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단주, 부지런한 단주

지역내일 2010-10-14


수년째 단주한 L씨가 단주를 시작한 이들에게 뜬금없이 ‘단주를 게으르게 하라’며, 너무 부지런하지 말라고 역설하였다. 그 또한 최근까지 지나치게 부지런히 단주해 온 터에, 그 과정을 겪고 나서야 얻은 깨달음 때문이리라.
사람이 게으른 것보다 부지런한 것이 좋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것은 생산적이고 효율적이어서 언제나 좋은 것인가? 오히려 너무 부지런하기 때문에 비효율과 불이익이 따르는 것은 아닐까?
왜 부지런해야 하는가? 부지런해서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이루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옛날보다 훨씬 더 부지런해져서, 더 큰 집과 더 많은 지식과 더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 행복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공허하고 불행하다고 하여 술과 약물과 도박과 같은 도취적 수단에 더 의지하고 있다.
처음 단주를 시작할 때면 대부분 너무 부지런하다. 단주를 위한 치료는 물론 취미활동, 운동, 직업 활동 등으로 지나치게 부지런하다. 스케줄을 완벽하게 짜놓고 숨 막히게 바쁜 하루를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부지런한 단주가 조금은 게으른 단주보다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무언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단주의 본질은 변화다. 무엇을 하든 지난날과는 다르게 행동하며 살아가기를 훈련하는 것이 회복을 위한 단주 생활이다. 무슨 일이든 조금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여 부지런을 떠는 것은 과음하던 지난 시절의 생활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알코올의존이란 질환의 전형적인 행동 증상이다. 이를 고쳐 매사에 더 천천히 차근차근하게 사는 연습이 필요하다.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이 불안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라서 단주일망정 지나치게 부지런히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는 직면해야 많은 것들을 회피하는 수단이 된다. 술을 마시지는 않았으나 취한 때와 똑같은 회피!
결국 단주에만 매여 지나치게 부지런을 떠는 것은 중독적 행동의 반복일 뿐이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챙겨야 할 중요한 것들이 단주만은 아니다. 지난날 일, 또는 남들의 평판이나 도리만 생각하고 인생의 다른 모든 것들에는 너무나 소홀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 모든 부질없는 바쁨과 부지런에도 불구하고 끝내 행복하지 못한 것이 달라이 라마가 말한 대로 ‘우리 시대의 역설’이다. 그래서 단주를 제대로 하자면 처음에는 조금 긴 호흡으로 게으른 듯 느리게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신 정호 (연세 원주의대 정신과 교수, 강원알코올상담센터 소장)
무료 상담:   강원알코올상담센터   748-5119   www.alj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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