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구의 우리음식 이야기② 진정한 미식가 ‘구루메’

“음식의 무지가 가정의 토대를 허약하게 한다”

지역내일 2011-01-04 (수정 2011-01-04 오전 11:43:03)

쪄서 말린 고구마나 조미되지 않은 오징어를 힘들게 씹던 아이들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씹는 일이 편해짐에 따라 입에서 뇌로 전달되는 자극도 적어졌다. 턱의 발달이 뇌의 진화를 촉진한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현대인이 좋아하는 인스턴트식품, 즉 패스트푸드 식당의 음식들은 하나같이 고객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씹기 편하게 만들어졌다. 부모들은 아이에게 딱딱한 음식을 먹이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다. 



아기들은 우유부터 시작하여 죽 같은 부드러운 이유식을 거쳐 이가 나면서 어른들과 같은 식사를 하게 된다. 음식이 부드럽다는 것은 아이가 아직 자립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어머니가 아이에게 애정을 많이 쏟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과도하게 보호하려는 모성애가 강하다. 

요즘 아이들의 식사 양태는 아무 생각 없이 다니면서 쉬지 않고 입에 넣는다. 음식을 먹는다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손만 버릇처럼 자동으로 움직여 입으로 쓸어 담는다. 한 입 크기로 만든 부드러운 것을 어적어적 쉴 새 없이 먹어댄다. 또 먹는 것이 지나치게 가공식품 쪽으로 편중되다보니 성인병의 대명사였던 비만과 당뇨병이 어린이에게도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식(食)’이란 맛이 있고 건강에만 좋으면 그만인 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즐겁게 먹는 일이다. 입속에서 맛을 음미하고, 이와 잇몸으로 그 감촉을 즐기고, 향기와 냄새도 음미하며, 천천히 씹어 충분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음식 재료에서 계절이나 풍토를 느끼고, 그와 더불어 음식에 얽힌 대화를 즐기는 것이다. 그런 행위들은 모두 뇌로 전달되고, 뇌는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5~6분에서 끝나는 식생활에서 그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이것은 굶주린 동물이 먹이를 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음식을 먹는 리듬은 그 사람의 사고의 리듬이고, 일의 리듬이고, 나아가 인생을 즐기는 리듬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음식 먹는 재미를 포함해 인생을 즐기는 여유 있는 자세를 체득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리듬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 곧 자신의 인생 리듬을 터득한 사람이다. 이것이 가능한 사람이 바로 문화인이다. 이러한 리듬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살아가기 마련이다. 

빨리 먹는 미식가는 없다. 미식가의 본래의 의미는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 음식에 대해 지치지 않는 호기심을 갖고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프랑스에서는 미식가를 ‘구루메(gourmet)’라고 하는데, 이 말은 원래 와인의 맛을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음식 맛에 정통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맛’이라는 말의 의미는 더욱 확대되어 지금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의미로 비유되는 경우가 많다. ‘여행의 맛’ ‘짭짤한 수입’ ‘달콤한 신혼’ ‘씁쓸한 패배’ ‘매운 시집살이’ ‘깨물고 싶도록 예쁘다’ 등의 표현이 그런 게 아닐까. 

이것은 입이 단순히 음식을 먹는 기관이 아니고,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장치의 하나임을 우리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증거다. 맛은 참으로 신기하다. 눈을 가리고 음식을 먹으면 대부분이 음식 맛을 느낄 수 없게 되며, 냄새가 없는 요리를 먹어도 맛이 없다. 일설에 의하면, 미각의 80% 정도는 후각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퇴근길에 어떤 집에서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 나온다. ‘응? 고기를 굽고 있군’, ‘앗? 이 냄새는 자장이구나’하고 느끼는 순간, 어릴 때의 향수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음식 냄새는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힘이 강하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추억과 겹쳐져 사람을 감상에 젖게 한다. 길거리를 가다가도 어느 집에선가 풍겨 나오는 음식 냄새 때문에 갑자기 집 생각이 간절해지고, 때로는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원시 감각을 자극하고 추억 속에 여러 식사 장면을 각인시킴으로써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가정이란 어머니의 맛이 냄새로 감도는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먹이를 먹고 싶으면 혼자서 먹어라. 식사를 하고 싶다면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먹어라. 생각해 보면 함께 밥을 먹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다는 행위는 부엌에서의 투쟁이며 식탁 위에서의 싸움임과 동시에 뇌 안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즐거운 향연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054-458-8887
글 s-코드스쿨 구미교육원 조헌구 원장
정리 사진 전득렬 팀장 papercu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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