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증언-근로정신대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사례발표
“근로정신대를 아시나요..?”
공부시켜준다 꼬드겨 노역에 굶주림과 감시.. 사죄도 배상도 못 받아
최미니 민주노동당 창원시의원과 창원여성회(대표 문현숙)가 공동주최한 ‘근로정신대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사례발표회’가 지난 28일(월) 오후 2시 창원대학교 사회대 105호실에서 학생 시민 등의 참여로 열렸다.
발표회는 창원대 사학과 남재우 교수가 사회를 맡아 영상소개, 사례발표, 주제발표 순으로 이어졌다. 영상은 2008년 인권영상공모전 출품작 ‘열네살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들’을 소개. 화면을 통해 ‘조선여자근로정신대’의 전개과정 및 일본에서 조선여성들의 고생과 귀국 후 사회적 냉대에 따른 2차 피해 등을 보여줬다. 이어 사례발표자로 김수자 할머니(가명 81 마산)와 양금덕 할머니(82 광주)가 각각 증언에 나섰다.
“원통하다.. 이 울분 어디 풀꼬”
창원지역의 유일한 근로정신대 신고자 김수자 할머니는 마산성호국민학교에 다니던 1944년 후지코시 군수업체에 동원돼 2년 가까이 착취만 당한 뒤 임금 없이 귀국, 현재 12년 째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법정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군복 입은 남자 2명이 교장과 담임을 찾아온 뒤 담임이 우리를 불러 활동사진을 보여주며 “일본 가면 공부할 수 있으니 부모를 설득해라”했다. 며칠을 굶어 겨우 승낙을 얻어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군수업체 후지코시 공장에서 일했다. 중학교도 보내주지 않고 공장에서 일만 시켰다. 하루에 비행기 부품 베어링 200개를 만들어야 했다. 일본놈한테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해 하루 300개 정도 만들었다. 그곳은 2층까지 눈이 쌓이는 추운 지역이었는데 공장 기숙사 2층 다다미방에서 달랑 담요 1장 덮고 잤다. 추워서 잠도 오지 않았고 고향 생각이 나 많이도 울었다. 1년3개월 후 공장이 황해도 청진으로 옮김에 따라 청진에서 일하다 휴가 조치를 받았다. 월급 달라 했더니 도장 찍힌 종이 한 장 줬다. 그것을 역무원한테 보이고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해방 뒤 여러 차례 일본 공장 정문 앞에 가서 임금을 요구했지만 사장도 못 만난 채 싸우다 그냥 오기도 했다"고 증언.
66년 전 아픈 기억을 더듬으며 "배가 고파 원통했고 돈 한 푼 못 받아 더 원통했다. 나라 없는 설움과 울분을 어디다 풀까. 일본 사장 잡아 모가지를 비틀어도 안 풀릴 것 같다"며 눈물 흘렸다.
“시민모임이 있어 恨 절반 풀었다”
양금덕 할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 때 38명에 섞여 여수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를 거쳐 나고야로 가 미쓰비시 군수업체에 동원됐다.
현재 일본을 오가며 미쓰비시와 협상을 진행 중인 양 할머니는 "우리는 일본 여학교에 보내준다는 말에 속았다. 처음 며칠 동안 일본의 좋은 곳만 보여주다 공장에서 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학교 갈 수 있다며 강당에 가둬놓고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하게 했다. 그렇게 1년 8개월가량 일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도중엔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갔다. 화장실에 가려면 순번 대기표를 줬는데 기다리다 옷에 실례하기도 했다. 반장에게 따지면 오히려 뺨을 때렸다. 배가 고파 다꽝(단무지)이나 일본 사람이 먹고 버린 수박 껍질을 먹기도 했다. 빨간색이 얇게 붙은 그게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1945년 22명이 귀국했는데 돈을 얼마 가져 왔냐고 묻는 어머니께 할 말이 없어 마음이 아팠다. ''위안부''로 오인돼 결혼하기도 힘들었다. 세월이 지나 광주에서 먼 화순으로 시집갔지만 10년 뒤 시댁에서 사실을 알게 돼 눈물도 엄청 흘렸다. 모두가 수군거리는 것 같았고 시장도 저녁 때 갔다. 말도 못하고 그렇게 냉가슴으로 65년을 지내왔다”고 증언. 눈시울을 붉히며 "66년 전 일을 생각하면 가슴에 대못이 박힌 것 같다. 눈물도 못 거두고 죽는 줄 알았는데, 시민모임이 만들어져 절반 정도는 풀었다. 더 건강해서 일본의 사죄를 꼭 받아내겠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 한도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10만 희망 릴레이'' 진행 중
최미니 의원은 발제를 통해 “2008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실태조사에 따라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동원 건수 총 183명(신고당시 생존자 161명. 후지코시 도야마공장 1089명,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300여명, 도쿄아사이토 누마즈공장 300여 명 등 구술조사와 당시 신문 기사 등의 자료를 보면 1700여 명에 이름), 마산 창원지역 신고 접수 24건(생존 22명), 진해경화초등 창원상남초등 마산성호초등 등 경남의 학교단위동원은 150명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1965년 당시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받은 8억 달러의 반은 포항건설(55.6%) 등 광공업에 투자, 나머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사회간접 자본 시설확충에 사용돼. 정작 그 배상액을 수령했어야 할 일제강점 하 피해자들은 소액의 배상액을 받거나 그 마저도 당시 파악된 피해자에 한함에 따라 배상금 구경조차 못한 피해자가 대부분”이라 밝혔다.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창원시민모임 이경희 대표는 "이 겨레 여성들은 일제 후반 들어 더 큰 희생과 고통을 강요당했다“며 ”근로정신대 문제는 민족 성 계급의 문제가 중첩된 것으로, 피해 여성들이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쟁에 동원된 여성을 성적으로 이용한 역사와 결부됐기 때문"이라 역설. 그들은 노동력 착취와 함께 여성에게만 강요한 일방적인 정절, 순결이데올로기의 이중피해자라고 강조했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광주소재) 김희용 대표는 시민모임의 활동 과정과 성과 등을 소개하며 "2억3000만 엔대에 달하는 미불임금 및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99엔 사건“에 대해 언급. 1인 시위와 13만5000여명에 달하는 항의서명운동 및 미쓰비시를 65년 만에 협상장으로 끌어낸 경위 등을 설명했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은 일제피해자공제조합과 함께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문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국민 10만 명이 천원씩 기금하는 ''10만 희망릴레이''를 진행하고 있다.
Daum카페, 근로정신대 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
문의 : 010-2646-7931 / 010-2729-4496
윤영희 리포터 ffdd77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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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자근로정신대’란
태평양전쟁의 말기인 1944년~45년 사이,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거나 12~17세의 어린나이에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회유에 의해 강제동원 돼 후지코시, 미쓰비시 중공업 등 군수회사에 강제 노역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해방을 맞을 때까지 굶주림과 감시 속에 가혹하게 시달렸으나, 해방 65년이 되도록 임금은 물론 어떠한 사죄나 배상도 받지 못했다. 특히 해방과 함께 귀국한 후 ‘군 위안부’ ‘몸 버린 여자’라는 사회적 편견과 오인으로 인해 파혼당하거나 차가운 주위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등 이중의 고통을 겪어왔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사회 국제적 관심에 비해 ‘조선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심이 낮고 존재여부에 대해서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윤영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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