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이 만난 사람들-박창호, 이미화부부
“나의 뿌리라 그럴까요? 한국이 어디서보다 편안하더군요.”
97연변양꼬치 박창호, 이미화 부부
한 편의 대하소설 같은 격랑의 시간들
중국동포 박창호, 이미화 부부를 만난 순간 20세기 초 격랑의 세월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남편 박창호 씨가 풀어내는 선조들의 중국 정착기는 차라리 한 편의 대하소설. 증조부는 북한이, 외조부는 금산이 고향이라 했다. “석탄백탄 타는데 연기도 펄펄나구요, 이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 나네~” 술기운이 거나하게 도는 날이면 어김없이 외조부의 사발가 한 자락이 구슬피 흘러나왔다. 외조부의 사무치는 망향은 금산에 남아있던 친지를 찾게 했고, 그가 한국 땅을 밟는 계기가 됐다.
그의 얘기는 흥미진진한 개인사로도 이어졌다. “친지를 찾기 전인 92년, 한국에 가고 싶어 한국 상선을 탔어요. 한국행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 미국에 내렸지요.” 중국에서 살아 온 그에게 미국의 도시들은 상상 이상의 신세계를 보여주었지만 만연한 개인주의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한인 목사의 도움으로 7개월을 보낸 뒤 다시 연변행을 결심한다. 돌아온 그를 기다린 것은 유치원교사였던 부인 이미화씨와의 운명 같은 만남. 함께 차디찬 러시아로도 1년간 떠나 있었다. 97년 결혼을 했고 드디어 2002년 한국으로 오게 된다. “뿌리가 한국 사람이라 그럴까요. 그렇게 스쳐간 많은 나라들 중에 한국처럼 편한 곳이 없었어요.” 어쩌면 나고 자란 연변보다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씨도 가끔 연변에 가지만 금방 한국으로 나오고 싶어진다고 덧붙인다.
중국에서도 유명한 연변 요리의 참맛, 수원에서 그대로 재현해 내고파
이들에게서는 역경을 함께 헤쳐 가는 참 부부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들이 운영하는 연변양꼬치(031-202-1997) 앞에 붙은 숫자 97에서도 사랑이 전해져 온다. 결혼과 아이의 탄생으로 가족이 완성된,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해임을 상징한단다. 박씨는 “몸 약한 아내가 한국에 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힘들어 하는 아내를 위해 처음부터 뭔가 내 일을 하고 싶었지만, 작은 일에도 상당한 초기자본이 필요해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지난 일을 돌이켰다. 그는 자본마련을 위해 부인과 함께 친척의 가게에서 열심히 일했고, 거친 노동 현장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약속을 소중히 여기고 거짓을 멀리하는 생활신조 덕분이었을까. 마침내 그가 바라던 자신의 일을 하게 됐다. 중국내에서도 양고기, 냉면 등의 맛으로 유명한 연변 요리로 승부수를 띄운 것. 박창호씨는 연변의 참맛을 수원에서 그대로 이어가기를 원한다. 특히 훠궈탕(마라샤브)에 대해 전문화방안도 구상중이다. 지금은 샤브의 재료가 세트처럼 나오지만 자신의 입맛에 맞는 재료를 선택해 즐기게 하고 싶다고. 다시 찾은 고향에서 부부가 내디딘 힘찬 출발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음 하는 바람이다.
권성미 리포터 kwons02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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