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꽃미남 배우의 ‘아름다운’ 캐스팅으로 화제가 됐다. 초능력자와 평범한 사람의 대결이라는 독특한 시놉시스로 화제가 됐다. 꽃미남 배우의 첫 악역도전이라는 말에 개봉 전부터 여성관객들의 기대감도 후끈 달아올랐다. 강동원과 고수 주연의 영화 ‘초능력자’ 얘기다.
초능력자와 초능력이 통하지 않는 한 남자의 이야기
사회 소수자로 나오는 임규남(고수). 처음엔 폐차장에서 일을 하다가 초인을 만날 무렵엔 전당포에서 일을 한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만 해도 돈 많은 누님들이 두둑한 지갑 들고 줄줄이 줄을 설 것 같은 얼굴에 그렇게 순수하게 살아간다고? 왜 그런 배경이 필요했는지 궁금했다. 게다가 친구는 터키와 아프리카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다. 규남은 그 외국인 친구들과 가족 같은 정을 나누며 지낸다. 물론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생각할 때 자연스러운 설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메시지를 위해 꼭 외국인 친구가 필요했던 걸까?
규남은 왜 못 가진 자로 나왔을까, 왜 외국인 친구밖에는 사귀지 못했을까? 심지어 교통사로로 깁스까지 했던 발은 어떻게 저절로 나았을까? 영화 초반부터 규남에 대한 궁금함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규남의 특별함은 초인을 만나면서부터 나타났다. 그에게만 초인의 능력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으로 사람의 마음을 거침없이 조종하던 초인이 당혹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뒤로 규남은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죽지도 않으면서 초인과 싸운다. 로보캅보다, 태권V보다 더 튼튼하다. 심지어 지하철역에서 한번 죽었다가 살아나기까지 한다. 결국 규남은 또 다른 초능력자였다.
초능력자를 외롭게 만드는 사회의 편견
초인(강동원)은 외롭다. 혼자다. 갖고 있는 초능력 때문이다. 엄마는 아들을 목 졸라 죽이려고까지 했다. 왜 그랬을까? 영화에선 어떤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짐작컨대 사회적 편견 때문이었으리라.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상하게 쳐다보고, 남다른 능력을 갖고 있어서 괴물 취급했던 사회의 냉대를 엄마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초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리에 장애를 가진 아이로 설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이상한 능력까지 갖고 있으니 괴물스러움이 한껏 높아진 걸게다.
그쯤 생각하고 보니 규남의 외국인 친구들도 이해가 됐다. 편견이 많은 우리라면 가진 것이 없고, 사회적 소수자인 규남과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 외국인 노동자들을 규남처럼 친구로 마주할 수 있었을까? 편견을 갖고 있지 않은 규남이기에 외국인 친구들과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거다. ?
나와 다른 사람도 안아줄 수 있는 사회
초인이 잘 자랐다면 어땠을까? 그 아름답고 깊은 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꿔주며 자랐다면 어땠을까? 인종과 재산,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서로 친구가 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어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차별의 시선 때문에 어린 초인의 마음속에 자라게 된 열등감, 그리고 사춘기를 넘어가며 키워진 외로움, 가족과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난 적대감이 오늘의 초인을 만들었을 것 같다. 지금도 어느 거리에는 어린 초인의 모습처럼 한쪽 다리를, 한쪽 손을, 한쪽 눈을 불편해 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그 이웃들을 우리가 따뜻하고 편안하게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잘만 한다면 따뜻한 초능력자, 훈훈한 초능력자들이 많이 자라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지혜 리포터 angus70@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초능력자와 초능력이 통하지 않는 한 남자의 이야기
사회 소수자로 나오는 임규남(고수). 처음엔 폐차장에서 일을 하다가 초인을 만날 무렵엔 전당포에서 일을 한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만 해도 돈 많은 누님들이 두둑한 지갑 들고 줄줄이 줄을 설 것 같은 얼굴에 그렇게 순수하게 살아간다고? 왜 그런 배경이 필요했는지 궁금했다. 게다가 친구는 터키와 아프리카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다. 규남은 그 외국인 친구들과 가족 같은 정을 나누며 지낸다. 물론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생각할 때 자연스러운 설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메시지를 위해 꼭 외국인 친구가 필요했던 걸까?
규남은 왜 못 가진 자로 나왔을까, 왜 외국인 친구밖에는 사귀지 못했을까? 심지어 교통사로로 깁스까지 했던 발은 어떻게 저절로 나았을까? 영화 초반부터 규남에 대한 궁금함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규남의 특별함은 초인을 만나면서부터 나타났다. 그에게만 초인의 능력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으로 사람의 마음을 거침없이 조종하던 초인이 당혹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뒤로 규남은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죽지도 않으면서 초인과 싸운다. 로보캅보다, 태권V보다 더 튼튼하다. 심지어 지하철역에서 한번 죽었다가 살아나기까지 한다. 결국 규남은 또 다른 초능력자였다.
초능력자를 외롭게 만드는 사회의 편견
초인(강동원)은 외롭다. 혼자다. 갖고 있는 초능력 때문이다. 엄마는 아들을 목 졸라 죽이려고까지 했다. 왜 그랬을까? 영화에선 어떤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짐작컨대 사회적 편견 때문이었으리라.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상하게 쳐다보고, 남다른 능력을 갖고 있어서 괴물 취급했던 사회의 냉대를 엄마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초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리에 장애를 가진 아이로 설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이상한 능력까지 갖고 있으니 괴물스러움이 한껏 높아진 걸게다.
그쯤 생각하고 보니 규남의 외국인 친구들도 이해가 됐다. 편견이 많은 우리라면 가진 것이 없고, 사회적 소수자인 규남과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 외국인 노동자들을 규남처럼 친구로 마주할 수 있었을까? 편견을 갖고 있지 않은 규남이기에 외국인 친구들과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거다. ?
나와 다른 사람도 안아줄 수 있는 사회
초인이 잘 자랐다면 어땠을까? 그 아름답고 깊은 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꿔주며 자랐다면 어땠을까? 인종과 재산,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서로 친구가 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어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차별의 시선 때문에 어린 초인의 마음속에 자라게 된 열등감, 그리고 사춘기를 넘어가며 키워진 외로움, 가족과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난 적대감이 오늘의 초인을 만들었을 것 같다. 지금도 어느 거리에는 어린 초인의 모습처럼 한쪽 다리를, 한쪽 손을, 한쪽 눈을 불편해 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그 이웃들을 우리가 따뜻하고 편안하게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잘만 한다면 따뜻한 초능력자, 훈훈한 초능력자들이 많이 자라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지혜 리포터 angus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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