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를 배경으로 한 미야베 미유키의 미스터리 원작소설 ‘화차’를 2010년대 서울로 시공간을 바꾸어 영화로 재현했다. 비록 시대가 바뀌었어도 1997년 말 외환위기 속에서 벌어졌던 사회 곳곳의 좌절과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영화 ‘화차’는 가슴이 저리게 다가갈 것이다.
그녀의 모든 것은 가짜였다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약혼녀 선영(김민희)을 데리고 부모님 댁으로 인사하러 가는 문호(이선균)는 휴게소에서 선영이 사라지는 기막힌 일을 당한다. 경찰에 신고도 하고, 그녀의 직장도 찾아가 흔적을 찾아보지만 그녀의 이름과 서류는 모두 가짜였다. 선영이라는 인물은 개인파산 경험이 있는 실종된 인물일 뿐 그가 알고 있던 선영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한 순간에 증발했지만 이름도, 가족도, 친구도 몰라 답답해하던 문호는 전직 형사인 사촌 형 종근(조성하)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종근과 함께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던 문호는 점점 드러나는 그녀의 잔인한 실체에 반신반의하며 충격에 휩싸인다.
사업이 망해 엄청난 빚을 지고 사라진 아버지 때문에 사채업자들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채 비참한 삶을 살아가다가 그 비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인생을 훔치는 방법을 선택한 여인. 그녀는 선영을 살해한 차경선이었다. 죽은 선영이 개인파산자였던 것을 모르고 카드를 신청했다가 정체가 탄로 날 위기에 놓이자 흔적을 없애고 사라진 후 또 다른 인생을 훔칠 계획을 세우는 그녀. 하지만 경찰에 쫓기게 되자 비극적인 죽음을 선택한다.
행복을 갈망하는 입체적 인물 담아낸 섬세한 감성 연기
영화 ‘화차’에 싸우고 찌르고 죽이는 잔인한 장면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강한 긴장과 공포가 다가온다. 사랑하는 연인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순수한 여인의 모습 이면에 끔찍한 토막 살인의 실체가 담겨있어 더 섬뜩하다. 더구나 희생의 대상은 단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고 연고가 별로 없어 갑자기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을 만한 사람이면 된다. 손쉬운 개인정보 유출과 주변 사람들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그녀의 살인을 적절히 도와주는 환경이 된다.
배우 김민희는 순수한 소녀의 모습에서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기도하는 광녀,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른 후 구토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행복하면서도 불안해 보이는 연약한 표정에서부터 냉정한 악녀의 표정에 이르기까지 천의 얼굴을 보여주며 상처받은 인간의 모습을 차가운 절제 속에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녀의 모습은 인간미 넘치는 배우 이선균의 풍부한 감성과 만나 더욱 가련해보인다.
화차(火車)에 오른 선영(경선)은 현재진행형
‘화차’는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실어 나르는 불 수레로 한 번 올라탄 자는 두 번 다시 내릴 수 없는 지옥의 수레이다. 경선은 언제부터 화차에 오른 것일까. 분명 경선의 악행은 선영의 인생을 훔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악행을 저지르기 이전부터 충분히 지옥이었다. 아버지의 파산과 사채는 아무 잘못 없는 그녀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지옥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이를 구제해줄 사회적 관심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하나의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또 다른 지옥의 문을 두드려야만 했던 것이다.
소득 불균형, 빈부격차의 심화, 개인정보 유출, 주변의 무관심 등은 우리의 현 세태를 반영하는 키워드들이다. 화차에 오른 경선의 모습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슬픈 공포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이선이 리포터 sunnyyee@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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