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공간은 아름답다. 비가 지루하게 내리던 오후, 헤이리 북카페 ‘포레스타’의 풍경도 그랬다. 높이 6m, 너비 20m의 벽면 전체가 책장이고, 꽂힌 책만도 1만2000여 권에 이르는 ‘책의 숲’, 그곳에서 한길사 김언호 대표를 만났다.
책을 만들면서, 책을 만들기 위해 시대의 현인을 만나는 일이 행복하다
김언호 대표가 책에 빠진 것은 고향 밀양에서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그는 책이 주는 정신적 행복감에 빠졌다. 이후 대학에 진학해서도 청계천에서 인사동으로 헌책방 순례가 이어졌다. 헌책방에서의 추억. 그 향수 때문이었을까. 그는 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하고 글을 쓰는 신문기자가 됐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은 유신에 맞서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벌였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김언호 대표도 그 이듬해 동료들과 함께 신문사를 떠나야했다. 학창시절 꿈이 기자였고, 기자가 됐지만 그 일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는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차렸다. 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오늘의 사상신서〉 제 1,2,3권으로 나오는 송건호 선생의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고은 선생의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등 시대의 현인들의 사상과 이론을 담아낸 인문서적을 주로 펴냈다.
1980년대는 책의 시대였다.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젊은이들은 특히 인문학 서적을 통해 스스로 정신과 사상을 가다듬고 정리할 수 있었다. “책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그 속에 있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인간과 사회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죠.” 한길사가 만든 책들은 한 인간이 올바르게 걸어가야 하는 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양서들로 ‘한길사 마니아’들을 형성해왔다.
올해로 책을 만든 지 35년 째. 김 대표는 책을 만들면서, 책을 만들기 위해 함석헌 윤이상 송건호 리영희 이오덕 박현채 등 시대를 대표하는 현인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즐거움이자 ‘특권’을 누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특히 청소년시절부터 정신적 우상이었던 함석헌 선생의 저작집 20권을 엄혹했던 80년대에 펴낸 일은 그에게 축복과 같은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한 권의 책이란 희망이죠. 책을 만드는 일은 희망을 만드는 작업이고요. 한길사가 만든 책을 읽고 누군가 그 희망을 현실세계로 구현할 수 있다면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겠지요.”
대중적인 책을 내면 쉬울 텐데 왜 인문학인가?
「한길이란 큰길, 바른 길, 마당, 광장을 의미할 것이다. 이성과 지성, 이론과 사상, 정신과 감성이 두루 모여들어 담론하는 열린 그 공간일 것이다. 모든 이론과 사상, 탐구와 담론은 길 위에서 움직이는 과정일 것이고, 그 지적 창조의 과정에 우리들의 출판행위가 존재할 것이다.」
지난 해 펴낸 〈책의 공화국에서〉 책머리에서 김언호 대표가 밝힌 ‘한길사’의 출판철학이다. 그래서 한길사가 펴낸 책들은 그저 즐거움을 위한 소비적 책읽기가 아니다. 미래를 생각하고 사회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진지하고 생산적인 책읽기의 대표 출판사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김 대표의 이런 신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을 터. 때론 검열 때문에 기획했던 책을 접어야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출간은 했으나 독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해 가슴 쓰린 일도 있었다. 한길사가 만든 책 중엔 시대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것들이 많다. 그래서 마니아도 많지만 역설적으로 대중적이지 않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대중적인 책을 출판하면 좀 쉽지 않을까? 왜 꼭 인문학일까?
“결국은 책이라는 것은 자기가 잘 알고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책들을 내는 것이 더 자신 있게 만드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한 인간이 올바르게 걸어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책, 즉 인문학에 관심이 많고 그런 책 만들기는 누군가가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한 인간을 반듯하게 일으켜 세워주는 책이라는 그는, 책을 만들 때 어릴 적 농사를 짓던 부모님들을 생각한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손으로 북돋아주고 만져주는 농작물이 잘 자라고 더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손이 해내는 그 신비로움을 깨달았다고. 책 만드는 것도 농사를 짓는 것처럼 정성스럽고 부지런하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인정을 받게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 중 최명희의 〈혼불〉, 시오노 나마미의 〈로마인이야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이 뜻밖에 많이 팔려나갔고 이는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좋은 책이 사회의 변화에 촉매로 작용한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 것.
파주출판도시와 헤이리마을, 여럿이 함께 펼치는 문화예술운동
1994년 4월 영국의 헤이온와이을 방문하면서 김언호 대표는 헤이리마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헤이온와이에 책방마을을 만들기 시작한 부스라는 사나이의 상상력에 영감을 얻은 김 대표는 국내 유일의 문화 예술 도시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영화, 미술, 음악, 출판, 공연, 사진 분야의 370여명인사들을 모아 2003년 드디어 ‘헤이리’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또 한길사는 2002년 12월, 10여 년의 강남 신사동시대를 마감하고 파주출판단지에 출판사로서는 처음 입주하면서 고양파주지역의 문화 인프라 형성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모든 문화적 예술적 행위는 단독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헤이리에서 확실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오는 9월 30일~10월 9일까지 파주출판도시 150개 입주 출판사를 비롯한 200여 개의 출판사들과 1천여 명의 저자들이 참여하는 ‘파주북소리 2011’은 이런 믿음에서 계획된 책 축제이다.
이번 축제에는 노벨문학상 110주몀을 맞아 수상자 106명의 책과 사진, 친필편지, 유품 등을 전시하는 대규모 특별전이 열린다. 또 혜초, 마르코폴로 등 여행자 6명의 여정을 따라 실크로드을 탐험하는 책으로 ‘신실크로드를 열다’와 아시아 각국의 문자를 전시하는 ‘아시아문자전’도 열린다. 이와 함께 고은, 이어령, 김병익, 김우창, 백나청 등 우리시대 대표 지성을의 강좌도 마련되며, 김언호 대표를 비롯해 일본 이와나미쇼텐, 대만 연경출판공사, 중국 삼경출판사등 아시아 각국 편집자들의 특강도 열릴 예정이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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