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회로 유명한 해안가 횟집. 필자가 강원도 속초에서 호텔업을 하는 8년 동안 자주 찾았던 곳이다. 간판의 이마에 이런저런 텔레비전 프로그램 로고가 붙어 있었고, 옥호도 내력있게 점잖게 적혀 있었고, 밖으로 풍기는 ‘포스’가 있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물회 한 그릇 하고 가야 할 집이었다.
해안가 음식점답지 않게 와이셔츠들이 많은 걸 보니 아직까지 지역에서 한가락하는 명물집이 분명했다. 타지역에 가서 제대로 하는 식당을 찾으려면 관공서나 법원 앞으로 가라고 했다. 공무원들이 조금은 입이 짧아 생긴 말일 것이다.
물회는 뱃전에서 잡은 생선의 껍질을 벗겨 채치듯 썰어 갖은 양념으로 만든 초고추장을 얹어, 얼음을 넣어 먹다보면 생기는 국물이, 고기잡이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마신 막소주를 풀어 주는 일종의 해장국이었다. 화려하게 채친 갖은 양념과 회까지는 좋았으나 조미료로 무장한(?) 양념고추장물을 부어 주는 물회를 앞에 놓고 편리라는 시속(時俗)을 쫓는 모습에서 실망하고 그냥 나왔던 기억이 있다.
강원도에서 물회라면 오징어물회밖에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물가자미로 만든 물회를 빼놓을 수 없다. 함경도에서 월남하신 ‘아마이’들이 시장판에서 30년이상을 회감만 써신 분들의 손놀림은 가히 관광상품이 따로 없다. 꼭 납작한 옛날 다리미처럼 생긴 가자미 껍질을 벗기고 굵은 뼈를 추려낸 다음 씩씩하게 썰어서 만드는 물회다.
초고추장이 있으면 대충 넣어도 좋고 잔가시가 씹히는 물가자미의 살이 달다. 무엇보다 설탕과 식초를 적절히 조절해서 넣으면 뒷맛이 개운하다. 설탕처럼 찐득거리는 더위가 멀리 물러가 있다. 기막힌 물회에 백사장과 해수욕, 상상하고 싶은 여름의 서정이다.
오징어와 물가자미를 썰고, 달달한 배·오이·당근을 채치고 진한 초고추장에 약간의 고추냉이·설탕을 위에 얹고 얼음을 몇 덩이 넣고 비비면 벌겋고 탁한 육수가 우러난다. 여기에 잔소주를 걸치며 회를 먹고 물을 마시는 맛이란 무엇으로 표현할 말이 없다.
나의 물회 기억은 멀리 제주도로 달린다. 어민과 포구 노동자들이 더위를 쫓기 위해 만들어 먹었을 제주의 물회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민중의 음식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원형이 살아 남을 수 있었을 것 같다. 궁중 물회니, 양반 물회니 하는 게 있었다면 소박하고 구수한 물회는 우리곁을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제주는 먹을 게 없었다고 토속음식이니 뭐 자랑할 게 없다고 말한다.
제주 물회는 자리돔이라도 얻으면 대충 토막쳐서 된장에 냉수 붓고 채소나 뜯어넣어 먹었다고 제주 토박이들은 말한다. ‘이젠 된장을 치면 누가 먹겠어.’ 양념이 다양하지 않은 섬 살림에 된장은 각별히 유용했다. 국에도 넣고, 물회에도 넣었다. 초고추장의 달고 새콤한 맛으로나 먹는 물회에 된장은 좀 뜻밖이었다. 혀를 간질이는 유행의 물회는 관광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된장이 진짜 맛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서귀포 옆 보목리에 해녀들이 운영하는 횟집이 있다. 손가락만 한 자리돔과 그때그때 잡히는 한치 따위를 넣어 물회를 말아주었다. 해녀의 손끝처럼 야무진 자리돔살이 고소하게 씹혔다. 젓가락으로 집는 모양을 보고 동네 노인이 숟가락으로 푹푹 퍼서 먹는거라고.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왕년에 자리돔 배좀 타신 훈장인것 같았다.
지금쯤 속초의 그 바다는 다시 파도가 치고, 보목 앞바다 문섬은 바다안개로 자욱할 것이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어디로 갈까. 이런 게 진짜 행복한 고민일텐데.
글 구미 에스코드스쿨 조헌구 원장
사진 전득렬 팀장 papercu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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