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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과거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일제시대와 해방후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남은 유산을 청산하려는 노력이 본격화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그중에서도 6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역사와 그 과정을 함께 했던 이들의 삶과 정신을 되새기려는 노력을 해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2대 이사장으로 부임한 함세웅 신부를 만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대해 소개해달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2001년 여야합의에 의한 법률에 근거해 설립됐다. 그동안 몇몇 뜻있는 분들이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이를 좀 더 체계화하고 국민들의 합의를 얻으면서 진행하기 위해 국가차원에서 만든 단체다. 사업회의 중요한 내용은 ‘기억과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단체명에도 ‘기념’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는 과거 60~70년대와 80년대 민주와 자유를 위해 노력하고 희생했던 분들의 고귀한 삶을 기억하자는 것과 그 삶을 현재화해 미래로 이어주는 계승작업을 하자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민주화운동과정에서 발생한 사건들 또 그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몸바친 의인과 열사들, 이름없이 사라져간 민중들의 발자취를 찾아 민족정신을 이룩할 수 있는 기념탑을 세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어떤 사업을 해왔나 기념사업은 작게는 민주화운동, 넓게는 그 과정에서 희생됐던 모든 의인들과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국민들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민주화운동 역사를 알리기 위한 전국 순회 역사전시회,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연구 및 교육사업, ‘역사 다시읽기 시리즈’, ‘역사다시보기 시리즈’, ‘시대불꽃’ 등 교재 발간, 민주화운동 유적지 발굴조사사업 등을 해왔다. 또 민주화 운동사를 영어로 번역해 해외로 알리는 한편, 민주화운동에 도움을 주신 해외 인사 초청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기념회 사업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앞으로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참여형’ 기념사업이 되도록 준비하고 있다. 특히 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 특히 6·10항쟁때 이른바 ‘넥타이부대’라 불리웠던 민주시민들까지 다시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생각이다. 기념관 건립사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또 기념관 건립의 의미는 무엇인지 말해달라. 아직 계획단계로 전문가들 중심으로 자료는 정리된 상태다. 3~4월부터 실무자를 구성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동안 민주화를 위해 애쓰셨던 여러 분야의 원로와 중진 또 젊은층까지 포함하는 범국민추진위원회를 구성하려 한다. 또 여러 위원회를 만들어 이들이 각자 분야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물론 기념관 건립사업의 필요성에 대해 국민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부지선정 문제, 포괄해야하는 민주화운동 개념 설정 문제 등 넘어야할 산이 많다. 우선 기념관 건립에 대해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널리 알리고, 국민들의 뜻을 모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4·19 민주혁명투사들, 그리고 5·16 이후 민주화운동에서 애쓰신 분들의 정신이 가시화될 수 있는 기념관을 만들어 살아있는 역사체험장이 되도록 하겠다. 기억이란 시공간을 넘어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농축을 의미한다. 기념관 건립은 체험을 통해 과거를 현재화시키고 이를 통해 아름다운 미래를 선취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료정리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 사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오늘날 사료라고 판단될 수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있는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자료를 갖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도 많은 개인과 단체들이 기증 해주어 지난해말까지 기증 건수는 개인이 해외 거주자 32명을 포함해 257명, 단체 63곳 등 총 320건에 달했다. 수집된 사료도 총 43만건, 900만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사업회는 이렇게 모아진 자료를 효율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 사료보전시스템 구축사업을 진행해왔다. 지난 11일부터 1차로 민주화운동 자료 원문을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60~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나온 각종 성명서, 단체 활동 기록을 중심으로 한 회의록, 고문서 등으로 8만3000여건 116만쪽에 달하고 있다. 김상진 열사,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 결성, YH노동조합, YWCA위장 결혼 사건, 사북광산노동자투쟁 등 국내민주화운동 관련 자료 뿐 아니라 재미한인구국동지회의 유신반대 성명서 등 당시 해외에서의 벌어진 민주화운동과 연관된 자료들까지 망라하고 있다. 사업회 활동을 하면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시대의 어려움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한쪽에서는 민주화 보상이 이뤄지고 대통령 직속 의문사 진상위원회가 설치되는 등 과거사 정리운동이 진행되는 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화 인사를 탄압했던 당사자들이 정치권과 사법부, 검찰, 경찰 등 각 영역에 엄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게 보수언론이다. 일제와 독재시대 권력 앞잡이 노릇을 했던 보수언론들이 오히려 민주화 세력을 공격하고 있다.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 이룩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보수언론이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도 마찬가지다. 한쪽에는 긍정적인 동력이 있는 반면 이를 방해하는 세력도 엄존하고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 설득하고 교육하고 꾸짖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자유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분들이 힘을 모아가면서 기념사업을 추진하려 한다.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지, 또 남은 과제가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나 연단위로 보면 당위적 진전이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10년 단위로 본다면 기적에 가까운 변화가 있었다. 단적인 예로 70~80년대만 해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불법으로 몰렸는데 지금은 대통령이나 공직자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비판할 정도로 자유가 보장돼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책임을 동반한다. 때로 방종과 남용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특히 과거 정권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역사 앞에서 반성해야한다. 민주화 운동도 과거 초심이 잊혀지면서 지나치게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 중심으로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특히 90년대 이후 청년들이 너무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다. 희생 헌신 공익의 가치를 망각하고 있다. 과거 어려울 때 가졌던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끊임없이 일깨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해야한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순국선열은 물론 4·19 희생자들, 60년대 이후 민주화를 위해 애쓰셨던 선배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되새겼으면 한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도 이분들의 고귀한 가치가 생생하게 기억되고 현실에 뿌리내려 미래의 더 큰 창조적 가치로 승화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민주화라는 고귀한 삶의 가치와 열매를 모든 국민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2005-01-28
- “민주화 고귀한 가치, 온 국민이 공유해야” 과거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일제시대와 해방후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남은 유산을 청산하려는 노력이 본격화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그중에서도 6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역사와 그 과정을 함께 했던 이들의 삶과 정신을 되새기려는 노력을 해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2대 이사장으로 부임한 함세웅 신부를 만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대해 소개해달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2001년 여야합의에 의한 법률에 근거해 설립됐다. 그동안 몇몇 뜻있는 분들이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이를 좀 더 체계화하고 국민들의 합의를 얻으면서 진행하기 위해 국가차원에서 만든 단체다. 사업회의 중요한 내용은 ‘기억과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단체명에도 ‘기념’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는 과거 60~70년대와 80년대 민주와 자유를 위해 노력하고 희생했던 분들의 고귀한 삶을 기억하자는 것과 그 삶을 현재화해 미래로 이어주는 계승작업을 하자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민주화운동과정에서 발생한 사건들 또 그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몸바친 의인과 열사들, 이름없이 사라져간 민중들의 발자취를 찾아 민족정신을 이룩할 수 있는 기념탑을 세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어떤 사업을 해왔나 기념사업은 작게는 민주화운동, 넓게는 그 과정에서 희생됐던 모든 의인들과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국민들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민주화운동 역사를 알리기 위한 전국 순회 역사전시회,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연구 및 교육사업, ‘역사 다시읽기 시리즈’, ‘역사다시보기 시리즈’, ‘시대불꽃’ 등 교재 발간, 민주화운동 유적지 발굴조사사업 등을 해왔다. 또 민주화 운동사를 영어로 번역해 해외로 알리는 한편, 민주화운동에 도움을 주신 해외 인사 초청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기념회 사업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앞으로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참여형’ 기념사업이 되도록 준비하고 있다. 특히 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 특히 6·10항쟁때 이른바 ‘넥타이부대’라 불리웠던 민주시민들까지 다시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생각이다. 기념관 건립사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또 기념관 건립의 의미는 무엇인지 말해달라. 아직 계획단계로 전문가들 중심으로 자료는 정리된 상태다. 3~4월부터 실무자를 구성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동안 민주화를 위해 애쓰셨던 여러 분야의 원로와 중진 또 젊은층까지 포함하는 범국민추진위원회를 구성하려 한다. 또 여러 위원회를 만들어 이들이 각자 분야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물론 기념관 건립사업의 필요성에 대해 국민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부지선정 문제, 포괄해야하는 민주화운동 개념 설정 문제 등 넘어야할 산이 많다. 우선 기념관 건립에 대해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널리 알리고, 국민들의 뜻을 모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4·19 민주혁명투사들, 그리고 5·16 이후 민주화운동에서 애쓰신 분들의 정신이 가시화될 수 있는 기념관을 만들어 살아있는 역사체험장이 되도록 하겠다. 기억이란 시공간을 넘어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농축을 의미한다. 기념관 건립은 체험을 통해 과거를 현재화시키고 이를 통해 아름다운 미래를 선취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료정리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 사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오늘날 사료라고 판단될 수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있는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자료를 갖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도 많은 개인과 단체들이 기증 해주어 지난해말까지 기증 건수는 개인이 해외 거주자 32명을 포함해 257명, 단체 63곳 등 총 320건에 달했다. 수집된 사료도 총 43만건, 900만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사업회는 이렇게 모아진 자료를 효율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 사료보전시스템 구축사업을 진행해왔다. 지난 11일부터 1차로 민주화운동 자료 원문을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60~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나온 각종 성명서, 단체 활동 기록을 중심으로 한 회의록, 고문서 등으로 8만3000여건 116만쪽에 달하고 있다. 김상진 열사,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 결성, YH노동조합, YWCA위장 결혼 사건, 사북광산노동자투쟁 등 국내민주화운동 관련 자료 뿐 아니라 재미한인구국동지회의 유신반대 성명서 등 당시 해외에서의 벌어진 민주화운동과 연관된 자료들까지 망라하고 있다. 사업회 활동을 하면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시대의 어려움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한쪽에서는 민주화 보상이 이뤄지고 대통령 직속 의문사 진상위원회가 설치되는 등 과거사 정리운동이 진행되는 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화 인사를 탄압했던 당사자들이 정치권과 사법부, 검찰, 경찰 등 각 영역에 엄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게 보수언론이다. 일제와 독재시대 권력 앞잡이 노릇을 했던 보수언론들이 오히려 민주화 세력을 공격하고 있다.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 이룩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보수언론이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도 마찬가지다. 한쪽에는 긍정적인 동력이 있는 반면 이를 방해하는 세력도 엄존하고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 설득하고 교육하고 꾸짖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자유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분들이 힘을 모아가면서 기념사업을 추진하려 한다.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지, 또 남은 과제가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나 연단위로 보면 당위적 진전이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10년 단위로 본다면 기적에 가까운 변화가 있었다. 단적인 예로 70~80년대만 해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불법으로 몰렸는데 지금은 대통령이나 공직자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비판할 정도로 자유가 보장돼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책임을 동반한다. 때로 방종과 남용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특히 과거 정권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역사 앞에서 반성해야한다. 민주화 운동도 과거 초심이 잊혀지면서 지나치게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 중심으로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특히 90년대 이후 청년들이 너무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다. 희생 헌신 공익의 가치를 망각하고 있다. 과거 어려울 때 가졌던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끊임없이 일깨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해야한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순국선열은 물론 4·19 희생자들, 60년대 이후 민주화를 위해 애쓰셨던 선배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되새겼으면 한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도 이분들의 고귀한 가치가 생생하게 기억되고 현실에 뿌리내려 미래의 더 큰 창조적 가치로 승화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민주화라는 고귀한 삶의 가치와 열매를 모든 국민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2005-01-28
- [책소개]인생은 결정의 연속, 최선의 답을 어떻게 택할까 최상을 꿈꾸는 결정의 법칙 하타무라 요타로 지음 /신연호 옮김 /북폴리오 /1만1000원 삶의 기로에서 망설이거나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가. 모든 선택에서 ‘최선의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인생의 순간순간이 어찌 보면 불투명한 미래에 요행수를 거는 결정의 연속이다. 즉 모든 결정은 도박이다. 식사할 음식점을 결정하거나 입고갈 옷을 결정하는 등 일상생활의 간단한 결정에서부터 취직과 전직 등 캐리어와 관련된 결정, 결혼과 이혼 등 인생의 기로에서 내리는 결정까지 우리는 최상의 선택을 하기 위해 갈등한다. 이러한 갈등의 과정을 학문적으로 풀어 쓴 책이 출간돼 눈길을 끌고 있다. 화제의 책은 ‘실패학의 법칙’의 저자인 하타무라 요타로의 ‘결정의 법칙’. 저자는 책을 저술한 이유에 대해 어떤 일을 할 때 기획, 행동 등은 표면에 드러나지만 결정을 내리는 과정마다 겪게 되는 갈등과 제약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며, 결정 당시의 사고맥락을 분석해 최상의 결정방법을 찾자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결정’은 “각각의 선택항목에 할당되었던 개연성을 ‘0’으로 만들고 단 하나의 개연성만 1(100%)로 정하는 작업”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여러 가지 선택항목 중에서 단 하나만 고르는 작업’인 것이다. 결정에는 항상 결과가 따른다. 결과에 만족할 때도 있지만 후회할 때도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최상의 결정을 내리기를 바란다. `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2005-01-03
- “영화일하려 아르바이트로 생계유지” “영화만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정말 몇 안됩니다.” 대학졸업 후 곧바로 영화판에 뛰어들어 이제 영화경력 7년차에 접어든 조감독 김모씨(34)는 아직도 미혼이다. 결혼까지 약속한 사람이 있었으나 결국 헤어졌다. 여러 이유가 있어서겠지만 일자리가 안정적이지 못한 것도 중요한 이유중 하나다. 영화감독이 목표인 김씨는 요즘 집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 한 대형 제작사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영화작업이라는 게 철저히 ‘프리랜스’ 개념이라 영화가 없을 때는 별 도리가 없다. “영화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죠. 때문에 영화 스탭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곤 합니다. 주로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려 하지만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나서는 것도 이바닥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김씨도 영화가 없을 때는 주로 인터넷 등 영상물 제작하는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어차피 영화가 있다고 해도 자신이 받는 돈으로는 생활비도 빠듯하다. 이런 아르바이트가 없을 때에는 김씨도 일용노동자로 나서기도 한다고. 영화 스텝들이 하는 아르바이트도 가지가지. 주로 전시부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미술전시회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연출부는 결혼사진이나 웨딩동영상 촬영 등을 선호한다. 이같은 관련직종은 그나마 선호하는 아르바이트 자리.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의 스텝들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는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나와도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다. 수익은 극장과 투자사, 배급사, 제작사가 가져가고 인센티브도 배우, 감독, 작가, 촬영감독 등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영화 스텝들은 ‘시혜’ 차원에서 일정금액의 보너스만 받아도 감지덕지라고. “요즘 대형 제작사에서 제작부를 중심으로 정규직화 하는 경향이 있지만 아직 일부에 불과합니다. 안정적 고용구조를 만드는 것이 열정을 가진 영화인들에게는 가장 절실한 일중 하나입니다.” 힘들게 일하는 만큼 보상이 따르지 않지만 우리나라 영화 스텝들은 누구 못지않게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 천만 관객 시대도, 세계 3대 메이저 영화제 석권도 이들로부터 나올 것이다.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호구지책 때문에 영화계를 떠나는 일이 계속되는 한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뒷걸음질 할 수 밖에 없다”는 이 젊은 영화인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여기에 있다. /장유진 기자 yjchang@naeil.com 2005-01-27
-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까지…” 생후 70일된 신생아를 친모와 함께 납치해 어머니는 살해한 뒤 암매장하고 아기는 돈을 받고 팔아 넘긴 반인륜적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지난 24일 신생아와 어머니를 함께 납치, 아기는 의뢰인에게 팔아 넘기고 친모는 살해해 암매장한 혐의(살인 및 사체유기 등)로 심부름센터 직원 정 모(40·서울 강서구 화곡동), 박 모(36·서울 중구 신당동), 김 모(40)씨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정씨 등에게 신생아를 구해줄 것을 의뢰해 아기를 돈을 주고 넘겨받은 혐의(인신매매)로 김 모(36·여)씨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 등은 지난해 5월 24일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의 한 거리에서 생후 70일 된 아기를 안고 가던 고 모(21·여)씨를 차량으로 납치한 뒤 고씨를 결박한 채 끌고 다니다 경기도 광주에 거주하는 김씨에게 아기를 팔아 넘겼다. 이들은 차량 안에서 아기를 돌려달라고 애원하던 고씨의 목을 졸라 살해한 뒤 강원도 고성의 한 야산에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의뢰인 김씨는 임신을 이유로 결혼 약속까지 받아낸 연하의 최 모(31)씨에게 거짓말한 것이 탄로날 것을 우려, 결혼 한 달 전인 2003년 10월 정씨 등에게 미혼모의 아기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한 뒤 결혼 6개월여만에 납치된 아기를 7000만원을 주고 넘겨받은 것으로 경찰수사결과 밝혀졌다. 김씨는 지난 90년 다른 남성과 결혼해 두 남매를 두고 있다가 재작년 3월 서울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최씨를 만난 후 가출, 이혼절차를 밟지 않고 동거를 시작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조사결과 김씨는 지난해 2월 한 달여간 서울 천호동의 친구 집에서 머물다 돌아와 “해외원정 출산을 하고 왔다. 아기는 외삼촌이 미국에서 데려올 것”이라고 속인 뒤 두 달 뒤 납치극으로 넘겨받은 아기를 친자식처럼 시댁에 소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김씨는 정씨 등으로부터 친척 등 하객역할을 해 줄 사람 9명을 구해 결혼식에 등장시키는 등 처음부터 철저히 과거를 속이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가 엄연히 타인의 호적에 올라가 있는 아기를 이름과 출생일을 다시 정해 최씨의 호적등본에 ‘이중등재’시키기도 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아울러 경찰은 김씨가 정씨에게 지불할 사례금을 최씨 부친으로부터 ‘원정출산 경비’로 받은 돈과 최씨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 수익 등으로 조달했다고 밝혔다. 한편 정씨 등은 이 같은 김씨의 약점을 이용, “돈을 더 주지 않으면 최씨에게 사실을 다 말하겠다”고 협박, 5000여만원을 추가로 뜯어냈다고 경찰은 덧붙였다. 정씨 등 납치범들은 지난해 5월 천안에서 뺑소니 교통사고를 내 차량이 수배된 상태에서 지난 22일 서울에서 같은 차량을 몰다 적발됐으며 검문과정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수상히 여긴 경찰의 집중 추궁 끝에 범행을 실토했다. 한편 사건의 전모가 공개되면서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인터넷에서는 사건을 접한 네티즌들이 격앙된 반응을 그대로 쏟아냈다. 아이디가 ‘gidogody’인 네티즌은 “나도 아기 엄마라 얼마나 놀랐는지. 세상이 너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그런 사람들도 사람인지”라며 “아기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정말 상상하는 것조차 무섭다”고 올렸다. 네티즌 ‘pyj9754’은 “비참하게 죽어간 아기 엄마와 불쌍한 아이를 생각하면 남아있는 가족들은 가슴이 미어질 것”이라며 “자라서 사실을 알게될 아기가 너무 가엽다”고 했다. 2005-01-25
- 음주운전은 신화가 아니라 범죄 최근 서울 강남에서는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30대 남성이 음주운전 혐의로 구속됐다. 결혼식은 무기 연기됐다. 이 사람은 무면허 상태였는데 이번이 세 번째 적발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음주운전자들은 상습적으로 음주운전을 한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음주운전을 무슨 영웅담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각종 모임에서도 음주단속을 피하는 방법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경우까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일년에 1000여명 이상이 사망하는 음주운전 사고에 대해 너무 무감각해져 있다. 전염병으로 사람이 한두 명이라도 죽으면 정부차원의 대책본부가 꾸려지고 난리가 나겠지만, 음주운전 사고로 하루에 3명꼴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도 마치 남의 일로 생각하는 분위기다. 이는 사회적으로 음주운전을 용인하는 정서와 무관치 않다. 심지어는 음주운전을 강요하는 분위기까지 있다. 회사 회식은 보통 음주운전으로 이어진다. 회식자리에서 운전을 이유로 술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음주운전을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적 차원의 압력이 필요하다. 상습적으로 음주운전을 일삼는 사람에게는 주위에서 음주운전이 범죄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고통받는 음주운전사고 피해자들의 처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음주운전사고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음주운전자 사고 피해자 가족 모임인 ‘음주운전을 반대하는 어머니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계속 늘기만 하던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지난해 처음으로 줄었다고 한다. 우리도 사회와 직장이 음주운전 추방에 적극 나서야 한다. 2004-12-28
- [그들의 ‘스승’ 그들의 ‘모델’] ① 박근혜 대표와 엘리자베스 1세 누구나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한 사람을 가슴에 안고 있기 마련이다. 누구를 스승과 모델로 삼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나라를 이끄는 리더인 정치인들은 어떤 모델을 가슴 속에 안고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스승 또는 모델과 본인들의 닮은 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보고, 배울 점은 없는지 짚어본다. /편집자 주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표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상적 여성 리더를 묻는 질문에 주저 없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를 꼽았다. 박 대표는 “(엘리자베스 1세는) 어려서 고생을 많이 했다. 음모도 있었지만 잘 참아내 사려 깊은 지도자가 됐다. 자기가 겪어 봤기 때문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다. 늘 관용의 정신을 갖고 합리적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에 국민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대영제국을 만들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박 대표 서재에도 ‘위대한 CEO 엘리자베스 1세’ 등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책이 여러 권 꽂혀 있다. 실제 박 대표측에서도 박 대표의 모델로 엘리자베스 1세와 영국 대처 수상을 꼽는다. 박 대표를 지지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한국사에서는 선덕여왕을 박 대표에 비교하고, 서양사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를 비교한다. ◆‘닮은꼴’ 개인사=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여왕으로 평가받지만 개인사적으로는 불운한 여인이었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앤 볼린에게서 아들을 얻고 싶어 본처인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 억지로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한다. 그 여파로 로마의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하고 영국은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국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앤 볼린이 낳은 것은 딸 하나, 엘리자베스 공주 뿐. 그는 앤 볼린을 간통죄로 몰아 왕비가 된지 3년 만에 죽인다. 그 후 엘리자베스는 배다른 언니인 메리 공주와 또 다른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 왕자 사이에서 불행하고 조심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메리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더욱 가시밭길과 같은 길을 걷는다. 아버지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됐던 엘리자베스는 메리 여왕 앞에서 구교로 개종할 것을 엄숙히 다짐한다. 또 반란 음모에 연루돼 생모가 처형당했던 런던탑에 약 4년간 유폐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엘리자베스 1세의 인생스토리를 보면 외면적으로 박 대표와 닮은 점이 꽤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절대군주로 왕권을 확실히 다진 헨리 8세의 딸이었다면 박 대표는 권위주의적 권력을 추구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또 둘 다 미혼을 고수했고, 둘 다 정치적 감금기를 거쳤다. 박 대표는 박 전 대통령 피살 이후 97년까지 숨죽이며 살았다. 엘리자베스 1세의 리더십이 바로 이런 고난을 모태로 삼았던 것처럼 박 대표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경험과 정치적 감금기는 그의 리더십을 담금질하는 계기가 됐다. ◆‘과거를 벗은’ 리더십= 엘리자베스 1세가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그의 치세 45년 동안 영국이라는 나라를 그 전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바꿔놨기 때문이다. 1558년 메리 1세의 서거와 더불어 25살의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할 당시만 해도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뒤쳐진 후진국이었고 정치적 상황도 혼란스러웠다. 스코틀랜드와의 갈등, 에스파냐 및 프랑스와의 대립 등으로 동맹을 맺을 만한 대상도 없을 만큼 고립 상태였다. 재정적으로도 어려웠다. 막대한 빚에 시달린 나머지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고, 화폐가치 하락과 급격한 인플레이션은 나라 재정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신구교 간의 종교대립으로 혼란이 극에 달해 나라는 그야말로 파산 직전이었다.그러나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45년간의 치세를 마치고 서거했을 때, 영국은 파산 직전의 나라에서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위대한 리더십이 깔려 있다. 리더십의 핵심은 과거에 매달리거나 하지 않고 미래로 향했다는 점이다. 그는 여왕에 즉위한 후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오로지 영국의 미래비전만을 외쳤다. 또 여성으로서의 감수성과 강인함이라는 균형감각을 가진 조화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문제일수록 원칙을 고수했고 정면승부를 했다. 박 대표도 상당 부분 엘리자베스 1세의 리더십을 닮아가려는 것이 엿보인다. 박 대표는 항상 미래를 강조하는가 하면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이미지와 함께 강인한 남성적 리더십을 함께 보여주려는 노력도 보인다. 지난 국가보안법 협상 때 박 대표가 보여줬던 모습은 한편으로는 ‘고집불통’으로 비판받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원칙고수’의 강한 리더십을 느끼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 대표 주위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1세를 따라가려면 한참 남았다고 말한다. 박 대표가 아직 ‘홀로서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 즉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 대표를 보좌한 바 있는 한 인사는 “정수장학회 문제를 처리할 때 국민들은 박 대표가 아직 박 전 대통령의 딸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면서 “엘리자베스 1세가 어려운 시절을 겪은 후에도 ‘자기’를 회복했던 것처럼 박 대표도 지금까지의 자기 한계를 벗고 본래의 자기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엘리자베스 1세 못지 않은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일 박 대표는 “박근혜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을 잊어달라”고 말한 것은 박 대표가 그 전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 대표는 이날 “문서 공개에 대해 공당으로서, 공당 대표로서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나에게 부담을 갖거나 염두에 두지 말라”고 당 지도부에 주문했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2005-01-21
- <미즈엔 뷰>내 아이 양육권은 어디에 누군가는 말했다. 이혼율이 높은 것은 여성의 행복추구권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혼이 부부의 모든 갈등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식을 가진 부부에게는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요즘은 결혼한 지 5년이 안 된 젊은 부부의 이혼율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렇게 결혼생활이 오래 되지 않은 부부들의 이혼은 전통적인 이유(배우자의 부정행위나 구타 등 부당한 대우로 인한)에 해당하기보다 아직 결혼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과 성격 차이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갈등 요소가 좀 덜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 실제는 오히려 아직 어린 자녀의 양육을 둘러싼 부부갈등이 심각할 때가 많다. 물론 서로 아이를 키우겠다고 다툴 때가 대부분이지만 종종 아이를 키우겠다는 의사표시를 둘 다 하지 않는 경우도 본다. 아이에 대해 특별한 양육의사를 부부가 모두 표시하지 않을 때는 법원에서 누가 키울 것인지를 물어 현재 키우는 쪽에서 계속 키우도록 하는 등의 결정을 한다. 나는 다행히 아직 서로 아이를 안 키우겠다고 하는 부부를 법정에서 만나 보진 못했다. 아마도 법정에서 아이를 못 키우겠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혼하는 부부가 아이를 서로 양육하려고 할 때는 누구에게 양육권을 줄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과연 누구를 양육자로 지정해 주어야 아이의 원만한 성장과 복지를 위해 적당할 지가 재판부의 고민일 것이다. 부부는 서로 자신이 키워야 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댄다. 중요한 점은 부모 중 누가 아이를 키우든 이혼으로 인해 가장 고통 받는 쪽은 아이라는 점이다. 부모야 자신들의 의지에 의해 또는 법원의 판결에 의해 새로운 삶을 찾아 헤어졌지만, 아이로서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그리고 선택하지 않은 삶을 타의에 의해 당분간, 아직 미성년자인 동안,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은 부부들의 경우에는 이혼하는 부부 부모들의 입김도 상당히 작용한다. 부모는 손자보다는 자식의 이혼 이후 생활에 대해 더 관심이 많다. 이혼 후 손자를 키우느라 고생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자식을 생각하는 인지상정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나는 이혼 후 미성년 자녀를 한 쪽 부모가 양육할 때 다른 한 쪽이 지급할 의무가 있는 양육비를 제대로 주지 않아 고통 받는 이들을 많이 본다. 이혼 후 당분간은 양육비를 지급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제대로 주지 않는 부모가 참으로 많다. 처음에는 양육비를 받기 위해 이리 저리 알아보고 법원에 강제집행도 신청해 보지만 점점 지쳐 포기하고 만다. 최근에 들은 바에 의하면, 가정법원이나 여성단체 등에서 양육비 이행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니 실질적인 양육비 지급이 확보돼 양육비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05-01-19
-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⑩ 타워 크레인 기사 박영미 씨 “무슨 일 하세요?” 무심코 물었던 사람들은 박영미씨의 대답을 듣고 어김없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공중을 향해 수직으로 솟은 타워 크레인, 그 꼭대기에 여자가 앉아 있을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박영미씨가 타워 크레인을 배운 것은 1996년, 스물다섯 살 때였다. 여고를 졸업하고 몇 군데 직장을 옮겨다니다 동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이었다. 출근길에 공사현장을 지나다 허공중에 홀로 떠있는 크레인 조종석에 눈이 갔다. ‘저렇게 높은 곳에서 혼자 조용히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원래도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을 차례로 잃고 남동생 둘과 어렵게 살면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더 힘들게 느껴지던 때였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당시 한양건설이 운영하던 직업훈련원의 크레인 기사 과정에 들어갔다. 한양직업훈련원의 크레인 기사 과정은 1기당 4개월씩, 1년에 세 차례 진행되었다. 기당 훈련생이 100명, 그 중에 여성은 두세 명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97년 초에 처음 크레인에 올랐다. “대학 교육시설 짓는 현장이었어요. 처음 일주일간은 신나고 재밌었어요. 하고 싶던 일을 드디어 하게 됐으니까. 근데 그 뒤로 한 달간 내내 울고 다녔어요. 너무 힘들어서. 당장 그만두겠다고 소장한테 몇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 그때마다 소장이 자리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한 달 버티고, 또 1년 버티고…. 그러다 여기까지 왔네요.” 이제 영미씨는 서른네살, 9년차 고참 기사이다. “어이, 기사님! 치마 입고 올라가지? 그래야 우리도 일할 맛이 나잖아.” 크레인을 오를 때 밑에서 현장 아저씨들이 간혹 그렇게 흰소리를 해도 “아저씨가 꽃 팬티 입고 일하면 나도 치마 입을게요.”하고 능청스레 받아넘길 만큼 관록이 붙었다. 가장 무서운 건 안전사고 요즘 영미씨가 일하고 있는 곳은 용인 운전면허시험장 맞은편의 아파트 건설 현장이다. 건설 경기가 나빠서 8개월이나 놀다 작년 2월에 겨우 잡은 일자리다. “크레인 기사는 현장별로 계약을 해요. 다섯 달 짜리 공사면 다섯 달, 1년 짜리 공사면 1년, 그렇게 계약을 하고 월급제로 일하죠. 옛날엔 대형 건설회사들이 중기부를 따로 두고 기사를 정규직으로 채용했지만 지금은 거의 다 크레인임대업체에 하청을 줘요. 그러니까 저희는 크레인임대업체와 계약을 하고, 원청 현장을 따라 다니는 거죠.” 영미씨가 말하는 ‘옛날’은 IMF 이전을 뜻한다. 그때는 지방에 가서 일할 때면 회사가 숙소도 잡아주고 숙박비도 보조했다. 또 중간에 쉬는 달이 있어도 50%의 임금이 나왔다. 지금은 지방 공사 때도 숙식을 기사가 알아서 다 해결해야 한다. IMF 때 근로조건이 여러모로 악화되었는데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다. 크레인 기사는 해가 뜨면 작업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작업을 끝낸다. 현장에서 20분 거리에 사는 영미씨는 7시쯤 집을 나선다. 7시 40분쯤 주위가 환해지자 영미씨는 마스트 안쪽의 사다리를 타고 조종석으로 올라간다. 크레인의 높이는 보통 60~70 미터, 높을 땐 100미터를 넘기도 한다. 수직의 사다리를 타고 조종석까지 가는 일이 무섭진 않을까? “보통 사람들한텐 무섭죠.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무서워요. 어느 정도 높이를 넘어서면 감각이 없어져서 무섭지 않은데, 10미터쯤이 제일 무섭게 느껴지는 높이에요. 저는 무섭진 않은데 힘들어요. 두 손에 의지해 60, 70미터를 오르내리는 그 자체가 굉장히 힘들어요.” 영미씨가 무서움을 느낄 때는 따로 있다. 보통 한번에 1~2톤씩 작업을 하는데, 자재 무게 때문에 조종석이 앞으로 쑤욱 기울어질 때가 있다. 또 자재를 내려놓을 때 반동으로 조종석이 뒤로 쏠리기도 한다. 60미터 상공에서 바닥을 향해 몸이 기울어질 때, 정말 무섭다. 그러나 제일 무서운 건 역시 사고다. 영미씨 동기생 중 두 명이 일 시작한 지 1년만에 사고로 죽었다. 내가 죽는 사고도 있지만 남을 죽이는 사고도 있다. 우리 나라 건설 현장의 ‘안전 불감증’은 크레인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선진국에선 크레인 작업을 할 때 반드시 지상에 신호수를 두게 되어 있다. 작업 반경 안에 사람이 오가더라도 조종석에선 식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선 현장 인부들이 알아서 한다. 크레인의 안전관리에 관한 제도나 법규가 아예 없기 때문에 산업안전관리공단이 비계 관련 조항에 근거해 안전관리를 하고, 그마저도 눈 가리고 아옹이다. 특히 한 대의 크레인으로 주변의 몇 개 동을 작업하기 위해 고안된 설치 방식인 ‘와이어 브레이싱’(건물과 건물 중간에 크레인을 세우고 와이어로 크레인을 묶어 균형을 잡게 하는 방식)은 전세계를 통틀어 우리 나라에서만 쓴다고 한다. 2003년 태풍 매미가 부산·경남을 덮쳤을 때 하룻밤새 무려 63대의 타워 크레인이 쓰러졌다. 모두 ‘와이어 브레이싱’ 크레인이었다. 조종석의 넓이는 0.3평, 제대로 기지개 한번 켜기가 힘들다. 수백 가지나 되는 크레인 기종 가운데 힘을 많이 써야 하는 기종에 걸리면 1시간 가까이 레버를 붙잡고 있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허리와 목, 무릎 디스크가 크레인 기사들의 직업병이다. 여자기사들은 변비나 방광염에도 잘 걸린다. 소변보러 내려오는 걸 피하기 위해 물을 최대한 안 마시고, 오줌이 마려워도 참기 때문이다. 급할 때 쓰는 응급책을 나름대로 고안해내지만, 급한 나머지 조종석에서 일을 보고 그걸 아래로 던졌다가 해고당하는 웃지 못할 일도 가끔씩 일어난다. 일단 한번 올라가면 점심 때 말고는 내려오는 일이 거의 없다. 몹시 힘든 날엔 내려갔다 다시 올라올 일이 까마득해 점심을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요즘은 건강을 생각해 점심때만큼은 꼭 내려와서 몸을 푼다. 일을 마치고 일어서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하루 종일 조종석에 앉아 상체만 쓰니까 하체가 힘을 못쓰는 것이다. 그래서 크레인 기사들은 대부분 오래 걷질 못하고, 걷는 걸 싫어한다. 좋은 사람들 만난 것이 가장 큰 보람 “월급은 얼마나 돼요?” 영미씨가 크레인 기사라는 걸 알고 놀랐던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서 묻는다. 그리곤 또 놀란다. “어머, 그거 괜찮은 직업이네요!” 영미씨의 월급은 232만 5000원이다. 크레인기사노조가 단체협상에서 체결한 가이드라인이 바로 그 액수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받냐?”며 놀라는 사람들을 보면 말수 적은 영미씨도 참을 수가 없어진다. “저희는 상여금도 없고, 퇴직금도 없어요. 게다가 한 현장의 일이 끝났다고 바로 새로운 현장과 계약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자리 못 잡으면 몇 달이고 놀아야 해요. 지방에서 작업할 땐 숙박비도 나가죠. 4대 보험도 되는 회사 있고, 안 되는 회사 있고.” 특이하게도 크레인 기사는 남자든 여자든 초보든 고참이든 임금에 차등이 없다. 여자를 차별하지 않는 것은 좋게 보이지만, 경력이나 숙련도를 인정치 않는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된다. 그 때문인지 현재 전국적으로 3,000명 가량 되는 크레인 기사들 중 30대 중반이 가장 많다. 평생 직업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미씨 월급이 200만원을 넘어선 것도, 업주와 ‘표준근로계약서’라는 걸 작성하게 된 것도, 일요일날 쉬고 연월차 휴가를 낼 수 있게 된 것도, 여름이면 40도를 넘어가는 찜통 같은 조종석에 에어컨이 설치된 것도 다 타워크레인노조가 생긴 뒤 최근 1, 2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크레인일 하면서 가장 보람차고 기쁜 일은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이다. 영미씨의 정의에 따르면 “좋은 사람”이란 “남을 먼저 생각하고,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다. 영미씨의 남편 김성점씨도 물론 “좋은 사람”인데, 노동조합 모임에서 만났다. 어디가 좋았냐고 물었더니 영미씨와 남편의 대답이 똑같다. “착하잖아요!” 일찍 부모를 잃고 살아온 영미씨에게 씩씩하고 속 깊은 남편은 큰 의지가 된다. 재작년 봄 결혼할 당시 두 사람은 빈털털이였다. 영미씨는 그간 모아두었던 돈을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 당해서, 남편은 몇 년 전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다 거덜난 뒤로 아 2005-01-19
- 증권사에서 노후 설계 서비스 받아보니 보험 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노후설계 서비스가 증권업계에서도 본격 출범했다. 한국투자증권과 대신증권 등 시중 증권사들이 고객의 현재 자산과 저축액, 노후에 필요한 자금 규모 등을 바탕으로 고객이 매달 얼마를 어떤 상품에 투자하면 될지를 알기쉽게 설명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한 것. 공적연금이나 사적연금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후 대책에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고객들에게는 귀가 번뜩일 소식이다. 17일 오후 기자는 한투증권 여의도지점을 방문, 금융자산관리사 전윤정 대리의 도움을 받아 30대와 40대 초반인 실제 직장남성의 노후 설계를 받아봤다. /편집자 주 사례 1 첫 번째 상담에 나선 41살 양 모씨는 교사인 부인과 맞벌이를 하는 부부. 양씨 부부는 현재 5000만원의 금융자산과 3억원짜리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양씨는 매달 200만원 정도의 저축(투자)를 하고 있고, 57세부터 80세까지 23년간 월 300만원(현재 화폐가치 수준)의 연금을 받기를 원한다. 전 대리가 양씨의 자산실태와 연금 수요를 한투증권이 개발한 ‘골드플랜 노후자금 설계 프로그램’에 입력하자 양씨의 노후를 위한 자금내역이 순식간에 화면을 채웠다. 프로그램이 쏟아낸 결과를 살펴보면 우선 양씨가 57세부터 80세까지 월 300만원씩 쓰는데 필요한 자금은 8억2800만원이다. 다만 연금이 개시되는 57세까지 양씨가 실제 모아야하는 돈은 4억8559만원이면 된다. 현재 41세인 양씨가 57세까지 이 돈을 모아야 본인이 원하는 수준의 안락한 노후가 보장되는 것이다. 일단 양씨가 보유 중인 5000만원의 금융자산을 연 5.0% 수익률로 불린다고 가정했을 때 57세가 되면 이 돈은 1억914만원이 된다. 매달 200만원씩을 연 5.0% 수익률을 추구하는 주식편입 비중이 비교적 낮은 펀드를 구입할 경우 목표 수익은 5억8304만원이 된다. 두가지를 합치면 양씨가 57세일 때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은 6억9219만원. 목표액 4억8559만원보다 2억660만원 초과한 액수다. 따라서 양씨는 57세부터 받기를 원하는 매달 300만원보다 훨씬 많은 418만원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전 대리는 두가지 경우의 수를 더 제안했다. 양씨가 현재 보유 중인 3억원 짜리 아파트를 연금을 받는 시점에 절반 규모로 줄일 경우를 가정한 것. 전 대리는 “자녀들이 출가하고 부부만 살게되면 현재 부동산 규모가 굳이 필요없기 때문에 이를 줄여서 생활비로 충당하거나 조만간 모기지론이 보편화되는 추세를 반영한 설계안”이라고 말했다. 양씨의 경우 이를 고려 57세일 때 현재 소유 아파트를 절반 이상 줄이면 2억6010만원의 잉여자금이 추가로 발생할 것으로 분석했다. 이럴 경우 양씨는 부동산(2억6010만원)+금융자산(1억914만원)+월 200만원씩 불입한 자산(5억8304만원)을 합쳐 57세에는 9억5228만원을 손에 쥐게된다. 목표액 4억8559만원보다 4억6670만원이 초과한 액수다. 노후가 한층 여유있게 되는 것이다. 전 대리는 양씨가 안정적인 수익추구를 위해 금융기관에 적립하는 월 200만원을 증권사 상품에 ‘올인’하지 않고 분산투자할 경우도 따져봤다. 양씨가 연 3.5% 확정수익률이 보장되는 은행상품에 월 100만원을 적립하면 57세에 쥘 수 있는 자금은 2억5600만원. 나머지 100만원을 투자해 여유있는 노후자금을 만들기 위해선 다소 주식편입 비중이 높은 혼합형 상품이 필요하다고 전 대리는 조언했다. 주식편입비율이 18.94%이고 목표수익률 6.4% 수준인 상품이 적임으로 선정했다. 또는 100만원 가운데 20만원을 주식형펀드(주식편입비율 60%이상)에 넣고 나머지는 채권형펀드에 적립하는 분산적립방식도 괜찮다고 조언했다. 전 대리는 “양씨 노후설계의 경우 자녀 결혼자금이나 교육자금 등이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잉여자금이 넉넉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사례 2 두 번째 설계에 나선 김 모씨는 31세 새내기 직장인. 양씨에 비해 보유자산이나 수입이 훨씬 뒤떨어지는 상담사례다. 김씨는 소유부동산이 전혀 없고 3000만원의 금융자산만 보유한 상태다. 월 50만원 정도의 저축만 가능하고 57세부터 80세까지 월 250만원대 수준의 연금생활을 원한다. 역시 한투증권 골드플랜 노후자금 설계 프로그램에 입력하자 김씨가 57세부터 80세까지 필요한 총 금액은 6억9000만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57세까지 모아야되는 자금은 4억6861만원. 하지만 김씨가 현재 보유한 금융자산을 연 3.5%로 불려서 얻을 수 있는 액수는 7338만원이고, 월 50만원씩 57세까지 26년간 적립한 돈은 2억5255만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두가지를 합치면 3억2593만원. 희망연금을 위해 필요한 4억6861만원보다 1억4268만원이나 부족한 액수다. 전 대리는 대안으로 적립액수를 대폭 늘이는 방식을 권유했다. 하지만 김씨는 현재 월 50만원 수준에서 급격히 불입액을 늘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다만 10만원 정도 추가 적립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전 대리는 “월 60만원을 적립해서 희망연금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선 목표수익률을 현 3.5%보다 높은 4.5% 수준으로 높여야한다”고 설명했다. 당연히 주식편입비중이 다소 높은 상품이 선택됐다. 이 경우 김씨가 57세까지 모을 수 있는 자금은 금융자산(9422만원)과 월 60만원 적립한 자산(3억5080만원)을 합쳐 4억4502만원이 됐고 이는 안정된 연금을 위해 필요한 자금(4억2443만원)보다 2059만원이 많게 됐다. 최근 40대 중년남성 고객의 노후설계상담을 주로 했다는 전 대리는 “한국에서는 공적영역이든 사적영역이든 안정적인 노후설계가 어려운게 현실”이라며 “한투증권의 골드플랜 서비스가 노후설계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투증권은 노후설계 시스템에 참여한 고객에게는 세무와 건강관리, 보험, 문화이벤트 등의 부가서비스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 2005-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