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초기' 검색결과 총 9,846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미즈엔 뷰>당신의 불을 꺼뜨리지 마세요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미 꽤나 알려져 있는, 작자 미상의 시가 있다. 약 서기 130년 정도 쯤에 아메리카 대륙 남서부의 협곡에 나바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참으로 가슴 저린 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소년과 소녀. 소년의 이름은 우파시, 눈이라는 뜻이며, 소녀의 이름은 레이라, 바람이라는 뜻이다. 두 아이는 소꿉친구로 자라면서 마음 속 깊이 사랑을 키웠다. 그런데 어느 날, 이른 아침. 평원의 저쪽에서 천둥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메리카의 뉴멕시코 주둔군 사령관인 칼튼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의 말발굽 소리였다. 그들은 금을 위해 이곳을 점령한 것이다. 나바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집과 땅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바호 사람들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눈물로 걷는 머나먼 길’의 시작이다. 그때 우파시와 레이라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 뒤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서 다시 만나게 된 우파시와 레이라는 결혼을 했고 마을 사람들은 이 부부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었다. “지금, 두 사람은 새로운 불을 피운 것입니다 / 그 불이 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 당신들 두 사람은 이제, 사랑과 이해와 / 인생의 지혜를 나타내는 불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 불은 열과 식사, 온기를 가져다줍니다 / 또한 행복을 가져옵니다 / 이 새롭게 피운 불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새로운 인생과 새로운 가족을 / 그 불은 계속 타오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그것은 당신들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위의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외국 그림책의 내용이다. 나는 이 책의 번역을 마칠 늦은 새벽 즈음,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그렇게 가슴이 아픈 채로 일을 마친 적은 처음이었다. 그 이유는 두 남녀의 슬픈 인연 때문이다. 레이라가 아기를 낳고 죽자, 절망에 빠져 생을 포기하려는 우파시에게 레이라의 친구가, 생전의 레이라가 알려준 노래를 들려준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 그곳에 저는 없답니다 / 잠자고 있지 않답니다 / 천(千)의 바람으로, 천의 바람이 되어 / 저 넓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답니다 / 가을에는 햇빛이 되어 밭에 내리쬐고 / 겨울에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됩니다 / 아침에는 새가 되어 당신을 눈뜨게 하고 / 밤에는 별이 되어 당신을 지켜 줍니다 제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 거기에 저는 없답니다 / 죽지도 않았답니다 / 천의 바람이, 천의 바람이 되어 / 저 큰 하늘을 날아다닌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며, 나의 두 눈은 우파시처럼 젖어 들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고귀한 것에 대한 벅찬 열망이자 안타까움에 대한 가슴 저림이다. 나는 번역작업을 하면서 몇 번이나 나 스스로 우파시가 되었다가, 레이라가 되었다가 하면서 ‘눈물로 걷는 머나먼 길’을 밤새도록 걸었다. 겨울, 새벽, 고요… 그리고 2004년의 마지막 주간. 차가운 어두움의 적막을 휘감고 부는 문 밖의 바람도 레이라와 우파시의 영혼의 모습이던가! 저 바람 소리는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괴로운 이들의 심장이 흐느끼는 소리이던가!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앞둔 이 정신 사나운 시점에 무슨 죽음이니 눈물이니 심장이니 하는 거야? 하며 불쾌해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입도 다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나바호 사람들이 우파시와 레이라 부부를 위해 불러준 노래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우리의 불은 지금 어떠한가? 경제적 문제, 가족의 불화, 질병 등등으로 꺼져가고 있는 지도 모르는 채, 혹은 제 스스로 불을 꺼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 행복과 시작과 새로운 인생을 의미하는 그 불의 힘. 도대체 그 불이 당신의 어디에 있는지 기억은 하는지요? 혹, 그런 것이 나에게 있었던가 하고 당황스러워하는 것은 아닌지요? 2004-12-29
- “사귀던 사람 보증, 이별 후에도 책임지나” ‘남편 채무, 아내 변제의무 있나’, ‘이혼경력을 없애는 방법’, ‘직장상사의 폭행 어떻게…’ 인터넷 전문법률사이트 로마켓(www.lawmarket.co.kr)은 지난 2004년 한해 동안 제공된 법률상담사례 중 네티즌들의 관심이 가장 많았던 10가지 사례를 31일 발표했다. 로마켓은 실제 네티즌들의 상담 사례를 토대로 법적인 궁금증을 풀어줬는데 이 중 5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남편채무 변제의무 있나 = 몇 년 전 A씨는 남편이 보증금을 납입하고 사업을 하다 보증금을 잃고 사업에 실패해 이사를 했다. 남편 명의의 땅을 A씨 명의로 바꾸고 전세계약도 본인이름으로 했다. 하지만 채권자들이 계속 A씨와 남편을 찾고 있는 상황이다. A씨의 시어머니는 A씨 앞으로 돼 있는 땅이 압류당하지 않을까 해서 명의를 본인 앞으로 변경하겠다고 하는 상황이다. 이때 A씨 소유로 된 땅에 대해 압류 또는 소송이 들어올 수 있나. ▶ 법률분석 : A씨에게는 소송이 곧 들어오게 된다. 사해행위취소소송인데 남편이 채무를 진 상황에서 부동산을 A씨에게 넘긴 것이 채권자를 해할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송을 통해 명의를 다시 남편으로 돌려놓으려는 것이다. 남편의 명의로 돌려놓은 다음 압류가 가능하다. 시어머니 앞으로 명의를 바꿔도 상황은 마찬가지며 땅을 팔 경우 강제집행면탈죄에 해당돼 처벌받을 수 있다. ◆잠적한 채무자 어떻게 해야 하나 = B씨는 평소 알고지내던 사람에게 7000만원을 1년간 빌려주기로 하고 줬는데 기한이 지난지 1년이 지나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채무자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채무자의 다른 재산 역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B씨는 딸의 신용카드대출까지 받아 빌려줬으나 돈을 받지 못해 딸의 아파트까지 경매절차에 들어가게 됐다. ▶ 법률분석 :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먼저 민사절차를 밟아야 한다. 소송을 통해 채무자에게 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아내 재산에 대해강제집행하면 된다. 하지만 채무자의 재산이 없을 경우 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판결이 소용없어질 수 있지만 향후 집행가능성을 고려해 법원의 판결문을 받아놓는 게 우선이다. 또한 사기죄로 수사기관에 고소를 고려할 수 있다. 채무자가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갚을 능력이나 의사가 없으면서’ 일종의 허위사실을 말했다면 사기죄의 구성요건을 갖출 수 있다. ◆사귀던 사람의 보증, 헤어져도 책임지나 = C씨는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여자 친구와 사귀던 중 대환대출 보증을 섰던 C씨는 카드사에서 보증인을 바꿔주지 않는다고 하자 고민에 빠졌다. 카드를 돌려막기까지 하면서 여자친구에서 돈도 빌려줬는데 이마저 전혀 갚지 않는 상황이다. ▶ 법률분석 : 일단 보증을 섰다면 보증인으로서의 변제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다만 친구에게 빌려준 돈이 있다면 보증건과는 다르게 지급청구가 가능하다. 민사소송을 제기하거나 형사 사기죄로 고소하는 방법도 있다. 사기죄는 앞서 말했던 돈을 빌려줄 당시 상대방이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속였다면 해당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민사책임이나 형사책임을 추궁하기보다 빠른 합의를 도출하는 것(전액변제가 어렵다면 언제까지 변제하겠다는 증거, 일부씩 갚아나가는 방법 등)이 문제해결책으로 보인다. ◆이혼경력 없앨 수 있나 = 이혼한 D씨는 얼마 전 재혼하고 싶은 상대를 만났다. 상대방도 D씨의 이혼경력을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재혼 상대의 집안에서 반대할 것이 걱정돼 이혼경력을 삭제하고 싶었다. 하지만 D씨는 이혼 후 친정호적에 복적하지 않고 바로 분가해 이혼경력 삭제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법률분석 : 이혼경력을 없애는 방법은 남편 본적지에 이혼신고를 한 후 친정호적에 복귀한 여성의 경우 가능하다. 친정 호주명의로 호적등본2통, 전적신고서 2통을 제출해 친정호적 전체에 전적신고를 해 이혼경력을 삭제할 수 있다. 하지만 ‘전 호적’란에 이혼한 남편의 본적 및 호주이름이 기재돼 따라 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호적등본 2통과 분가신고서2통을 제출해 자기를 단독호주로 분가신고하면 이혼경력이 삭제된다. 하지만 D씨처럼 친가에 복적하지 않고 분가하면 호적에 이혼경력이 그대로 기재돼 다시는 삭제할 방법이 없다. ◆직장상사에서의 폭행, 산재인가 = 직장인 E씨는 업무시간 중 간단한 회의를 하다가 직장상사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이야기 도중 약간 언성이 높아지면서 E씨가 직장 상사에게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다가 욕설과 함께 당한 것이다. E씨는 업무시간에 직장에서 상사에게 폭행당했을 때 산재처리가 가능한지 궁금했다. ▶법률분석 : 업무상 재해는 산재처리가 가능하다. 업무상 재해는 법적으로 ‘근로자가 업무수행 중 그 업무에 기인해 발생한 부상, 질병, 신체 장애 또는 사망’을 뜻한다. E씨의 경우 업무수행 중이었고 직장상사의 폭행이 업무처리과정에서 있었던 것이라면 산재가 인정된다. 법원에서는 직장내의 인간관계 또는 직무에 내재하거나 통상 수반하는 위험이 현실화돼 폭행을 당한 경우 산재로 인정하고 있다. 1. 전세기간 중에 집주인이 바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2. 40대 주부의 음란채팅에 대한 판결을 보았습니다. 이 경우, 남편이 컴퓨터 옆에 녹음기를 몰래 설치하여, 부인이 음란 화상채팅에 빠져든 것을 확인했는데 이메일로 알게 된 배우자의 외도는 어떻게 하나요. 3. 출근 중 사고에 대한 보상 가능성 자가차량을 이용하여 출근중 중앙분리대를 받고 사망하였습니다. 보상 가능성이 어떻게 되나요. 4. 결혼식 전 혼인신고 먼저 취소 가능할까 5. 아이의 생년월일 바꿀 수 있을까요. ※답변은 로마켓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2004-12-31
- 2004년 희망을 밝힌 사람들- 케어인터내셔널 마가렛 하산 지국장 12월11일 저녁 수천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마가렛 하산의 영혼을 기리는 진혼미사가 올려졌다. 왕족도 아니고 유명한 정치가도 아닌 59세로 생을 마감한 마가렛의 진혼미사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것은 이라크에서 30년간이나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던 그녀의 아름다움 삶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마가렛 하산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1972년 영국에서 결혼하고 이라크인 남편과 함께 바그다드에서 살았다. 아일랜드, 영국, 이라크 3개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지난 30년동안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바그다드 빈민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왔다. 8년간의 이란-이라크전쟁과 1991년 걸프전 때에도 바그다드를 떠나지 않았고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속에서 바그다드 난민촌을 지켰다. 지난 12년간은 국제구호단체 케어인터내셔널의 바그다드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사재를 털어 식수정화시설을 만들고 돈 없는 사람들의 의료비를 지원했다. 또 병원에 입원한 어린이들의 음식물도 제공했다. 마가렛이 나타나면 아이들은 달려와 그녀를 껴안으며 “마가렛 여사님”이라고 불렀으며 바그다드 빈민가 사람들은 그녀를 “베스트 프렌드”라고 불렀다고 BBC는 전했다. 마가렛은 이라크전쟁을 막기 위해 유엔안보리와 영국의회에서 연설을 하기도했다. 그녀는 1991년 걸프전 이후 취해진 유엔의 경제제재조치로 인해 이라크 국민들이 겪고 있던 고통을 전하면서 “이라크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최악의 상황이다. 또 다시 이라크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이라크 국민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지난 10월19일 아침 7시30분 여느 날처럼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길에 경찰복장을 한 무장세력들에게 납치됐다. 납치된 후 몇 시간 만에 알자지라 TV를 통해 그녀의 피랍소식이 전해졌다. 남편 알리 핫산은 물론이고 영국과 아일랜드의 총리가 나서서 그녀의 석방을 요청했다. 또 마가렛의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나서서 마가렛을 석방하라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11월16일 그녀의 살해 장면을 담은 한편의 비디오가 가족들에게 전해졌다. 마가렛의 죽음이 알려지자 그녀의 동료들은 “가난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던 강철같은 여인, 그러나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삶을 다 바쳐 바그다드의 빈민을 돕던 따뜻한 가슴의 여인이 끝내 전쟁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고 애석해했다. 웨스트민스트 대성당의 코맥 머피오코노 대주교는 “마가렛은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도 사랑의 실천을 우리에게 보여준 고결한 순교자”였다고 추모했다. 김광호 리포터 holhol@naeil.com 2004-12-27
- 세계의 크리스마스 ‘내식대로’ 독일, 붉은색 코카콜라산타 배격 만델라 선물받으려 7만5천명 몰려 남반구에선 윈드서핑 크리스마스 올해 크리스마스는 서구 기독교문화권 중심의 종교적 색채를 벗어나서 세계의 각 지역마다 자기식의 축제로 바꿔가는 흐름이 두드러진다. 앵글로색슨형 예수가 사실은 흑인이었다는 주장, 유전자 분석을 통해 산타클로스가 황인종이라는 학설, ‘다빈치코드’라는 소설을 통해 예수의 결혼과 혈통에 대한 ‘반기독교적 해석’의 확산, 예수의 수행이 인도에서 이뤄졌다는 주장 등 정통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는’ 기류가 퍼졌다. 여기에 이라크전쟁을 통해 이슬람문화권과 충돌이 지구촌을 불안하게 만들자 평화의 축제인 크리스마스에서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탈종교화와 문화권에 따른 다양화 경향이 강해졌다. 영국의 한 연구팀이 유전자 분석을 통해, 산타클로스는 터키계의 황인종이라는 사실을 최근 발표하면서, 동시에 산타클로스의 붉은색 복장은 1951년 코카콜라의 브랜드를 이미지화한 것이라는 지적이 일었다.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한 듯 한국의 도심복판에 연두색 산타복장이 등장했다. 전나무에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는 전통은 8세기경 독일에 파견된 선교사 ‘오딘’이 떡갈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 풍습을 중지시키기 위해 옆의 전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라’고 설교한데서부터 비롯됐다. 노르웨이가 2차대전때 크게 도와준 데 대해 고마움의 표시로 매년 영국에 만들어 보내주는 정통크리스마스트리는 전나무로 꾸며진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 대신 크리스마스보트를 장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정통교리’인 크리스마스트리 대신 그리스는 그리스정교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불교의 나라 태국이나 이슬람 문화권 등에서는 붉은색 산타복장을 정통 크리스마스 스타일이 여전하다. 한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대통령 만델라는 1990년 이후 매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파티를 열어왔는데 올해에는 예년보다 세배나 많은 인파가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애초 2만명을 예상했으나 7만5천명이 몰렸다.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 행사는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너무 오래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배고픔과 더위로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또 ‘미국식 산타클로스’ 배격운동이 한창이다. 일부 지방의회는 주민들로부터 “의회의 이름으로 미국식 산타클로스가 완전히 허구임을 선포하라”는 요구를 받고 끙끙대고 있다. 미국풍의 산타는 사기이며 이를 독일의 전설속 영웅인 세인트 니콜라스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고 청원이 2개주에서 진행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1951년 코카콜라의 이미지를 차용한 산타클로스를 맨 처음 디자인한 사람이 독일계 미국인 토머스 나스트로서, 그는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마스코트를 설계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름철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낼까. 남반구인 호주는 12월말이 무더운 여름이다. 겨울바람도 없고 하얀 빙설은 더더욱 없다. 호주의 크리스마스는 거리 곳곳에서 땀에 흠뻑 젖은 젊은이들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아이들, 그리고 백화점에 정성들여 설치한 인조 겨울풍경, 눈꽃으로 덮인 크리스마스트리와 빨간 복장의 산타클로스까지 어우러져 독특한 크리스마스 풍경을 만들어낸다. 윈드서핑은 호주 크리스마스의 특징이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로 윈드서핑용 보드가 꼽힌다. 크리스마스 밤에는 음료수를 들고 삼림속에 모인다. 돌로 쌓은 노천 가마솥에 마른 나무로 불을 피고 철판을 매달아 그 위에 소세지, 소고기, 생선 등을 구워 먹으며 노래 부르고 캥거루 댄스를 즐기며 깊은 밤을 맞는다. 술에 취하고 명절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은 풀밭에 그대로 드러누워 코를 골며 산타클로스를 기다린다. /리포터 종합 2004-12-23
- 내식대로 즐기는 세계의 크리스마스 독일, 붉은색 코카콜라산타 배격 한국서도 연두색 산타 등장 만델라 선물받으려 7만5천명 몰려 올해 크리스마스는 서구 기독교문화권 중심의 종교적 색채를 벗어나서 세계의 각 지역마다 자기식의 축제로 바꿔가는 흐름이 두드러진다. 앵글로색슨형 예수가 사실은 흑인이었다는 주장, 유전자 분석을 통해 산타클로스가 황인종이라는 학설, ‘다빈치코드’라는 소설을 통해 예수의 결혼과 혈통에 대한 ‘반기독교적 해석’의 확산, 예수의 수행이 인도에서 이뤄졌다는 주장 등 정통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는’ 기류가 퍼졌다. 여기에 이라크전쟁을 통해 이슬람문화권과 충돌이 지구촌을 불안하게 만들자 평화의 축제인 크리스마스에서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탈종교화와 문화권에 따른 다양화 경향이 강해졌다. 영국의 한 연구팀이 유전자 분석을 통해, 산타클로스는 터키계의 황인종이라는 사실을 최근 발표하면서, 동시에 산타클로스의 붉은색 복장은 1951년 코카콜라의 브랜드를 이미지화한 것이라는 지적이 일었다.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한 듯 한국의 도심복판에 연두색 산타복장이 등장했다. 전나무에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는 전통은 8세기경 독일에 파견된 선교사 ‘오딘’이 떡갈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 풍습을 중지시키기 위해 옆의 전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라’고 설교한데서부터 비롯됐다. 노르웨이가 2차대전때 크게 도와준 데 대해 고마움의 표시로 매년 영국에 만들어 보내주는 정통크리스마스트리는 전나무로 꾸며진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 대신 크리스마스보트를 장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정통교리’인 크리스마스트리 대신 그리스는 그리스정교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불교의 나라 태국이나 이슬람 문화권 등에서는 붉은색 산타복장을 정통 크리스마스 스타일이 여전하다. 한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대통령 만델라는 1990년 이후 매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파티를 열어왔는데 올해에는 예년보다 세배나 많은 인파가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애초 2만명을 예상했으나 7만5천명이 몰렸다.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 행사는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너무 오래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배고픔과 더위로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또 ‘미국식 산타클로스’ 배격운동이 한창이다. 일부 지방의회는 주민들로부터 “의회의 이름으로 미국식 산타클로스가 완전히 허구임을 선포하라”는 요구를 받고 끙끙대고 있다. 미국풍의 산타는 사기이며 이를 독일의 전설속 영웅인 세인트 니콜라스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고 청원이 2개주에서 진행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1951년 코카콜라의 이미지를 차용한 산타클로스를 맨 처음 디자인한 사람이 독일계 미국인 토머스 나스트로서, 그는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마스코트를 설계한 사람이기도 하다. 2004-12-23
- <밥일꿈>안전하고 싼 보육시설 확충해야 (경 규 은 2004.12.23) 안전하고 싼 보육시설 확충해야 경 규 은 생명보험협회 홍보부 대리 이지러지게 흩날리던 첫눈을 본 지도 꽤 되었다. 기상관측을 시작한 1907년 이후 처음으로 지난 11월 한 달 동안 서울 기온이 한번도 영하로 떨어지지도 않았고, 겨울도 한 달 이상 짧아질 거라는 보도도 있는데, 갈수록 겨울이야기는 추억이 되어 가는가 보다. 나는 결혼 9년차로 맞벌이를 하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인 8살 딸과 5살 아들을 두고 있다. 회사에서 홍보업무를 맡고 있는데 평소 출근시간이 이르고 귀가시간도 늦은 편이다. 사정이 이런지라 미안하게도 애들 양육은 전적으로 엄마 몫이 되어 왔다. 집사람은 다행히도 중학교 영어교사라 내가 힘든 가운데에도 직장일과 부모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큰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불거지게 되었다. 전에는 집사람이 합숙연수라도 갈라치면 시골의 어머니에게 맡기기라도 했는데, 이제는 학교를 안 보낼 수도 없고 그 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은 내가 그 역할을 해야 됐다. 지난 3월 일주일 연수 때는 여름휴가를 미리 당기고 어찌어찌해서 잘 넘겼다. 그리고 지난 7월 집사람에게 한달 짜리 캐나다 연수가 나왔을 때는 앞이 캄캄했다. 호기 있게 여기 일은 다 잊고 잘 다녀오라며 집사람을 떠나 보냈지만 사연 많은 한 달을 보냈었다. 말 그대로 아침에 눈떠서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전쟁이 따로 없었다. 다행히도 평소의 출근시간을 30분 정도 늦추고 대중없던 퇴근시간도 저녁 6시로 맞추니 어떻게든 아이들 뒷바라지할 수 있는 시간은 확보되었다. 기특하게도 8살짜리 큰딸이 동생 유치원 버스 태워주는 일부터 나중에 집에 데려오는 일까지 맡아 주어 큰 힘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힘이 들고 몸은 피곤했지만 많은 걸 생각하고 반성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애들 엄마가 직장 다니랴 애들 뒤치닥거리하랴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해할 수 있게도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주말에 가사일 돕는 정도를 가지고 무척이나 생색내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물론 그 중에도 가장 큰 수확은 애들이 아빠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빠가 제일 좋다는 말을 연발하고 아빠 옆에서 자려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면 그게 제일 큰 보람이자 행복이었다. 이번 달에도 집사람이 2박3일 연수가 또 있다. 다행히도 휴가가 남아 있어 그걸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나 같은 처지의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할까”하고. 딱히 애들을 맡아줄 사람도 없는 경우, 보육시설도 정해진 시각에는 문을 닫으니, 부모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안전하고도 싼 보육시설이 꼭 있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워낙 국가적으로 시급한 일이 많아서 이런 건 소소한 문제일까. 2004-12-22
- <경기도 사람들>안산경찰서 포돌이야구단 “직장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맘껏 풀고 직원들간 우애와 친목을 다지죠. 승패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안산경찰서 포돌이야구단 단원들이 매주 일요일 반월공단에 위치한 안산시야구장으로 모이는 이유다. 지난 2001년 8월 경찰서 내 동아리 활동으로 출범한 포돌이야구단은 현재 25명으로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로 안산지역 사회인야구 2부리그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다. 안산리그는 매년 4월부터 11월까지 각 팀별로 모두 14게임을 치른다. 한 달에 한두 번 게임을 하는 셈이다. 경기 일정이 없는 주말에는 다른 경찰서 야구팀과 친선시합을 벌인다. 안산서 포돌이야구단은 모두 15개 사회인야구팀 가운데 비선수 출신들로 구성된 2부리그에서 올해 5승 9패로 중간 정도의 성적을 냈다. 팀 총무를 맡고 있는 반재훈(30) 순경은 야구가 좋아 안선서에 지원한 야구광이다. 어릴적 꿈이 야구선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신임순경시절 현장실습을 안산서에서 하게된 그는 마침 사회인 야구리그가 만들어진다는 말을 듣고 안선서로 지원했다. 야구경기에는 가족들도 함께 참여한다. 이날 경기에 응원나온 반 순경의 부인 이연주(33)씨는 결혼 전에는 야구에 ‘야’ 자도 몰랐다고 한다. 남편을 따라 응원을 하다보니 이제는 몰랐던 야구 규칙을 훤히 꿰뚫을 정도다. 팀 내 최고참인 송우상(33) 순경은 “야구는 팀웍이 생명인데 야구를 하다보니 팀원들간 융화가 잘 되고 특히 근무하는데 있어 애로사항 등을 서로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 형제 같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는 또 “가족들도 함께 참여해 응원을 하다보니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 이해도 많이 하고 이제는 서로 애경사를 챙겨줄 정도로 친해졌다”고 말했다. 팀 막내이자 투수인 정성윤 순경은 주무기가 낙차 큰 슬러이더다. 활동한지 올해로 1년째라는 그는 “투수는 정신적인 면에 중요한데 고참들이 많은 격려를 해 줘 든든한 힘이 된다”고 말했다. 안산서 포돌이야구단은 내년부터 매달 둘째 넷째 쉬는 토요일을 이용해 시흥, 광명, 부천남부, 부천중부, 용인경찰서 직원들간 리그전을 벌일 계획이다. /안산 김장환 기자 polkjh@naeil.co 2004-12-19
- <이 사람>임수경 방북사건 ‘간첩’으로 엮여 10년간 고국에 못 왔던 어수갑 씨 ‘얼굴이 희고 안경을 낀 지적인 스타일의 미남형’. 출판기념회 직전 만난 어수갑씨는 20대 후반에 한국을 떠났다 돌아와 거의 20년만에 만난 친구들로부터 젊어보인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외국에서 오래 살면 시간이 정지되는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애늙은이’가 아닌 ‘늙은 애’랄까. 그건 뿌리 뽑혀서 살아가는 해외동포들이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봤지요.” 그는 인터뷰 내내 ‘뿌리 뽑혔다’는 표현을 많이 썼다. 해외에서의 삶은 뿌리가 뽑히거나 가지가 절단되어 제 몸을 통해 여과된 수액을 빨아들이지 못하고 잘라진 부분으로부터 거칠고 생경한 물을 받아들이는 식물과 다를 게 없다는 말도 했다. 1989년 북한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석하러 가는 길이던 임수경을 동베를린 공항에서 ‘받아’ 집에 데려가 된장찌개, 깍두기에 밥을 차려주고 옷가지를 챙겨 다시 공항에 데려다주기까지 같이 한 4시간. 그 4시간은 그의 뿌리를 강제로 들어내고 삶을 통째 뒤흔들어놓고 생각도 못했던 오랜 기간 동안 외국 땅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그를 묶어놓은 족쇄가 됐다. 안기부는 그가 반국가단체 주요 종사자이며 간첩보다 한 수 위인 ‘공작원’이라고 발표했다. 기소중지 상태의 간첩으로 고국 땅에 돌아올 수 없었던 동안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남산에 끌려가 모진 수모를 당한 끝에 심장병을 얻으셨다. 그 와중에 혼기를 놓친 여동생은 지난봄에야 마흔 넘은 나이에 결혼했다. 한국에 돌아갈 길이 막히면서 암담해진 미래, 인간에 대한 실망, 고립과 무력감과 좌절로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의 기억은 올해 봄, 소설가 공지영씨가 발표한 의 소재가 된 바 있다. 그가 서슴없이 ‘지옥’이었다고 회상하는 시절, 이혼 후 혼자 키우던 초등학생 아들과 베를린의 가장 가난한 동네, 구석진 방 한 칸에서 절망과 외로움을 짓씹으며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 때 그를 살려낸 건 신앙의 힘이었다. “절망의 나락, 더 이상 내려갈 데 없는 밑바닥까지 가보니 비로소 희망의 물을 다시 길어낼 수 있었습니다.” 운동이라는 틀을 버리고 사회주의 사상이 전제하는 ‘인간에 대한 낙관’을 완전히 털어내자,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보였다. 가톨릭 사회복지단체인 카리타스에 노인 간병인으로 일하러 갔을 때 계약서의 1조항이 유난히 그의 눈을 잡아끌었다. ‘이웃 사랑에 대한 확실한 신념과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볼품없이 쭈그러든 몸을 씻어주고 아무리 아파도 낮에는 깨끗한 복장을 하고 싶어 하는 노인들에게 나들이옷을 갖춰 입혀 잠시 동안이나마 의젓한 어른의 모습으로 있게 해주는 일을 6년 동안 계속했다. 그 6년은 허공에 뜬 관념으로 인간과 사회를 이해했던 지식인 시절을 반성하고 현실에서 출발하는 운동과 사회 변혁에 대해 눈떴던 시기였다.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상이 바뀌어지는 것이라는 깨달음, 인간의 남루하고 결함투성이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게 된 변화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동안 “평범하지만 오직 하나 가진 장점은 착한 사람”인 아내 ‘들몰댁’을 만나 오순도순 살가운 가정도 꾸렸고 아들은 올해 가을에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을 떠나있었던 18년간의 부재증명, 상처와 치유의 기록”이라고 말하는 책 (휴머니스트)를 통해 그는 이제 과거의 기록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했다. 출판기념회 다음 날 그는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빠른 시일 안에 돌아와 한국 땅에 뿌리내리고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열어가겠다는 약속을 남겨둔 채. /오진영 기자 ojy@naeil.com | 사진 이의종 기자 2004-12-16
- 법원행정처 전문통역관 1호 홍지숙 통역사무관 “새로운 재판을 시작할 때마다 한참 낮은 곳에 내려가 새롭게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법원행정처 국제담당관실 전문통역인 1호 홍지숙(사진) 사무관. 2002년 4월 제1회 법원행정처 전문통역사 시험에 합격한 이후 그는 전문통역인이라는 새로운 직역을 개척해왔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법정통역 의뢰를 받을 때마다 도전과 긴장의 자세를 늦추지 않는다. 최근에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기소된 존 험프리 항소사건을 맡으면서 1심 판결과 사건자료를 모두 다 찾아 읽었을 정도다. 그가 하는 일은 법정에서 영어로 말하는 외국인 피고인이나 증인들 진술내용을 재판부에 전달하는 것. 혹은 반대로 재판부나 검사 등의 신문내용을 영어로 동시 통역하는 일을 한다. 두 언어사이를 넘나들며 어려운 법률용어가 섞인 문장들을 즉석에서 자유자재로 소통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첫 사건을 맡은 날을 그는 잊을 수 없다. 재미교포 마약사건을 맡았는데 며칠을 준비했지만 재판정에 선 것도 처음인데다 생소한 용어가 난무하는 증인들의 발언속도는 너무나 빠르기만 했다. “통역이란 듣자마자 내용을 파악하고 다른 언어로 나가야 되는데 생소한 법률용어가 100% 이해가 안되니까 곧바로 통역이 안되는 거예요. 이해하기 위해서 20초 정도 뜸을 들였는데, 그 짧은 공백기간 동안 등에 식은 땀이 쫘악 나더군요.” 홍 사무관은 세간의 관심을 끄는 굵직굵직한 사안에 많이 관여했다. 지난해 ‘캔지노리스 슈나이더 사건’과 ‘수지 김 사건’과 올해 친어머니가 손가락을 잘라 재판부에 보내면서 유명해진 일명‘단지사건’등에서 외국인 증인신문을 맡기도 했다. 그는 “느끼는 것을 떠나서 증인이나 피고인의 발언을 그대로 재판부에 전달하는 것을 통역의 기본 원칙으로 한다”며 “얼굴에 표정이 나타나면 그 것도 재판부에 전달이 되기 때문에 감정콘트롤에도 주의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호텔경영학으로 석사를 받은 후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전임강사 2년을 한 뒤 뒤늦게 통역대학원에 들어가면서 전문통역인의 길을 걷게 됐다. 법원행정처에 출근한 이후 2년여동안 업무를 익히기 위해서 야근을 밥먹듯이 했다. 결혼한 여자의 몸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단련의 과정이었다. 그는 “힘들 때마다 남편과 아이의 든든한 후원이 힘이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박정미 기자 pjm@naeil.com 2004-12-16
- 인물초대석-장애인과 더불어사는 ‘나눔의 집’ 박창진 목사 경기도 포천의 한 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장애인 시설인 ‘나눔의 집’. 밖에서 볼 때는 분명 축사(畜舍)다. 안으로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방주인들이 고개를 내민다. 낯선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나 경계의 눈빛은 찾아볼 수 없다. 축사지만 사람의 따뜻한 온기가 돌았고, 평온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내부 구조를 살펴보니 이 집 주인이 소(牛)였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장애인과 함께 할 운명 천정과 벽 사이는 비닐로 여러번 둘러 차가운 겨울바람에 대비했다. 방은 외양간 벽을 이용해 만들었다. 이곳 장애인들은 지도교사가 없으면 생활이 어렵다. 특히 중증 장애인들은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이곳의 짱(?)은 박 창진(47) 목사. 박 목사 역시 두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다. 박 목사는 2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난 후 두 다리를 못 쓴다. 5살에는 팔까지 못쓰게 됐고, 얼마 안가 입도 돌아갔다. 그러다 6살 때 손이 조금씩 움직였고, 7살에는 혼자 밥도 먹었다. 박 목사는 두 손을 돌려준 하느님께 감사했다. 우연한 기회에 중증 장애인을 만났고, 돌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난후 매일 이 장애인을 찾아 정성을 다했다. 식사부터 대소변을 받아내는 모든 일이 박 목사 몫이었다. 박 목사는 “심한 악취에 등을 살펴보니 욕창이 심해 구더기가 등을 다 파먹었더라고요. 끝내 그해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죠. 혼자 힘으로는 불가항력 이었습니다” 잠시 박 목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박 목사는 장애인에 대해 관심이 깊어갔고, 사회의 따뜻한 정성과 관심만이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92년에 방배동 신학교를 다녔고 96년 목사안수도 받았다. “외양간이 보금자리” 88년도에 구로동 직업재활센터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을 했다. 박목사는 “혼자만 잘 사는 것 같고,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며 “다시 장애인들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90년 4월 20일 장애인의날을 시작으로 ‘나눔의 집’이 문을 열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 하천변에 움막을 세웠다. 버린 원두막을 합판으로 막고 비닐을 쳐 숙소로 사용했다. 이곳에서 8개월 된 자식과 아내, 장애인 3명과 함께 고난의 길이 시작됐다. 전기도 없고 물은 하천에서 길어다 먹었다. “이상한 것은 식구가 자꾸 늘어나는 것입니다. 움막을 좀 더 넓혀 비닐하우스를 만들었습니다. 장애인 시설로 소문이 났고, 자고나면 비닐천막 앞에 장애인이 뒹굴고 있는 겁니다. 몰래 놓고 가버린 거죠. 식구가 30명 넘게 늘어났죠.” 박 목사는 “94,96,98년도에 큰 물난리로 집이 떠내려갔다. 특히 96년에는 하루에 500mm가 넘는 큰 홍수로 하천 둑이 무너져 집을 덮쳤다. 비닐하우스와 식구들이 물에 떠내려갔고, 소방헬기와 구조대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박 목사 식구들은 재건축(?)에 나섰다. 주인이 떠내려간 빈집(돼지우리)에 비닐로 하늘을 가렸다. 그러나 안식처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뿐. 2000년에 남양주시로부터 철거하라며 경고장이 날아왔다. 이유는 불법건축물이라는 것. 관에서는 이곳이 그린벨트 지역에다 정부와 군부대 소유의 땅이라며 박 목사 등을 떠밀었다. 갈 곳 없는 이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나눔의 집 식구들은 “감리교회에서 경기도 현리 용두동에 있는 수양관을 빌려줬다. 너무 고마워서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그해 10월까지 수양관에서 생활한 이들은 한 중소기업 사장의 도움으로 지금 나눔의 집인 포천에 둥지를 틀었다. 박 목사는 “우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도 했지요. 짐승처럼 살면서 용하게도 겨울을 네 번이나 넘겼습니다. 애완견도 우리보다 잘먹고 잘살지 않습니까?” “그래도 세상은 따뜻한 사람들이 있어 행복하다”며 웃음을 보였다. 명절에도 발길 끊겨 지금 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은 소가 주인으로 있었던 외양간이다. 박 목사는 이곳에서 32명의 장애인과 함께 생활한다. 박 목사는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관심은 사회복지쪽에 더 많다. 문제는 지금도 이곳에 들어오려는 장애인들이 줄을 선다. 매일 문의전화나 가족이 직접 방문한다. 박 목사의 웃음 뒤에 어두운 그림자가 보인다. “사실 버틸 힘이 없다. 겨울나기가 겁난다. 여름은 그렇다 해도 겨울 난방비와 식량이 문제다. 아파도 돈 없으면 병원에 못간다. 김장철이 지난 후 밭에 버려진 야채도 주워다 먹기도 했다(쓴 웃음)” 다행인 것은 전남 목포에 있는 동아인재대학에서 강의를 해 버는 수입으로 부족한 재원을 충당한다. 요즘은 이곳 나눔의 집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어려운 경제현실이 이곳까지 영향을 미친것일까. 지난 추석 연휴 3일 동안 찾아오는 손님(?)이 단 한명도 없었다. 자원봉사활동 나오는 학생이나 직장인들도 거의 없다. 비 인가시설이다 보니 확인서 인정을 안해주기 때문이다. 박 목사는 정부정책의 불합리한 내용을 조목조목 열거한다. 까다로운 규제와 조건이 벼랑끝으로 내몰아 사회복지 법인 인가를 받으려면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 신규건물일 경우 블록이나 조립식 건물조차도 대상에서 제외다. 비닐하우스는 아예 꿈도 못 꾼다. 벽돌로 지어야 하고, 규모는 한 사람당 6.8평에 건축비도 평당 300만원 이상 되어야 한다. 나눔의 집이 이러한 조건을 갖추려면 6억원이 넘는 돈이 있어야 사회복지 법인 신청이 가능하다. 외양간을 고친 이곳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2년 전 충남 천안의 비인가 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한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비인가 시설에 대해 대대적인 정비에 나섰다. 보건복지부는 2005년 7월까지 규정을 갖춰 신고하지 않을 경우 철거한다는 방침이다. 정부의 이러한 요구는 하루하루 연명하는 영세한 장애인시설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나눔의 집 식구들도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내년 7월에 불편한 몸뚱이를 끌고 또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정부의 지원과 시설 양성화, 까다로운 행정규제를 푸는 것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식 욕심이 많은 박 목사는 자식을 5명이나 두었다. 아들 둘에 딸이 셋이다. 고 3과 2학년인 두 딸은 5살에 입양했다. “외양간이면 어떻습니까. ?겨나지 않고 이곳에서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는 게 꿈입니다” /포천 전호성기자hsjeon@naeil.com 2004-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