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용돈에 얽힌 진솔한 이야기

부모님 용돈 어떻게 드리세요?

지역내일 2011-06-27

고령화시대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시니어들의 생활패턴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자녀들이 결혼한 후에는 부모 역시 과거의 생활권에서 벗어나 독립된 공간에서 생활하기를 원한다. 이제 자식의 집은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곳이 되었으며, 부모 봉양에 대한 마음가짐도 점차 퇴색되고 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 아니면 생활비 명목 등으로 자식들에게 받게 되는 용돈.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서로의 입장은 섭섭함과 고마움이 엇갈리기 마련이다. 용돈에 얽힌 진솔한 사연들을 모아봤다.

정리 강남서초내일신문 편집팀


용돈 액수가 10년째 동결이라니…


지난 토요일 저녁, 우리 가족은 신사동 한 중국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나의 일흔 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현재 아파트에서 따로 살고 있는 우리 부부는 아들 둘에 딸 둘을 키웠다. 그런대로 아이들이 잘 자라줘 별다른 걱정 없이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남편 따라 해외에 주재원으로 나가있는 둘째 딸을 제외하고는 손자손녀들까지 총 11명이 모였다.


재수하는 손자와 학원에 갔다는 손녀 한명이 빠진 자리였다. 일 년이면 적게는 한두 번, 많으면 서너 번 우리 가족은 밖에서 외식을 한다. 생일이나 어버이날 등의 행사 때 집에서 모이는 것이 번거롭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 자리인데도 꼭 한두 명의 손자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불참한다. 같은 서울 하늘아래 살면서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또 아이들 시험기간이라고 해 두 부부만 나타날 때도 있는데 이해는 하면서도 좀 어이가 없다.


외식을 하게 되면 기분도 새롭고 별식을 맛볼 수 있어 좋다. 하지만 비싼 음식 값이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봐 그리 편치만은 않다. 식사를 마치고나니 아이들이 돈 봉투를 내민다. 음식 값도 많이 나왔을 텐데 용돈까지 받으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미국에 있는 작은 딸은 며칠 전 인터넷뱅킹으로 얼마간의 용돈을 보내왔다. 집으로 돌아와 봉투를 개봉하는 순간, 섭섭함이 밀려온다.


우리 부부는 공무원으로 퇴직한 남편의 연금과 신도시에 사놓은 상가에서 약간의 월세를 받아 생활한다. 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강남에 위치해 있어 처음 구입할 때에 비해 가격이 많이 올랐다. 때문에 자식들에게 지금껏 생활비나 병원비를 타본 적이 없고, 가능한 한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오히려 그나마 갖고 있던 목돈을 아들 둘에게 슬금슬금 내주며 살았다. 차 바꿀 때나 집 옮길 때, 심지어 주식으로 상당한 돈을 날렸을 때도 어느 정도 보충해 주었다. 물론 딸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런데 아들이 주는 용돈은 매번 인색하기 그지없다. 물가가 이렇게 올랐는데 10만원이란 액수는 10년째 고정적이다. "어머니가 저희보다 더 부자시잖아요~" 며느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물론 월급쟁이 생활에 자식들 사교육비 등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시기라는 것, 충분히 이해는 한다. 하지만 시부모를 뭘로 보는 건지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야! 너희들 너무하지 않냐! 내가 그나마 돈이 있어 너희들한테 손 안 벌리고 사는 거 다행인줄 알아. 능력이 없다면 너희가 모시고 살아야 할 텐데 매달 몇 십 만원씩 생활비 보내주는 자식들도 많다던데…. 쯧쯧" 아들은 당황한 듯 별말이 없었다. 그 다음날 "죄송하다"며 며느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말하고 나니 속은 후련했지만 부모로서 참아야했나 싶어 씁쓸함이 남는다.


 


아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나는 ''못난 부모''


경기도 여주가 고향인 나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 내려온 남편과 우연히 만났다. 휴전이 되는 바람에 남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우리들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려운 가운데서 삼남매를 낳았다. 남편은 일본에서 대학까지 다녔던 엘리트였지만, 워낙 성격이 고지식하고 권위적이어서 직장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다. 자존심만 강하고 원만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자영업을 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 가족은 전세방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았다. 아이들을 키워야했던 나는 보험설계사를 하며 근근이 생활을 꾸려갔다. 남편은 친구들과 땅을 사서 집을 지어 파는 소위 건축업을 해보겠다고 뛰어다녔지만, 수입은 고사하고 그나마 모아놓은 재산을 없애기 일쑤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잘 건사하기란 쉽지 않았다.


10년 전, 남편이 암에 걸렸다. 모아놓은 재산도 없었는데 감당해야할 입원비와 치료비는 불어만 갔다. 일 년 간의 투병 끝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갚아야 할 빚뿐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다행히 큰아들은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 지금은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그러나 막내아들이 문제였다. 아버지의 성향을 많이 닮은 아들은 수시로 사고를 쳤다. 없는 돈에 겨우 사업자금을 마련해주면 얼마 못가 들어먹곤 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지금은 결혼도 했고 조그만 분식집을 경영하며 잘 살고 있다.


나는 큰 아들네와도 살았고, 작은 아들네서도 2년 정도 살았다. 하지만 당뇨가 생기고 다리관절에 이상이 오면서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봐 많이 괴로웠다. 처음엔 애들도 봐주고 반찬이나 살림도 해줄 수 있었는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니 며느리 눈치가 보였다. 때마침, 혼자된 언니가 같이 살자고 해 지금 사는 곳으로 옮겨왔다. 나이 차이가 많은 언니는 나를 안쓰럽게 여기고 잘 보살펴 준다. 노인복지관에서 취미생활도 같이 하고 양재천을 함께 걷기도 한다.


하지만 수시로 들어가는 병원비는 전적으로 큰 아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딸과 작은 아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약간의 돈을 내놓긴 하지만 걔네들 사정을 잘 아는 나로서는 편하지가 않다. 매달 큰 아들은 며느리가 아는 액수 이상의 많은 돈을 생활비로 부쳐준다. 자랄 때도 늘 궁핍했던 집안사정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주눅 들어 살았는데….


지금까지도 못난 부모 때문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큰 아들이 가엾기만 하다. 용돈 차원이 아닌 생활비 일체를 매달 타 써야 하는 나는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가. 오늘밤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는다.




몰래 드리는 용돈 때문에 싹 트는 갈등


우연히 시어머니가 당신의 친구에게 내 남편에 대해 자랑하시는 말을 듣게 되었다. 아들이 며느리도 모르게 건네는 용돈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마 남편은 결혼 후 20년간 지속적으로 시어머니께 용돈을 드리면서 절대로 며느리한테 내색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한 모양이다. 그동안 시댁과 친정엔 남편과 상의해 때마다 성의껏 용돈을 드렸다. 남편은 월급 외에도 강의료와 원고료 등 비정기적인 부수입이 있었지만, 남편과 나는 숨기는 일없이 터놓고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고부간에도 큰 갈등이 없었고 그만하면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 비밀 아닌 비밀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주 기분이 묘했으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남편에게 따졌다. 남편은 논리적이며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 내 말을 듣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집안 살림이 축날 정도로 용돈을 드린 것도 아니고, 자식인데 부모님께 맘대로 용돈도 드릴 수도 없냐"면서 "자신이 중간에서 양쪽을 다 만족시켰기 때문에 고부간에도 그만큼 사이가 좋게 지낼 수 있었다"고 남편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좋은 의도였으면 왜 비밀로 했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남편은 "사실을 말했으면 용돈을 계속 드릴 수 있었겠냐"고 말하며 "당신도 아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런 것도 이해 못 하냐"고  오히려 나를 비난했다. 나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점점 더 마음이 상했다.
가끔 친정엄마가 올케 모르게 남동생이 용돈을 드린다고 좋아하셨을 때, 내심 나는 모자간의 변치 않는 유대와 결혼한 남동생의 부모에 대한 의리를 기특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같은 며느리 입장에서 보면 올케에게 좀 미안한 구석도 있어 말 한마디라도 선심 쓰듯 정답게 했던 생각이 났다.
만약 전에 올케가 그런 사실을 알고 내 동생과 다투었다면 분명히 나는 "내 동생이 번 돈으로 부모한테 한다는데 올케가 그렇게 까지 남편한테 뭐랄 것은 없다"면서 올케가 속이 좁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나중에 내 아들이 며느리 몰래 내게 용돈을 쥐어주면 나도 일일이 며느리한테 보고 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키운 내 아들이 나한테 준 돈인데, 며느리의 남편이기 전에 내 아들인데 꼭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또 굳이 말해 집안의 분란을 일으키고 며느리 마음도 상하게 할 거 없다는 약은 계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 대한 내 아들의 변하지 않는 마음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고 내심 며느리한테 당당하게 굴 것 같다.
이렇게 까지 생각할 수 있는 내가 막상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몹시 불쾌했다. 나 역시 간사한 사람이다. 입장에 따라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 내 입장에서 남편과 시어머니를 이해하고 그냥 넘길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난 남편이 괘씸하다. 아니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따돌림 당한 느낌으로 기분이 씁쓸하기까지 하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며느리도 자식이라고? 아니다. 부부는 돌아서면 남이고, 며느리는 영원히 남의 집 딸이다. 부모 자식 간에 용돈은 그냥 돈이 아니고 애정의 징표인 모양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남은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진심으로 챙겨주는 용돈을 받는 맛이란?


일정한 임대수입이 있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두 아들은 매달 생활비를 입금 시켜준다. 게다가 각종 공과금에서부터 휴대폰 요금까지 모두 맡아서 해결해주니 소소하게 신경 쓸 일이 없어서 좋다.
가까이에 있는 작은 아들 내외는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매주 토요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온다. 그때마다 며느리는 제철 과일이나 간식거리를 사와 냉장고를 가득 채워준다. 이렇게 자주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며느리가 힘들게 식사 준비까지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주로 외식을 하는 편이다. 물론 아들 내외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외식비는 매번 우리가 지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무엇보다 우리 부부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이나마 손자 손녀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더 없이 큰 낙이다.
주말에 가족이 모두 함께 오는 것 외에도 작은 아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수시로 잠깐씩 들러 안부를 확인하곤 한다. 이 때 가끔씩 보너스를 추가로 받았다며 며느리 몰래 용돈을 쥐어주고 가기도 한다. 비록 그 액수가 많지는 않더라도 아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매번 감동하게 된다. 결혼을 해서 두 아이의 아빠가 됐어도 부모 눈에는 마냥 어린애 같은 아들이 이렇게 마음을 써주는 것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절로 행복을 느낀다.
큰 아들은 멀리 있지만 부모에 대한 생각이 더 깊다. 퇴근길에 자주 전화해서 안부를 묻고, 내외가 맞벌이를 하느라 정신없이 살면서도 집안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한다. 큰 며느리 역시 속이 깊어 한 번 다녀갈 때마다 부족한 생필품도 일일이 보충해주고 용돈도 챙겨준다.
둘이 합의해서 주는 용돈 외에도 큰 아들은 꼭 따로 용돈 봉투를 준비해 떠나기 전에 살짝 내민다. 아이들 교육비가 만만치 않게 많이 들어갈 시기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며느리가 주는 용돈은 사실 받기가 조심스럽다. 그래서 매번 고맙다는 말과 함께 부담스럽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동시에 하게 된다. 하지만 며느리 몰래 아들이 주는 용돈은 받아도 왠지 정당한 것 같고 게다가 뿌듯하기까지 하다.
딸들은 생활비를 정기적으로 보내지는 않지만 어버이날이나 생일, 명절, 제사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용돈을 보낸다. 우리 부부가 "너희들 살기도 힘들 텐데 안 그래도 된다"라는 말을 계속했더니 언젠가 부터 연락도 없이 각자 수시로 용돈을 송금하기 시작했다. 통장 정리를 가끔씩 하기 때문에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금 여부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통장에 찍혀있는 아이들 이름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그야말로 자식 키운 보람을 느끼게 된다.
사실 남편 사업 뒷바라지 하면서 자식들 키우느라 힘든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자식들이 잘 자라서 노후에 이렇게 든든한 힘이 되다니, 우리 부부는 말년 운이 넘치는 편이라고 자부하며 산다.



기꺼이 드리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결혼해서 10년 동안 아들 딸 낳고 살면서 남편과 아이들은 물론이고 함께 사는 시부모님 챙기느라 친정 부모님은 ''나 몰라라'' 하고 살았다. 이쯤 되니 아이들도 자라고 생활에 좀 여유도 생기자 문득 그동안 소홀했던 친정 부모님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장녀라서 동생들보다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내가 그동안 동생들보다 친정 부모님께 무심했던 것도 미안함으로 다가왔다.
남편과 상의한 끝에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찾아뵙고 두 분께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용돈도 드리기로 했고, 이 결정에 따라 매월 친정 부모님을 찾아뵙고 두 분께 각각 수십만 원씩 용돈을 드린 것이 어느덧 10년이 됐다. 처음엔 극구 마다하시던 부모님도 이젠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는 눈치다.
몇 년 전부터는 매월 정기적으로 드리는 용돈 외에 부모님께 목돈을 드릴 일들이 생겼다. 두 분 연세가 많아지면서 여기저기 병치레가 잦아진 것이다. 수술로 한 번에 수백만 원이 들어가기도 했고 수시로 수십만 원씩 1년에 1천만 원이 우스웠다. 문제는 이런 목돈을 동생들과 함께 부담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형제가 다섯이니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보태면 될 것 같지만 그것도 모두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빠듯하게 살고 있는 동생들에게 함께 부담하자는 말이 떨어지지 않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내가 혼자 부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 큰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운할 때가 많다. 목돈이 들어갈 일이 생기면 부모님이나 형제들은 으레 내가 해결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동생들은 그래도 항상 부모님께 작은 성의라도 표시하고 내게 고마워하고 미안해한다. 하지만 귀하게 자란 막내 남동생은 돈 들어가는 일은 늘 외면일변도로 나가며 생전가야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다. 마치 돈 들어가는 일은 큰 누나가 다 알아서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것 같다.
서운한 점은 또 있다. 친정 부모님은 생활이 그리 어려우신 분들이 아니다. 살고계신 집 이외에도 노후를 위해 아파트 한 채를 따로 마련해두셨고, 그 아파트에서 월세도 제법 들어와 두 분이 생활하시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또 평생 검소하게 사셔서 사치를 모르시는 분들이다. 그런데도 목돈이 필요할 때면 늘 돈이 없다고 하시는 이유는 따로 있다. 수입의 대부분과 내가 드리는 용돈의 일부까지 막내아들에게 들어가는 것이다. 아파트를 처분해서 두 분 병원비도 하시고 노후를 좀 더 편안하게 사시라고 말씀드리면 두 분은 펄쩍 뛰신다.  그 아파트도 아들을 위해 남겨두고 싶으신가 보다.
이러니 내가 친정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여행도 다니시고 맛있는 것도 드시라고 드리는 용돈은 남동생과 조카들에게 돌아가기 일쑤고, 많이 드리나 적게 드리나 두 분의 삶은 늘 변함이 없다. 뻔히 알면서도 계속 드리자니 이젠 남편에게도 미안하고, 그렇다고 안 드리자니 부모님이 섭섭해 하실 테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시집 물주노릇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나는 요즘 이혼을 할까 말까 고민 중이다. 대학 4학년인 아들이 반대만 하지 않았다면 결단을 내렸을 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 시집 식구들과 남편을 더 이상 감당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그저 만만한 물주일 뿐 가족이 아니다.


나는 시골에 사는 시부모에게 매달 용돈으로 30만원을 송금한다. 스물여덟 살에 결혼한 뒤 16년 동안 적금 넣듯이 한 달도 거르지 않고 해왔다. 그런데 며칠 전 남편이 용돈을 60만원으로 올리자고 주장했다. 순간 울화통이 터졌다. 수입이 몇 백만 원이나 되면서 그 정도도 못하냐고 욕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시부모에게 들어가는 돈이 그것뿐이라면 말을 하지 않겠다. 


시부모 병원비는 내게 용돈보다도 더 큰 부담이다. 칠십대 후반인 시부모는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든다. 그 분들에겐 당뇨와 고혈압은 물론이려니와 기억력이 나빠지고 눈이 침침하고 밥맛없는 게 다 심각한 질병이다. 대학병원 의사를 만나봐야 한다며 일 년에 서너 번은 서울 아들네로 올라온다.


한 번은 시아버지가 수전증과 만성소화불량과 불면증이 겹쳤다며 대학병원을 예약하라기에 일단 동네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시라고 말했다가 시누이와 대판 싸웠다. 시누이는 "사소하다고 무시했다가 큰 병 되는 거 모르냐. 여기서 방치했다가 돌아가시면 올케가 책임질 거냐"며 전화통에서도 삿대질이 보일 정도로 열을 올렸다. 비용을 보태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상경한 시아버지는 이런저런 검사를 받은 후에 "너무 약을 많이 먹어서 생긴 후유증 같으니 약을 줄이고 운동을 하라"는 처방을 받고 돌아갔다.


시부모 생일이며 칠순잔치, 시집 친척들 경조사 챙기는 일도 외아들인 남편이 도맡는다. 남편은 부모나 여동생들의 일은 물론 사촌, 육촌들에게도 선심을 쓰고 싶어 한다. 한데 기가 막힌 건 그렇게 베풀기 좋아하는 남편이 백수라는 점이다.


남편이 직장에 다녔던 건 결혼 후 5년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여기 몇 달, 저기 몇 달 옮겨 다니더니 3년 전에는 그마저도 그만뒀다. 남편은 천성이 게으른 탓에 일하기를 싫어했다. 시부모는 며느리가 설쳐서 아들이 기가 죽은 거라며 툭하면 ''불쌍한 내 아들''을 읊조렸다. 외동딸로 곱게 큰 내가 백수 남편 대신에 옷가게, 음식점, 비디오대여점 등을 하면서 아들, 딸 공부시키고 시부모를 부양한 건 시집에서는 칭찬 들을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친구들은 "학창시절에 성질 깐깐하고 콧대 높던 네가 그렇게 굴욕적으로 사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다. 5년 전에 홀로 된 친정아버지는 딸이 불쌍하다며 늘 눈물바람이다. 결혼 초에는 시집식구들과 돌아가면서 부딪쳤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젠 지쳤다. 나만 참으면 집안이 조용하겠지 싶어 그냥 견뎠다. 시아버지가 걸렸다는 소화불량과 불면증을 나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용돈을 올리라는 남편의 이번 요구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부모님 용돈 정답은 없다.
부모님 용돈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내가 딸일 때와 며느리일 때 기준이 달라지는 모습도 있다. 마음은 있지만 경제적인 형편이 안 돼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가치관의 차이도 있다. 돈을 드려도 본인을 위해 쓰지 못하는 부모님도 있고, 자신을 위해 쓰는 분들도 있다. 많이 드리면서도 적다고 느끼는 사람과 적게 드리면서도 여전히 드리기보다 받기에 익숙한 사람들도 있다.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하자는 제안을 해 본다. 내가 며느리지만 딸이라면, 받는 부모님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내가 받지만 자식들의 처지에서 용돈에 대한 생각은 무얼까? 물론 그래도 정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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