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 따라 산다? 난 진심 따라 산다!

주부들이 말하는 나의 ‘제3활동’

지역내일 2010-10-29
전 부치고, 송편 빚고, 추석 명절 쇠면서도 TV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드라마가 있다. <주부 김광자의 제3활동> 얘기다. 주부들의 ‘팬덤’이 무시 못 할 사회현상임을 반영하는 동시에 가정에 파묻힌 평범한 주부의 자아 찾기를 경쾌하게 풀어낸 이 드라마는 방영 이후에도 꽤 오래 회자되고 있다. 아내로서 제1활동, 엄마로서 제2활동에 치우친 생활을 하다 보니 오로지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제3활동’은 주부들에게 사치였을까. 드라마 속 주부 김광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내 체면 따라 살지 않고 내 진심 따라 살겠습니다.” 체면이나 남의 이목 따위 잊고,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다하는 우리 주부들의 제3활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제3활동 01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기
조혜지(37·서울 송파구 잠실동)씨는 두 달 전부터 아이돌 가수의 팬카페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 중이다. “제가 슈퍼주니어 김희철을 좋아해요. 김희철 사진을 모으고,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열심히 시청하고, DJ로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올리는 등 나름 팬임을 자처했죠.”
한데 소극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진정한 팬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소외감이 들더라는 것. 적극적 활동을 위해 팬카페에 가입하고 싶었지만, 서른일곱살이라는 나이 때문에 종전 회원들이 손가락질할 것 같아 망설였다는 조씨. “그런데 이웃집 언니가 조권의 팬카페에 가입했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는 딸과 함께 조권 생일 파티에도 다녀왔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이웃집 언니가 “예순 넘은 할머니 팬들도 많은데 서른일곱 살이 대수냐?”며 용기를 주었다고. 이후 조씨는 해외 공연을 다녀온 가수의 마중과 국내 콘서트 참관은 필수, 라디오 진행 현장 찾아가 간식 제공하기는 주중 행사가 되었다.
“잠실에 사는 동년배 회원들과는 이틀에 한 번 인근 커피숍에 모여 각종 사이트를 검색하며 악플이나 괴소문을 추적해 관리하는 일을 해요.”
조씨는 처음에 남편과 초등학교 3학년 딸 몰래 팬카페 활동을 하다 최근에 사실을 털어놨다고. 남편이 골프에 빠진 것이나 딸아이가 판타지 소설을 당당히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저를 이상하게 보는 이웃 주부들이 많은 거 알아요.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요. 내 감정에 충실할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그들이 알까요?”
가끔 팬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딸의 숙제를 봐줄 수 없을 때도, 남편의 저녁을 챙길 수 없을 때도 있지만 가족의 이해가 그녀의 제3활동을 더욱 왕성하게 해준다고. 

제3활동 02 종교 활동에 매진하기
“저에게 제3활동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거예요.” 고은주(42·서울 노원구 중계동)씨는 그동안 주일 예배만 참석하다가 큰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올해부터는 주일 저녁 예배, 수요 예배, 목요일 구역 예배, 금요일 밤 예배 등 가사 이외 시간을 대부분 종교 활동에 할애한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엄마의 손길이 필요해 주일 예배도 겨우 다녔지만, 이제는 교육이나 양육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
“남편은 못마땅해해요.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가면 되고, 차라리 그 시간에 운동을 하라는 거예요.”
하지만 고씨는 남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단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는데 고유의 제3활동만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다하고 싶다는 게 그녀의 생각.
“교회 가서 예배만 보는 줄 알아요. 거기서 성경 공부도 하고, 자원봉사 활동 계획도 세우고, 인생을 함께 고민하기도 하는 걸요.” 종교 활동 자체만으로 보는 남편의 시선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라는 고씨. 하지만 교회에 나갈 때 자신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만큼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교회에서 제3활동만은 포기할 수 없단다.

제3활동 03 매일 아침 무작정 커피숍에서 차 한잔
최수정(42·서울 강북구 수유동)씨의 제3활동 무대는 동네에 자리 잡은 소박한 커피숍이다. 매일 새벽에 눈을 떠 남편 출근을 돕고, 후닥닥 아침상 차려 아이들을 내보내면 산더미 같은 설거지와 거실 바닥에 흐트러진 옷가지들 때문에 한숨이 나왔다고.
“14년을 한결같이 전쟁 같은 아침을 보냈는데 남는 게 없더라고요. 후닥닥 집 안 곳곳을 치우다 보면 범위가 넓어져 어느새 점심나절까지 집안일을 하기 일쑤였죠.”
배달돼온 신문은 읽어보지도 못하고 재활용 쓰레기봉투에 버려지는 일이 다반사…. 어쩌다 좋아하는 음악가의 피아노곡을 들을라치면 가스 점검이다, 소독이다 방해 요소들이 득실대니 마음이 황폐해지더라는 것. “이렇게 살다가는 죽겠더라고요. 소극적인 성격이라 대외 활동을 하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고. 커피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신문을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더군요.”
그래서 매일 아침 조간신문을 들고 집 근처 커피숍을 찾는다. 커피 한 잔에 2천 원. 한 달에 20일, 4만 원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돈이지만 최씨는 갈망하는 제3활동의 대가라 아깝지 않다고 전한다.
“점심때까지 2시간 넘게 커피숍에서 신문을 꼼꼼히 읽고 오는데, 집에서 읽는 것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내용이 눈에 잘 들어와요.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도 없고, 거실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치울 걱정이 없으니 그럴 테지요.”

제3활동 04 길거리에서 밸리 댄스 무료 공연하기
“제3활동이라고 하면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 많은데, 제 생각은 달라요. 저도 <주부 김광자의 제3활동> 봤는데요. 거기서 말하는 제3활동은 단순한 취미가 아닌, 나를 희생해도 아깝지 않은 일을 하는 거예요. 앞뒤로 재고 고민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게 제3활동이라고요.”
임정희(44·서울 양천구 목동)씨는 열정을 다하는, 무작정 좋아 당장 실천에 옮기는 일이 제3활동이라고 전한다. 그런 임씨 또한 제3활동을 하는 주부 중의 하나. 평소에는 말이 없고 조신하기로 평이 자자한 임씨의 제3활동은 길거리 밸리 댄스 무료 공연. 가슴 훤히 파이고 배꼽을 드러낸 옷을 입고 매주 월요일 동네 인근 상가에서 밸리 댄스 공연을 한다. 3년 전 디스크 수술 이후 허리 건강을 지키기위해 배우기 시작했다는 밸리 댄스. 처음에는 문화 전파와 학원 홍보를 위해 원장 권유로 시작했지만, 공연 횟수가 더할수록 묘한 성취감에 빠져들더란다.
“지금은 함께 배우는 주부들을 주축으로 제가 공연 스케줄을 잡아요. 남세스러운 옷차림으로 거리 공연 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공연하는 순간에 제 존재감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엄마였을 때, 아내였을 때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았지만 공연을 하는 순간에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쾌감에 제3활동에 빠져든다는 임씨.
그러고 보면 드라마 속 광자씨의 제3활동과 우리 이웃 주부들의 제3활동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제3활동은 단순한 대외 활동이나 일탈이 아닌,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결국 존재감과 자아를 찾는 활동을 굳이 제3활동으로 구분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씁쓸해지는 것은 왜일까? 아내와 엄마의 존재감을 일깨워주는 가족의 관심이 있다면 제3활동은 제1활동과 제2활동만으로 일갈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심정민 리포터 request0863@naver.com
일러스트 임지영



Tip  <주부 김광자의 제3활동>은
9월 22일 방송된 MBC-TV 추석 특집 드라마 <주부 김광자의 제3활동>은 무기력한 삶을 살던 주부가 아이돌 그룹의 ‘새드 벌스데이 투 미(sad birthday to me)’라는 곡을 듣고 감동 받아 그 아이돌 가수에게 빠지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아이돌 가수를 알기 전 주부 김광자의 인생에는 남편 뒷바라지와 자식 키우기, 2가지 활동만 존재했다. 아내, 엄마라는 이름 아래 늘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김광자가 ‘진즈’라는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며 인생의 제3활동이 시작됐다. 남편의 직장 상사 아이 돌잔치에 가려다 행방불명된 김광자를 찾기 위해 가족이 나섰고, 결국 팬클럽 캠프 무대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가족에게 김광자는 “내가 필요로 할 땐 나 몰라라 하고, 네가 필요할 때만 찾는 게 가족이냐! 나도 사람이다!”라고 외친다. 무심한 남편과 까다로운 딸은 늘 김광자에게 무관심했지만, 팬카페 회원들과 소통을 통해 또 다른 삶의 행복을 찾아간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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