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다는 것

지역내일 2011-05-19

길을 묻는 체하며 접근하는 사람을 따라갔다가 끔찍한 일을 당한 어린이들에 대한 보도가 한두 번이 아니다.
20여 년 전인 1980년대에 필자가 미국의 대학에서 연수 중 일 때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딸이 학교에서 배웠다는 이야기이다. 지나가던 차가 멈춰서 길을 묻거나 하면 자동차의 주행 방향과 반대쪽으로 도망가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내준 유인물에는 여자 아이의 가슴 겨드랑이 사타구니 허벅지 등 몸의 은밀한 부분들을 동그라미로 표시해 놓고, 이런 부위를 다른 사람이 만지면 ''No'' 라고 외치라고 쓰여 있었다. 혹시 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경찰에게 전화하라고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이와 비슷하거나 똑같은 일이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상황이다. 그래서 착하기보다는 강하고, 말 잘 듣기보다는 자기를 잘 주장해야 자신을 지키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아직도 자녀들에게 착하기만을 강조하는 수가 많다. 착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전적으로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온순하다거나 유순하다’는 뜻과 함께 ‘순한, 고분고분한’ 이란 의미도 함께 나타내 맥락 상 ‘순종적’ 이란 뜻이 더해지기도 한다.
정신역동적으로 착하다는 것은 의존적이라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착하다는 말에는 본질적으로 ‘남과의 관계에서’라는 전제가 있다. 남과 관계없이 홀로 착한 수도 있겠으나, 주로 타인에 의한 평가로 쓰이는 말이다. 즉 자신의 마음 상태나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자(他者)의 견해라는 뜻이다.
무능력한 유아처럼 전적으로 남에게 기대어 살자면 착해야만 할 것이다. 자아가 발달하면서 주장이 세어지는 사춘기 자녀들을 돌보기 힘들다고 말하는 대로 잘 따르기만 요구한다면, 방긋방긋 웃고 따르는 무능력한 한 살배기로 살기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사춘기 지나 성인이 된 자녀에게 여전히 말 잘 듣고 착하기만 요구하는 것은 문제다.
술만 마시지 않으면 너무 착하다는 말을 듣는 알코올의존자들이 흔하다. 책임 있는 성인에게 이 말은 결코 칭찬일 수가 없다. 감정적으로 미숙하고 무능력하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일 뿐이다. 그러는 한 결코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지 못하고,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중 하나가 알코올이다.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자면, 지나치게 착하기를 요구하는 것도 독이라는 이야기이다.

신정호 강원알코올센터 소장(연세대 원주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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