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나만의 추억거리

볼 때마다 옛 기억이 새록새록...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소중해져

지역내일 2012-02-06 (수정 2012-02-06 오전 10:43:24)

아버지의 숨결 느껴지는 40년 전 삽화




지난해 말 아버지가 수개월 동안의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의 유품들을 정리하다보니 장롱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상자를 여는 순간 코끝을 스치는 잉크 냄새에 난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져 들었다. 

상자 속에는 40년 전 아버지가 한 신문사에서 일하실 때 직접 그리셨던 삽화들이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스크랩북과 함께 나란히 들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 아버지는 잉크 냄새를 풍기며 그림을 그리시곤 했다. 검정 잉크 한가지색과 펜대만으로 순식간에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내는 아버지의 손은 어린 나의 눈에 신기하기만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교과서를 받아오자 아버지는 교과서가 헤지지 않도록 표지를 뒷면이 하얀 달력으로 꼼꼼히 싼 후 겉표지에 굵은 매직 펜촉으로 과목 이름과 내 이름을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적어 주셨다. 실수 없이 움직이던 아버지의 손끝은 마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당연히 내 교과서는 눈에 띄었고 학교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나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삽화 그리는 일을 그만두셨다. 그 후 나는 아버지가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었고,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아버지의 교과서 포장 방법이 어쩐지 튀는 것 같아 이를 거부했다. 그 후 30여 년간 아버지가 뿜어내던 잉크 냄새를 다시 맡기는 힘들었다. 간혹 차례 상이나 제사상 위의 지방(紙榜)에서 아버지의 멋진 글씨를 접한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 아버지는 가시고 아버지의 유품으로 그 시절을 추억하는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 시절보다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로운 삶을 주고 있지만 아이의 마음속을 따뜻하게 채워주고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올 차례 상의 위패에 남동생이 컴퓨터로 뽑아서 붙여 놓은 지방문이 왠지 낯설고 서글프게 느껴졌다.


나의 서울살이와 늘 함께한 사진, 내가 엄마가 되어 본다




지방이 집인 내가 열아홉 꽃띠 나이에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독립할 때 챙겨온 사진 두 장. 한 장은 돌 무렵 엄마와 바닷가에서 찍은 낡은 흑백 사진이고 또 한 장은 오빠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물론 아빠는 사진을 찍으시느라 사진 속에 함께 계시지는 않지만 그 사진만으로도 셔터를 누르시던 아빠까지 함께 추억하기에 충분하다.
이제는 20년이 다 되어 가는 서울살이에 항상 힘을 주던 사진 두 장이다. 처음 기숙사에 짐을 풀 때, 또 몇 번이나 옮긴 자취방에서도 항상 책상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나와 함께 해온 서울살이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이제는 내 아이가 사진 속의 나보다 훨씬 크고, 내가 사진 속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었지만 가끔 사진을 보면 엄마가 당시에 가졌을 마음은 어떤지, 또 자식을 어떤 마음으로 사랑했을지 조금은 알아가는 것 같다.
처음에는 이 사진 두 장이 내 책상에 자리 잡았지만 점차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의 사진과  아이들 사진, 그리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생긴 졸업사진, 입학사진 등 점점 많아지는 사진 속에 점차 뒤로 물러나는 내 어릴 적 사진 두 장. 청소하다 문득 뒤로 물러나 있는 사진을 다시 들어 보기도하고, 그 사진을 보며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도 하고, 혹은 친정 엄마와 친정 식구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지금 뭐해?”라고 말을 걸어본다.
아마도 내 아이가 지금의 나만큼 나이가 들 때까지 이 사진 두 장이 함께 지켜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젊은 날의 초상- 묶은 때 꼬질꼬질한 영어사전 


우리 집은 잦은 이사와 늘어나는 아이들 짐 때문에 오래 된 물건이 별로 없다. 옛 물건을 보며 추억을 곱씹을 시간도 없거니와 새롭게 집으로 들어온 짐들이 차지할 공간 자체가 없다보니 오래된 순서로 퇴출, 방출되기 일쑤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언제나 책꽂이 한 쪽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영어사전. 가뜩이나 어두운 표지색이 세월과 낙서, 얼룩과 아이들 침으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푸르죽죽한 색이 되어버렸다. 겉표지와 속지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완전 분리되어 두 손으로 들지 않으면 홀라당 벗겨질 상태로 망가져 버렸고, 사전 윗면과 오른쪽 옆 흰 부분은 내 이름, 아이 이름, 남편 이름까지 덧입혀져 도대체 누구의 소유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중고서점에서도 절대 팔릴 것처럼 보이지 않는 낡고 더러운 사전. 그런데 참 신기하다. 이 사전으로 단어를 찾으면 어쩐지 그 단어에 더 애정이 가는 것 같다. 아이가 물을 때도 전자사전이나 핸드폰의 사전기능을 찾는 것이 빠른 줄 알면서도 자꾸 “사전 갖고 와봐” 하며 소리를 친다.
예전에는 물건 구입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께 용돈의 출처를 일일이 밝히고 왜 구입해야 하는지 이유도 절절히 말해가면서 그렇게 어렵게 학용품을 구입했던 것 같다. 하나를 사면 또 다른 하나를 사주실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구입하기 전에 꼭 필요한 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사전 역시 그렇게 구입한 소중한 사전이다. 소중히 하고 아끼며 사용하던 사전을 어느 틈에 함부로 대해 이렇게 망가뜨렸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아이의 책이 많아지면 이 사전 또한 갈 곳을 잃을지 모르지만 내 아이에게도 이 사전처럼 소중한 책 한권이 꼭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지혜 리포터 


아이가 첫 걸음 뗄 때 신었던 운동화


아이가 처음 뒤집고, 처음 엄마라고 부르고, 처음 걷고…그렇게 아이의 ‘처음’에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들. 엄마라면 누구나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아이가 땅을 딛고 첫 걸음을 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난 한 번 배 아파 둘을 낳아 키우는 쌍둥이 엄마다. 산후조리를 마치고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초보 엄마의 고군분투는 시작되었다. 한 아이 안고 수유하는 동안 다른 아이가 ‘응가’ 싸고 울어서 진땀 흘리던 일, 둘이 동시에 보채면 앞으로 안고 뒤로 업고 달래다 결국 나도 같이 엉엉 울었던 일 등등. 하루하루가 마치 전쟁과도 같았다. 아이들과 씨름하느라 너무 힘들 때면 ‘어서 커라…’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다가도 밤에 새근새근 잠든 천사 같은 아이들을 바라볼 때면 금방 크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무언가 아쉬워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복잡한 엄마 마음과 달리 아이들은 쑥쑥 잘 자랐다. 드디어 두 아이가 걷기 시작했고, 두 아이에게 신발을 신겨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넓은 공원에 불안하게 서있는 자그마한 두 아이. 작은 발로 천천히 한 걸음씩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1.9, 2.3킬로그램으로 작게 태어난 아이들이 이렇게 열심히 자라줬구나, 나는 그저 나 힘든 생각에 어서 자라주기만 바랬는데’ 하는 미안함과 대견스러움에 울컥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아이들을 키운 게 아니고 아이들이 나를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시킨 것 같다.  

그날 아이들이 신었던 운동화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 때, 속상할 때 그 운동화를 쓰다듬으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곤 한다. 철없는 엄마였던 나에게 이런 깨달음을 준 아이들이 이제 곧 초등학생이 된다.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것처럼 이제 또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될 아이들이 늘 씩씩하게 걸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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