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달입니다. ‘가정의 달’이라고 훈훈해하기보다는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아 가계부 걱정이 앞섭니다. 그중에서 으뜸은 자식 노릇 잘 해야 하는 어버이날입니다. 연세 들수록 서운해하시는 부모님 앞에서 잘 해봐야 본전, 못 하면 섭섭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십상입니다. 며느리, 딸, 아내, 엄마로서 1인 4역을 하자니 몸은 바쁘고, 엄마 노릇에 더 마음이 가다 보니 부모님 챙기는 데 소홀할 수밖에 없는 실정. 가끔은 자식 노릇에서 슬쩍 빠지고 싶으면서도 내 자식이 카네이션도 안 챙기면 나 또한 섭섭합니다. 자식과 부모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의 속내, 공유해볼까요?
지나친 딸 사랑은 이제 그만 VS
그래도 내 딸은 고분고분했으면
이아무개(46·서울 송파구 잠실동)씨는 친정 엄마와 같이 산다. 며느리가 분가하고 혼자 되신 어머니가 애처로워 자처했다. 같이 산 지 13년. 몇 년만 함께 살자 했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신세타령하는 엄마 때문에 분가하기가 어렵다. “효도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좀 벗어나고 싶어요. 내 나이도 머잖아 쉰인데 아직도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면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느냐며 자식 앞에서 꾸중하시고, 남편에게도 술 먹지 말고 일찍 다니라고 하시니 제가 미안하고 힘들어요.” 알아서 하니 그만하시라고 말하면 “다 너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딸이니까 말하지 남이면 안 한다”고 하신단다. 지나친 딸 사랑은 사절하고 싶다는 이씨.
하지만 그 또한 딸을 키우는 입장. 자신은 엄마의 간섭이 싫지만 올해 대학 들어간 딸이 “너무 간섭하는 것 아니세요?”라고 말하는 게 제일 듣기 싫다. 엄마가 간섭 안 하면 누가 하느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는 이씨는 모순이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하소연이다. “그래도 나는 내 딸이 쉰 살 될 때까지 그러지는 않겠다고 말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죠.”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그도 힘들다. 최선희(42·서울 용산구 이촌동)씨는 ‘네가 변했다’는 엄마 말이 세상에서 가장 싫다. 딸 셋 있는 집에서 둘째인 그는 엄마와 다정한 사이였다. “엄마는 늘 ‘너 때문에 산다’고 하셨어요. 아빠가 가부장적이고 할머니도 모시고 살았는데, 제가 보기에도 힘들어 보였거든요. 진심으로 엄마가 안돼서 착한 딸이 되려고 노력했죠. 엄마 마음 헤아려주는 딸은 저밖에 없다는 말을 늘 하셨어요.”
최씨가 이른 결혼을 하고 자녀도 셋을 두다 보니 일상이 바빠 엄마와 멀어졌다. 일흔이 가까운 노모는 전화를 걸면 ‘옛날엔 착했는데 요즘엔 제 자식하고 서방 챙기느라 쌀쌀맞고’로 끝을 맺는단다.
아직도 시댁 눈치 봐야 해? VS
너는 결혼해도 자주 와라
기 센(?) 시어머니 밑에서 7년 간 시집살이를 하다가 분가한 김미숙(45·서울 관악구 남현동)씨는 아직도 여행을 가려면 시댁 눈치를 본다. 돈 안 모으고 어디를 그렇게 다니느냐는 소리가 듣기 싫어 여행도 마다하는 김씨지만 속 편한 남편은 신경 쓰지 말라며 번번이 강행한다. 결혼한 지 20년이 돼가니 시어머니 말에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아직도 그에게 시어머니는 어려운 산이요 꾸중은 상처다. “여행 한 번 하려면 미리 가서 저녁 사드리고 용돈 드리면서 비위 맞춰야 하니 가도 스트레스고, 다녀오면 또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니 짜증 나죠. 그런 땐 정말이지 독하게 마음먹고 적당히 하시라고 대꾸하고 싶지만 말은 못 하고 2, 3주 시댁에 안 가요.”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시댁에 가지 않으면서 버티는 작전을 여러 번 썼는데, 한번은 아들이 “엄마 할머니한테 화나서 안 가는 거냐”고 묻더란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말 못 하고 있는데 아들이 “‘내가 봐도 엄마는 좋은 며느리인 것 같은데 할머니는 엄마한테 좀 심한 것 같다.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말이 위로가 되기보다는 ‘얘가 나중에 나한테 이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엄마는 너 결혼해도 분가시킬 것이고 며느리도 시집살이 안 시킬 거니까 너 자주 와야 해’라고 말했어요.” 나이 먹으면서 부모에 대한 책임감은 조금씩 떨어내고 싶지만, 자식에게는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 씁쓸했다는 고백이다.
왜 나만 챙겨! 다른 며느리도 있는데 VS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어!
유아무개(45·서울 용산구 이촌동)씨는 둘째 며느리지만 시댁에 경조사가 있으면 항상 맏며느리 노릇을 한다. 큰며느리가 여러 핑계를 대고 제사에도, 시부모 생신에도 잘 오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이 더 잘 번다는 이유로 돈 내는 일에도 앞장서고, 몸 바쳐 일하는 것도 앞장서다 보니 슬며시 화가 치민다. 더 화가 나는 건 자기 역할 제대로 안 하는 큰며느리에게는 쩔쩔매고 대접하면서 본인에게는 함부로 하는 것 같은 시어머니의 태도다. “원래 큰며느리는 제사를 모시기에 시어머니들이 어려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우리 형님은 제사 모실 분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시부모님들 돌아가셔서 제삿밥도 못 드실까 봐 제가 모실 각오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하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고, 어쩌다 형님이 오면 그렇게 좋아하시니 저도 안 가볼까 싶은 마음이 들어요. 하지만 내 아이들이 보고 배울까 봐 마음을 접죠. 아들만 둘이거든요.” 대신 두 며느리를 똑같이 대하리라 마음먹는다는 유씨의 말이다.
박미나(가명, 42·경기 고양시 주엽동)씨는 유씨와 반대라 불만인 경우. 너무 맏며느리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동서와 시어머니가 미워 반기를 들고 싶다. “솔직히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맏며느리니까 당연히 시부모 모셔야 하고, 명절에 앞장서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해요. 동서는 시댁에 늦게 가도 되고, 저는 조금이라도 늦으면 화내시니. 친척 경조사도 저는 꼭 가야 하니 저만 며느리냐고 소리치고 싶네요.”
하지만 자식에게 눈을 돌리면 상황이 달라진다. 아들만 둘을 둔 박씨에게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면서 큰아들이 “엄마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외국 가서 살거나 하면 누가 꽃 달아드리지?”라는 말에 “동생 있잖니?”했더니 둘째가 “어? 왜 부담 주고 그래. 나는 둘짼데. 형이 알아서 해”라고 말했단다. 순간 울컥해서 “너는 내가 안 키웠냐? 열 손가락 깨물어봐라, 안 아픈 손가락 있는지. 벌써부터 부모를 부담스러워해!”라고 소리쳤단다. 며느리 노릇은 슬쩍 미루고 싶고 친정 일도 오빠들에게 넘기고 싶지만, 자식들은 모두 도리를 다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깨달은 순간이다.
유병아 리포터 bayou84@naver.com
일러스트 홍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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