 나누어 엄태웅과 이제훈이 맡았다. 강하면서도 선한 이미지의 엄태웅은 되살아나는 첫사랑의 감정을 절제하며 서연의 집을 완성해가는 승민의 모습을 털털하게 보여줬다. 젊은 승민 역을 맡은 이제훈은 영화 ‘고지전’에서 보여줬던 젊은 장교의 카리스마와는 달리 부드럽고 순수한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사랑의 기쁨과 설렘, 상처받은 자존심과 가슴앓이를 실감나게 표현해 90년대 청춘을 보는 듯했다.
승민을 설레게 한 첫사랑 서연 역의 현재와 과거는 한가인과 수지가 맡았다. 한가인은 도도하고 매력적이면서도 승민에 대한 감정으로 흔들리는 서른다섯 살 서연의 모습을 보여줬고, 수지는 긴 생머리에 청순한 외모로 풋풋한 첫사랑을 시작하는 스무 살 서연의 모습을 완벽히 소화하며 관객들을 압도했다.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 ‘제주도 집’과 ‘기억의 습작’
영화 ‘건축학개론’에 등장하는 서연의 제주도 집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서연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면서 새 출발을 하기 위한 터전이다. 새로 태어나는 집은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은 간직하고 아픈 기억들은 감싸 안은 채 앞으로 행복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승민과 서연은 집을 완전히 새로 짓는 대신 옛집의 기본 구조를 살려 집이 가진 세월의 기억들을 간직한 증축을 선택한다. 집이 점점 완성되어가면서 둘의 첫사랑의 기억도 완성되어 간다.
집이 두 주인공의 현재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라면, ‘기억의 습작’은 둘의 과거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다. 과거 서연이 승민과 함께 들었던 전람회의 1집 「Exhibition」에 수록된 ‘기억의 습작’은 영화의 감성을 한껏 끌어올리며 향수를 자극한다.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쓰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김동률의 감미로운 저음을 통해 들리는 노래 가사는 관객들을 묻어두었던 첫사랑의 기억 속으로 젖어들게 한다.
이선이 리포터 sunnyyee@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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