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급장애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침대생활 21년 박진희씨 “활동보조인 큰 도움”

지역내일 2010-09-03
장애인 활동보조지원제 … 1급장애인 22만명 중 대상자는 3만명 불과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죠.”
전라북도 익산에 사는 박진희(41·뇌병변 1급)씨는 올해로 침대생활 21년째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해맑은 얼굴과 오른손뿐이다. 23일 만난 박씨는 장기간의 마비로 강직화(뻣뻣해지는 현상)된 왼손을 오른손으로 주무르며 스포츠뉴스를 보고 있었다.

◆스포츠뉴스 즐겨보는 이유 = 그가 “나도 한 때 운동 좀 했다”며 웃는다. 박씨는 축구에 소질이 있었다. 익산의 축구명문인 이리고 축구부에서 왼쪽 공격수를 맡았다. 이리고의 간판 축구스타였던 고정운의 2년 후배란다. 1989년 그는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8개월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러나 “살아만 달라”고 기도하던 어머니 최옥자(67)씨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뇌병변 1급 장애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박씨는 4년만에 퇴원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라운드에서 뛰지 못한 아쉬움을 스포츠뉴스로 달래는 일 뿐이었다.
최씨는 박씨가 6살 때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다. 박씨가 침대생활을 하는 동안 맏아들과 막내 모두 장성해 집을 떠났다. 둘째 아들의 뒷바라지는 최씨의 몫이 됐다.
부족한 생활비와 치료비를 보태기 위해 보험영업에 뛰어들었다. 매일 아침 전화기를 아들 손에 쥐어주고 출근했다. “볼일이 급하다”거나 “아프다”며 박씨가 전화를 하면 일손을 놓고 부리나케 달려가는 ‘5분대기조’ 생활이 반복됐다. 아들을 남겨둔 채 여유로운 외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최씨는 지금도 허리디스크와 어깨통증을 치료하고 있다.

◆알맹이 없는 장애인복지법 =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중증장애인이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그 활동에 필요한 활동보조인을 지원할 수 있다’
최씨 모자의 생활이 한결 나아진 것은 2007년 4월 ‘활동보조인’ 지원을 규정하는 장애인복지법 55조가 신설되면서부터다. 원광지역자활센터 소속의 박화수(54·여)씨가 활동보조인으로 왔다. 동네에 ‘나쁜 소문’이라도 날까 보조원을 꺼리던 최씨는 살갑고 부지런한 박씨와 2달만에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박진희 씨는 새로 생긴 ‘이모’가 자신을 챙겨주는 동안은 어머니를 찾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최씨 모자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활동보조원이 하루에 근무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 5시간. 주말근무나 철야근무는 불가능하다. 박화수씨는 “더 일하고 싶어도 급여 결제 구조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현재 활동보조 수혜자는 32~80만원 수준의 비용을 바우처 형태로 지급받아 시간당 8000원을 보조인에게 결제한다. 주말, 밤 근무는 결제되지 않는다. 노인 방문요양 서비스 급여는 야간, 주말 모두 급여 가산율이 적용된다.
현재 장애인복지법 55조는 활동보조인의 존재 자체만을 규정한다. 수혜대상 수, 급여 등 구체적인 내용이 전무하다. 예산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는 보건복지부 장관의 지침이 있을 뿐이다.

◆서비스 필요한 20만명 =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9년 현재 국내에는 242만명의 장애인이 있다. 이 중 박씨와 같은 1급의 중증장애인은 22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명목상 활동보조서비스를 받고 있는 사람은 3만명에 불과해 박씨는 ‘행운아’에 속한다.
국민연금공단은 지난해 7월부터 6개월간 활동보조서비스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장애인 장기요양보장제도’ 시범사업을 1차로 진행했다. 하반기 중으로 계획된 2차 시범사업은 32~80만원 수준인 기존 바우처 급여에 방문간호와 방문목욕 급여를 20만원가량 추가하는 게 골자다. 1차 때 539명이었던 대상인원도 1000명까지 늘린다는 방침이다. 공단은 2012년부터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를 정식으로 시행키 위해 내년 준비예산으로 20억원을 확보해 둔 상태다. 그러나 이마저도 법제화가 되지 않으면 해를 넘길 가능성이 있다.
박씨는 “1차 시범사업 때 받은 방문목욕서비스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치과치료도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최씨는 “대통령이 친서민 정책을 편다고 하는데 장애인은 관심 밖인 것 같다”며 “장애인 활동 보조서비스가 더 확대돼야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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