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만이 미덕일까?

엄마 행복 우선해도 아이는 밥만 잘 먹더라

지역내일 2010-10-25
Talk 1  아이는 부모를 닮아간다
<나는 아이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를 집필한 연세대 소아과 신의진 교수)는 병원을 찾는 엄마들한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엄마 먼저 행복해지세요.” 그러면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럼 아이는요?” 하는 반응을 보인다고. 아이는 나 몰라라 팽개쳐놓고 혼자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부모가 되라는 말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신 교수는 “부모가 자신의 행복을 먼저 선택하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결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거꾸로 행복을 뒷전으로 한 채 우울을 안고 사는 엄마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보면 공감하기 쉬울 것 같다. 캐나다에서 시행한 연구에서는 임신 중 엄마의 우울증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방출해 아이의 뇌신경 발달을 저해한다고 밝혔다. 산후 우울증이 아이의 지능과 언어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엄마의 우울증은 아이를 양육하는 전 시기에 걸쳐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 아동기 아이에게는 불안장애를 유발하기 쉬우며, 청소년기에 반항과 일탈이 늘어나는 것도 엄마의 우울증 영향이 크다.
사회 학습 이론 중 ‘반두라의 관찰 학습 이론’에서는 학습은 칭찬이나 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찰’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어린아이일수록 부모의 행동을 모방함은 물론, 가치관도 그대로 흡수하기 때문에 부모로서 보이는 모습이 중요하다. 행복은 가르치고 외운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태도를 닮아간다. 부모가 발전하고 성장하면서 행복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는 저절로 행복을 배워간다.

Talk 2  엄마 행복 찾기가 직무 유기라고?
‘엄마가 먼저 행복해지라’는 말은 전문가들의 이론에 그칠 뿐일까? 아이들한테 해줘야 할 것도 많은데 그 틈에서 엄마 행복부터 찾는 건 직무 유기란 생각도 들 것이다. 그렇다고 희생을 당연한 미덕으로 참아내는 생활이 즐겁지만은 않다면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 움직여본 엄마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반장, 상장도 엄마 희생 담보라면 미련 없어  2학기 첫날, 선생님이 ‘반장 하고 싶은 사람’을 물었을 때 거의 다 손을 들었다는 어느 2학년 교실. 그러나 정작 이틀 후 임원 선출일엔 모두 잠잠했다. ‘반장 만들기’라는 말까지 나올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해 출마한다는 세태에 다소 의외의 상황이다. 아이의 출마를 만류한 최유진(39)씨는 ‘아마 딴 엄마들도 자신처럼 엄마가 힘들어 못 도와주니 나가지 말라고 설득했을 것’이라 봤다. “아무래도 엄마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있을 텐데 늦둥이 둘째 키우며 재택근무까지 하는 상황에서 즐겁게 책임을 다하기란 어렵죠. 내키지 않는 희생을 하면서까지 아이만을 위해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이한테는 ‘동생 좀 크고 여유 생긴 후 엄마가 행복하게 도와줄 수 있을 때 하자’고 약속해둔 상태. ‘엄마 탓’을 할까 걱정도 됐지만, 나름대로 아이는 교회에서 반장을 맡아 신나게 일하고 있다.
이성아(39)씨는 영어스피킹대회에 나가겠다는 초등 4학년 딸을 만류했다. 이전에 대회 준비를 도와주면서 아이를 닦달했던 악몽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다. 엄마의 스트레스가 범벅 된 수상이 행복하지 않았던 아이도 이제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 대회를 찾아 도전하고 있다. 반장도, 상장도 엄마 희생을 담보로 한다면 조금도 미련 없다는 엄마들이다.  
엄마 의지 안 해도 혼자 설 수 있었던 아이  기혼 여성들이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저지르지 못하는 단골 핑계가 ‘아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허미현(41)씨는 남편과 초등생 외동아들만 남겨둔 채 일본 여행을 했다. 당연히 가족 여행을 가야한다는 게 주변 반응이지만 자신에게 좀더 행복한 여행을 택한 것. 안쓰러웠던 아이 끼니 걱정이 무색하게도 돌아왔을 때 아이 반응은 “엄마, 내가 돈 모아줄게 이모랑 또 여행하고와”였다고. ‘엄마 없던 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자유를 만끽한 듯 평온하고 만족스런 얼굴이었다.
6년 터울 둘째를 키우며 11년간 명함을 잃었던 강영희(41)씨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겠다고 움직인 건 첫아이가 6학년 때다. “주위에서는 중학교 진학을 앞둔 중요한 때 사춘기 아들을 놔버리면 어떡하냐며 걱정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제가 직장에 나가면서 아이 성적도 오르고 공부 습관도 좋아졌어요. 스스로 할 수 있는데도 엄마가 일일이 간섭하는 게 싫었다고 하더군요.” 엄마는 원하던 재취업을 통해 행복을 찾았고, 아들은 중학교 첫 모범상을 받으며 자기 주도 학습에 성공했으니 그야말로 윈윈한 셈이다. 
엄마의 행복, 나도 달라지고 아이도 달라지고  박선정(40)씨가 요즘 행복해진 건 ‘12만 원’ 덕분이다. ‘엄마표 수학 공부’를 시키면서 아이한테 분노가 폭발하는 날이 많았는데, 공부방에 보낸 이후로 싸울 일도 없어지고 아이 울음도 사라졌으니까. 어떻게든 엄마가 붙어 앉아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니 아이와 관계도 한결 좋아지면서 엄마 스스로 기대치를 낮추게 되더라고. 가장 스트레스 많았던 엄마표 수학 공부 시간을 이젠 제일 행복한 자기 계발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
‘웰빙 주부’로 주위에서 인정받는 김민아(38)씨는 살림이 지겹지 않은 비결을 ‘주방에 서지 않는 일요일 오후’라 답한다. 주중에는 웰빙 식단과 엄마표 간식을 고집하지만 일요일만큼은 편한 게 우선. ‘한두 끼쯤 어때’ 하는 ‘불량 주부’의 여유가 주중 ‘프로 주부’다운 면모를 발휘하게 하는 밑작업인 셈이다.
같은 일이라도 희생한다고 생각하면 불행하다. 즐겁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대안을 찾아 행동에 옮기는 게 가족을 위해서도 현명한 처사다.

Talk 3  엄마라서 행복하려면
행복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변화가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변하려고 노력하는 게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 아닐까. 어느 순간 불행하다고 느끼면 얼른 행복해지는 길로 움직여야 한다.
엄마로 사는 게 우울했다는 김윤미(44)씨는 요즘 아이 매니저 노릇보다 자신의 즐거움을 우선하며 지낸다. “애 걱정이며 신세 한탄을 할 때마다 이러면 아무도 나랑 얘기하기 싫어지겠단 생각이 들었죠. 남이 이해해주기만 바랄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게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같아요.”
두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엄마를 무시해 충격 받는 날이 잦다는 채정숙(가명·43) 씨는 요즘 후회가 많다. 처음엔 ‘아이들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분노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이들만 바라보며 울고 웃는 엄마가 행복해 보였을 리 없을 것 같다고.
나 자신이 만족스럽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어야 아이도 나를 존중해준다. 혹 엄마가 먼저 행복해지길 주저하는 이유가 ‘아이를 위해서’라면 베트남의 승려 틱낫한의 말을 천천히 새겨보자.
최유정 리포터 meet1208@paran.com
참고 도서 <나는 아이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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