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초기' 검색결과 총 9,846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전국 2주택 이상 ‘89만 세대’ … 무주택 45% 정부와 여당이 마련 중인 양도소득세 중과세 대상인 1가구 2주택 이상 다주택보유자는 전체 1777만 세대의 5%에 해당하는 89만 세대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11채 이상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세대는 1만4800 세대였으며, 가장 많은 주택보유자는 1083채를 가진 임대사업자로 나타났다. ◆세대 45.4% 무주택 = 29일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세대별 주택 및 토지보유현황을 집계한 결과, 주민등록에 나타나 있는 전국 1777만 세대 중 54.6%인 971만 세대가 평균 1.15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5.4%인 806만 세대는 무주택자였다. 주택 보유세대 중 90.9%인 881만9000 세대는 주택 1채를 보유했고, 정부에서 투기 혐의가 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1세대 2주택 이상 다주택 보유세대는 주택보유세대의 9.1%인 88만7000 세대로 집계됐다. 이들은 평균 2.66채를 갖고 있었다. 다주택보유세대는 주거용 주택 1119채 중 21.2%인 237만 채를 보유하고 있으며, 1채를 가지고 있는 세대는 881만9700세대, 2채 72만2200세대, 3채 8만6700세대, 4채 2만5700세대, 5채 1만2700세대, 6-10채 2만5700세대, 11채 이상 1만4800세대 등이었다. 주택 2채를 보유한 사란이더라도 이혼, 결혼, 취업 노부모봉양 등의 사유로 2주택자가 됐거나 집값이 수도권 1억원, 지방 3억원 이하인 경우 중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달 말 부동산 대책발표 시 중과세 대상에 확실히 포함될 1세대 3주택 이상 보유자는 모두 16만5000 세대로 집계됐다. ◆개인별 최다주택보유자 1083채 = 개인별(임대사업자 포함) 최다 주택보유자는 1083채를 가진 임대사업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임대사업자를 뺀 최다보유자는 521채 였다. 지역별로는 주택을 11채 이상 보유한 집부자들을 지역별로 보면 서울과 경기도가 각각 2450세대, 1692세대로 전국 1, 2위를 차지해 수도권 집값폭등-시세차익-투기심리 쏠림 현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파트의 경우 11채 이상 보유한 다주택자는 1743세대로 이중 서울과 경기도에 각각 453세대와 336세대가 몰려 주택보다 더 심각한 수도권 집중 현상을 보였다. 특히 수도권 내에서도 서울 강남권 3개 부자구에 집중된 것으로 드러났다. 강남 송파 서초에서 11채 이상의 주택을 보유한 집부자들은 1100세대로 서울 전체 2450세대의 45%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 강남구가 531세대으로 가장 많았고 송파구 353세대, 서초구 216세대로 나타났다. 경기도 용인시 133세대, 분당 117세대 순으로 그 뒤를 이었다. 서울 강남구 거주자 중 2채 이상 보유세대는 1만5167세대로 전체 2주택 보유 88만7180세대중 17.4%를 차지했다. 토지도 주택과 마찬가지로 편중현상이 심각했다. 세대별 토지보유 현황을 보면 총 세대의 1%인 17만7000 세대가 전체 사유지의 34.1%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홍범택·이명환 기자 durumi@naeil.com 2005-08-30
- 다이애나, 바람둥이인가 시대의 박애주의자인가 다이애나 사랑을 찾아서 앤드루 모튼 지음 /유향란 옮김 이너북 /1만5000원 신데렐라처럼 나타났다가 드라마처럼 사라진 영국 황태자비 다이애나. 그녀는 죽었지만 영국은 물론 세계는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녀에 대한 책은 언제나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녀에 대한 후일담들은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너북에서 최근 낸 ‘다이애나 사랑을 찾아서’도 그녀의 사후에 발간됐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책은 앤드루 모튼이 지었다는 것만으로도 여느 다이애나와 관련한 저술과는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저자는 1992년, 다이애나의 지원을 받으며 당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그녀가 외로움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내용의 ‘다이애나 : 그녀의 진실한 이야기’를 펴내 세계적으로 적잖은 파장을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온갖 소문과 황색언론의 기사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다이애나가 실제로는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리며 신문의 해외토픽을 장식해오다 드라마처럼 의문의 죽음을 맞은 스캔들 주인공 다이애나. 우리는 보통 그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그녀의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를 책을 통해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근본적으로 정서가 불안정했던 여인, 피해망상증에 빠진 편집증 환자로 취급받고 남편 찰스 왕세자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다 이혼한 여인.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낸 그녀. 이 책에는 그녀의 삶의 궤적을 따라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저자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그녀를 왕세자비가 아닌 한명의 연약한 여인이자 가엾은 인간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가 왜 자살을 시도했는지, 자신의 몸을 자해하고 임신중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을 갖고 보면 ‘왕실의 인형’으로서의 그녀의 삶이 어땠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사진’만을 원했다. 1997년 8월 31일 애인 도디와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한 그 순간에도 파파라치들의 플래시는 여기저기서 터졌으며 죽은 직후에도 그녀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발표되느냐 아니냐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죽는 순간에도 왕실과 세상에 내던져진 제물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물론 다이애나를 올리버 호어, 제임스 휴이트, 하스낫 칸, 폴 버렐, 베리 매너키, 도디 파예드 등 무수한 남성들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여온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그녀의 내면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여 본다면 다이애나의 삶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국 왕실의 존엄한 왕세자비가 아니라 사랑을 갈망하며 고독과 외로움 속에 살아야 했던 여인 다이애나가 그녀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얘기다. 데일리 메일지의 왕실 출입기자였던 저자는 그녀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을 썼다. 내용도 단순한 전기 형태가 아닌 인터뷰 형식으로 꾸몄다. 그래서 책을 읽는 느낌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특히 앤드루 모튼은 다이애나의 마지막 5년 동안의 삶을 연구하면서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불신과 배신, 냉소적인 조작 등에 대해 조사자이자 보도 작가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동원했다. 다이애나의 희망과 공포, 고통과 기쁨을 보여주기 위해 인터뷰를 포함, 수많은 미공개 자료 및 정보를 제시하고 있다. 독자적인 자료 조사를 통해 전기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저자는 이 책 ‘다이애나 사랑을 찾아서’ 외에 ‘다이애나 : 그녀의 진실한 이야기’, 모니카 르윈스키가 공인한 전기인 ‘모니카의 이야기’ 등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저술들을 보유하고 있다. ` 장유진 기자 yjchang@naeil.com 2005-08-29
- “힘들 땐 천사(1004)를 찾으세요” “힘들 땐 천사(1004)를 찾으세요” 서울시 ‘건강가정지원센터’ 확대∙ ‘SOS 가정의 전화’ 전문성 강화 서울시가 가정문제의 적절한 해결을 위해 설치한 건강가정지원센터가 7개구에 들어서게 된다. 또 한국가정법률상담소와 함께 가족 갈등상담전화인 ‘SOS 가정의 전화’ 서비스의 전문성을 강화하기로 했다. 지난해 용산구에 시범 설치된 ‘건강가정지원센터’를 올 하반기중 강북 동대문 동작 서초 관악 송파 6개 구에 확대 설치할 예정이다. 신설될 건강지원센터들은 각각 성신여대, 중앙대, 서울대, 한국 가족상담 교육단체협의회 등에 위탁 운영되며 △부부-부모관계 향상 프로그램 △예비부부 결혼 전 교육 등 가족생활 교육 사업 △영유아 문제, 가정위기.갈등 등 가족상담 사업 △가족 여가 및 봉사,노후 준비 교육 등 가족문화 사업 등을 벌인다. 시는 내년 중 건강가정지원센터를 25개 구에 모두 설치한 뒤 어린이집 보육전문가를 활용, 영유아 양육 부모들에 대한 집단상담 사업도 시작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전화를 걸면 바로 거주지 구청에 연결돼 가정내 학대나 폭력, 불화 등 문제에 대해 24시간 상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SOS 가정의 전화’(1688-1004)의 전문성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가정법률상담소와 연계해 내달까지 상담원들에게 상담 기술과 전문지식을 가르쳐 주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이달 초부터는 서울시내 일부 구청에 가정법률상담소 직원이 파견 나와 전문 법률지식을 토대로 전화 상담을 해주고 있다. 한편, 서울시 가정의 전화(02-322-2780)가 지난해와 올 상반기 실시한 상담결과 ‘부부 성격차이’와 ‘배우자의 부정’ ‘고부갈등’이 가정불화의 주원인으로 나타났다. 자녀문제와 가출, 가정폭력 등이 그 뒤를 이었고 무능력과 낭비도 주요 원인으로 거론됐다. 이명환 기자 mhan@naeil.com 2005-08-25
- 정비공 출신 ‘21세기형 유목민’ 김태화(몽골현대기아자동차 사장) 한국차 점유율 68%·택시제도 도입 기여 … 버스 민영화 전담 ‘초보 시장경제’사회에 고객감동 서비스와 마케팅 개념 도입 800년 전 몽골족은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세계인구의 3분의2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스칸(1162~1227년)은 모든 점령지를 역참제로 연결했다. 점령지에 거미줄처럼 역을 두어 파발마가 칭기스칸의 명령을 전달하는 시간을 10분의 1로 단축했다. 1995년 워싱턴포스트는 송년특집호에서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기스칸을 선정했다. 인터넷보다 700년 앞서 전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했다는 것이 선정이유다. 칭기스칸은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이 망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중국 중원에 궁궐을 짓고 비단옷을 입은 몽골족은 1368년 초원으로 밀려났다. 이후 몽골인 들은 중국에 수백 년간 지배당하고, 라마불교에 순치되고, 사회주의를 겪는 동안 질주본능을 억제 당했다. 정착문명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유목민을 닫힌 공간에 가두어 놓았다. 칭기스칸의 후예들은 1921년 소련에 이어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몽골의 구 집권세력은 1990년 시장경제를 선택했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600 달러에 못 미친다. 국토는 한반도의 7.4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인천광역시와 같은 규모인 271만 명이다. 몽골이 유목사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렵다. 이미 전체인구의 절반이상이 도시에 모여 산다. 정착성과 유목성은 선택이 아니라, 조화의 문제다. 열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몽골은 사람들의 이동속도와 정보전달 속도를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바로 그 일을 한국기업, 한국인들이 주도 하고 있다. 몽골을 열린 세상으로 이끄는 한국기업·한국인 울란바타르와 21개 아이막(도)을 연결하는 행정·비상 디지털 통신망 구축(삼성물산), 울란바타르와 동부 4개 아이막에 광케이블 기간망 설치(대한전선), 몽골 제2휴대전화 사업(SK텔레콤 대한전선) 몽골통신에 40% 지분으로 경영 참여(KT) 등 한국기업들은 몽골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자동차는 몽골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불과 세 시간 거리인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시내에 들어서면 유난히 한국 자동차가 많다. 특히 버스, 승합형마을버스, 택시는 온통 한국차다. 몽골의 자동차 보유대수 16만대 중에서 현대자동차가 60%인 9만6400대, 기아자동차가 7.9%인 1만2640대이니 그럴 만도 하다. 1997년 당시 러시아차 점유율이 87%, 현대차 6%, 기아차 0.3%였다. 8년 만에 믿기 어려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신화는 현대기아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과 이를 그대로 실천한 몽골현대기아자동차 김태화(49) 사장이 있기에 가능했다. 몽골 정부는 지난 해 7월 정몽구 회장에게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수여했다. 울란바타르시는 2003년 외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김 사장에게 울란바타르 명예시민증을 주었다. 김태화 사장은 몽골에서 1000명에 가까운 고용창출을 하는 외국기업인 이상의 존재다. 그는 고객을 감동시키는 책임정비를 통해 자동차를 대량 보급했고 택시제도를 도입했다. 산업화에 꼭 필요한 대중교통수단인 버스회사의 민영화를 떠맡아 몽골의 교통문화를 바꿔놓았다. 김 사장의 삶은 21세기형 노마드(유목민)의 전형이다. 그는 용산공고 자동차과를 졸업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면 형제들이 학업을 포기해야할 정도로 집안이 어려웠다. 1976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울산공장 품질보증부에서 일했다. 회사를 다니며 홍익대 무역학과를 졸업했고, 내친 김에 산업공학 석사까지 마쳤다. 1990년 소비자보호업무를 담당하는 과장에서 퇴직한 후 창원에서 7년 동안 출고사무소를 운영했다. 이 때 산업공학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1997년 외환위기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였다. 현대자동차의 구조조정으로 임직원이 한꺼번에 퇴직을 하자 그는 출고사무소 영업권을 내놓았다. 그는 몽골 진출을 결심했다. 출고사무소 운영 시절 ‘줄친’ 이라는 몽골국영관광회사에 25인승 버스를 납품한 것이 인연이 됐다. 그는 몽골의 도로상태, 기후, 정비수준, 연료의 질 등을 연구한 후 차량을 개조해 납품함으로써 고객을 감동시켰다. 정몽구 회장 ‘현장경영’ 도움으로 급성장 1997년 줄친의 사장은 그에게 몽골에서 정비공장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의 달러 환율 급상승 여파로 몽골에서도 한국 자동차 주문이 쏟아졌다. 그런데 오래된 자동차는 잘 달리는데, 몇 년 안 된 자동차는 고장이 잦았다. 1993년부터 한국이 무연휘발유를 쓰며 자동차도 이에 맞춰서 나왔는데 몽골은 여전히 유연휘발유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무연차 900대를 모두 찾아서 공짜로 수리해 주었다. 본사를 설득해 정비인원을 지원 받았다. 몽골 신문 방송에서는 “현대가 중고차를 공짜로 수리해 준다”고 크게 보도했다. 아무리 낡은 차라도 현대에 가져가면 수리를 잘해준다는 소문이 퍼졌다. 중고 현대자동차 수입이 급증했다. 97년 현대차 점유율이 6.2%였는데, 99년 31.3%로 치솟았다. 김 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판단이 주효했다”고 공을 돌렸다. 99년 5월 몽골을 방문한 정 회장은 김 사장에게 “중고차 중심의 몽골시장에서 부품 갖고 장난치지 마라. 순정부품을 싸게 팔고 수리를 잘 해주어야 새 차 판매도 늘어난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몽골에는 부품을 싸게 공급해 주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몽골에는 연간 500만 달러 규모의 현대·기아차 부품시장이 만들어졌다. 신차 시장도 해마다 20~30%씩 성장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무상으로 공급하는 자동차를 제외하면 현대·기아가 신차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몽골현대기아자동차의 올해 신차 판매목표는 500대다. 김 사장은 이미 만들어진 시장에서 물건을 잘 판 사람이 아니다. 지역실정에 맞는 시장을 먼저 만들고 물건을 파는 마케팅 전문가다. 1999년 신차를 팔 요량으로 몽골 정부에 택시 도입을 건의했다. 이때부터 현대·기아차 1500대를 택시용으로 팔았고, 요즘도 매년 100대를 공급하고 있다. 그는 정비공장 동업을 정리하고, 몽골현대기아자동차를 설립했다. 독립법인의 사장이며 현대·기아자동차 몽골지사장이 된 것이다. 판매담당 김재수 이사, 정비·부품담당 엄정환 이사, 부품판매및 대형정비공장 담당 김종현 부장이 차례로 회사에 합류했다. 김재수 이사는 몽골여인과 결혼을 해 반은 몽골사람이 됐다. 70대 엄원섭 사장이 버스 민영화 주도 몽골 정부는 10년 의무교육을 시킨 유목민의 아들딸들을 정착도시로 끌어내고 있다. 캐시미어와 피혁, 고기가공 공장에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다. 이미 울란바타르(90만) 등 정착도시에 인구의 절반이상이 살고 있다. 한 달 6만~7만원을 받는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값싼 대중교통수단이 필요하다. 울란바타르에는 4개의 국영 버스회사가 있었다. 지난해 김 사장은 몽골의 시티택시회사, 서울의 한남운수와 합작으로 제2버스 회사를 인수했다. 올해는 제3버스 회사의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울란바타르 버스 수송률의 75%를 책임지게 된다. 제2버스회사는 비효율의 전형이었다. 보유버스 170대 중에서 제대로 굴러가는 것은 10여 대였다. 직원은 500명이고, 버스요금은 고작 200원이다. 이런 악조건에서 민영화를 성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김 사장 뿐이었다. 그는 엄정환 이사의 부친으로 서울경기양돈축협 조합장을 지낸 엄원섭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엄씨가 지난해 버스회사 사장에 취임할 때 나이가 71세다. 이들은 한국에서 차령 5년이 지난 버스를 들여와 자체 엔진보링공장에서 말끔히 정비를 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경비절감이 이루어졌다. 평균수명이 65세인 몽골사람들에게 70이 넘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엄 사장은 경이적인 존 2005-07-18
- “조금만 도움받으면 일어설 수 있는데…수급권자 되는 것은 피해야죠” 난소 종양 수술과 5년에 걸친 투병생활, 국가적 경제위기(IMF)로 가정경제 파탄, 결혼생활 15년 만에 남편과 이혼…. 지난 2002년 ‘모자가정’ 대열에 합류한 김선희(가명·46·경기도 안양시)씨. 그에게 지난 3년은 “수급자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다. 자선 베풀듯 정부지원을 제공하는 공무원들의 무성의한 태도에 움츠러들었다. 가난하면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편견에 상처받았다. 세 식구를 위한 공적구제망에는 정작 자립에 필요한 도움은 빠져있다. ◆“그런 제도 없어요” 무성의한 담당공무원 = 이혼 뒤 김선희씨에게 남은 건 10대인 두 아이와 빚 6000만원. 당장 생활이 막막해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담당 공무원의 첫 마디는 “친정어머니한테 가셔야지 여긴 왜 오셨어요?” 하는 물음이었다. “부양할 사람이 있는데 정부지원을 받으려 한다고 질책하는 것 같았어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귀띔만큼이나 저간의 사정을 들어주길 기대했건만 턱도 없었다. 실사기간에도, 이듬해 재심의를 할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사업하는데 얼마나 버느냐” “금융소득이 잡힌다”는 식이었다. 보험대리점을 폐업신고하지 못한데다 지인이 다단계 판매회사 회원등록을 해놓은 것이었다. 금융소득은 15년 전에 가입한 보장성 보험과 은행융자를 받는 조건으로 가입한 적금이었다. 은행부채나 세금기록을 살펴보는 배려는 없었다. “조금만 신경 쓰면 확인이 가능한데 그냥 겉으로 드러난 것만 문제를 삼은 거죠.” 싼 이자로 전세자금을 대출받을 자격이 된다는 안내문을 받고 문의했을 때는 황당한 답변도 들었다. “그런 제도는 없다”는 것이었다. 구청에서 동사무소에 연락을 취한 뒤에도 “기껏해야 700만원인데 그래도 신청하겠느냐”는 빈정거림을 들었다. ◆“가난하면 고졸로 만족해라” 구멍 난 정부지원망 = “모자가정 되면 생활비라도 보태주는 줄 알았는데 교육비 안내는 게 전부에요.” 그나마 큰 아이가 만 스무 살이 되는 내년이면 교육비 지원도 끝이다. 모자가정은 만 18세 이하(학생일 경우에는 20세) 자녀를 부양하는 어머니를 위한 ‘한시적’ 지원이라 그렇다. “가난한 집 애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돈 벌라는 거죠. 그렇지만 못 배운 아이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설 수 있겠어요? 따지고 보면 나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 이렇게 사는 건데 애들은 이 굴레를 벗어야죠.” 김선희씨는 “최소한 둘째 고등학교 학비만이라도 지원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씨가 절실한 것 중 하나는 의료지원. 보험수가의 20%를 깎아주는 모자가정의료비 할인증은 크게 보탬이 안 된다. 딸이 결핵을 앓을 때는 보건소 약만 먹였다. 그는 “미안한데 어쩔 수 없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 역시 종합검진 결과 심장질환과 갑상선 이상을 통보받았지만 정밀검사는 포기하고 산다. 김씨는 “의료비 전액지원이 힘들다면 긴급검사비만이라도 지원돼야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난 때문에 제대로 챙겨먹지 못해 병들고 몸이 아프면 일을 못하니 더 가난해지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다. ◆“나이 들어도 할 수 있는 일 찾아야죠”= 김선희씨는 보험회사 텔레마케터이자 이유식 대리점 점주다. 그래봐야 수입은 들쭉날쭉. 은행 이자와 생활비도 감당이 안 된다. 마이너스 통장에서 자동 인출되는 각종 공과금도 빚을 더한다. 김씨는 “생활비를 장기·저리로 대출해주거나 최소한의 여유가 생길 때까지 공과금 지불을 유예해준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학점은행제로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김씨의 또다른 직함은 ‘사치’스럽다. 운 좋게 보훈대상자인 아버지 둔 덕에 공짜 공부를 한대도 그렇다. 먹고 사는 게 급한데 공부는 해서 뭐하느냐는 거다. 김씨는 “그렇게 치면 애들도 당장 학교 그만두고 돈벌이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이 들어서 애들한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죠. 다행히 나는 아버지라는 좋은 끈이 있어서 이나마 준비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청소년단체와 한부모가족 지원단체 상담자원봉사를 지속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앞날을 대비해 경력을 쌓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자원봉사도 못하나요. 봉사는 사실 나를 치료하는 과정이기도 해요. 이 일을 하다보면 희망이 보이거든요.” 빚투성이 살림살이, 딸과 아들의 교육, 세 식구의 건강, 어느 한쪽이라도 좋다. “조금만 거들어준다면 곧 일어설 것”이라고 김씨는 자신했다. /기획특집2팀·사진 이의종 기자 2005-07-15
- 행복의 으뜸 ‘경제적 여유’ 직장인들은 행복을 느끼는 가장 커다란 요인으로 ‘경제적인 여유’를 꼽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건강과 화목한 가정생활 등이 뒤를 이었다. 온라인 채용포털 업체인 잡코리아가 전국의 남녀 직장인 1386명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직장인 행복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행복의 가장 커다란 필요조건으로 ‘경제적 여유’라고 답한 응답자가 23.5%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건강’이라는 응답이 20.1%로 뒤를 이었으며, ‘화목한 가정생활’(16.0%), ‘만족스러운 일’(15.3%), ‘개인적 여유시간 및 취미활동’(11.2%)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직장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현재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12.0%에 불과했으며, ‘보통이다’(47.8%)거나 ‘행복하지 않다’(40.2%)고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나마 행복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기혼이 17.4%로 미혼(10.1%)에 비해서 높게 나왔으며, 남성(12.5%)이 여성(11.3%)보다 약간 높게 나타났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 21.9%의 행복만족도를 보여 전체 평균의 2배에 달했으며, 대기업(18.7%), 벤처기업(14.1%), 중견기업(11.9%), 공기업(11.3%), 중소기업(10.0%)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 연봉이 많을수록 행복지수가 높은 것으로 조사돼, 연봉 5000~7000만원을 받는 직장인의 31.8%가 만족감을 나타냈으나, 3000~5000만원(19.9%), 2000~3000만원(13.5%), 2000만원 미만(8.6%)순으로 나타났다. 한편 현재 직장인들에게 가장 크게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으로는 ‘일과 직장생활’이 40.0%로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이어서 ‘경제력’이 28.4%로 뒤를 이었으며, ‘자신의 무능력’(14.4%), ‘인간관계’(4.7%), ‘결혼문제’(.4.2%) 등이 뒤를 이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2005-07-14
- 서초동 오피스텔 살인 용의자 검거 ‘서초동 오피스텔 20대 여성 피살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서초경찰서는 24일 숨진 김 모(29·여)씨의 이웃주민인 김 모(28·회사원)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긴급체포했다. 경찰에 따르면 용의자 김씨는 숨진 김씨 오피스텔에서 김씨를 강간한 뒤 목을 졸라 살해했으며 옆에 있던 김씨의 친구 황 모(29·여)씨를 흉기로 찌른 혐의(강간살인 등)를 받고 있다. 경찰은 김씨의 입안에서 채취한 DNA와 숨진 김씨의 몸에서 발견된 정액이 일치함에 따라 구속영장을 신청할 계획이다. 그러나 용의자 김씨는 범행일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 12일 서울 서초구 서초4동 ㄹ오피스텔 4층에서 혼자 사는 김씨가 목이 졸려 숨지고 김씨의 친구인 황씨가 흉기에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오피스텔이 보안장치가 잘 돼 있고 디지털 잠금장치가 있는 현관문 외에는 외부 침입 통로가 없으며 사라진 물건이나 금품이 발견되지 않아 범인이 일단 김씨와 면식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벌여왔다. 한편 숨진 김씨는 오는 12월 결혼 예정인 예비신부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승완 기자 osw@naeil.com 2005-08-24
- 문패:고령화·조기퇴직사회의 은퇴자들 은퇴보다는 일을 선택하는 사람들 늘어 퇴직후 직급 낮춰 근무하는 사례 많아 … 금융기관 3곳 120명 참여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조기퇴직이 일반화되면서 퇴직후를 고민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평균수명이 80세에 육박하고 있고 정년연령이 낮아짐에 따라 퇴직후 20~30년의 여생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들어서는 직장에서 직급을 낮춰서 근무하는 임금피크제나 자신의 전문성을 살린 창업이나 취업도 늘어나고 있다. 내일신문은 조기퇴직 사회에서 퇴직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례들을 소개한다. 글싣는 순서 1.우리에게 은퇴는 없다 2.은퇴후 어디서 살까(상·하) 3.은퇴를 준비하는 사람들(상·하) 어깨:임금피크제 받아들인 모 은행 김성모 부장 주제목:“밀려난 것이 아니라 일의 성격이 달라진 것” 일자리나누기의 한 형태인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금융기관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03년 7월 신용보증기금 직원 9명으로 시작했던 임금피크제는 산업은행과 우리은행이 동참하면서 현재 3개 금융기관, 120명이 참여하고 있다. 특히 이들 중 대부분은 해당 기관에서 지점장이나 부장 등 책임자로 근무하다 실무지원을 담당하고 있고, 일부는 후배 지점장 밑에서 근무하는 경우도 있다. 연공서열을 강조되고, 직급과 연봉을 낮추어 근무하는 것은 수치를 여기는 우리나라 기업 풍토에서 임금피크제가 확산되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내일신문은 지난 17일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인 모 은행 부장 김성모(56 가명)씨를 만났다. 이곳에서 28년째 근무한 김씨는 지난 1일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김씨는 자신이 퇴직 전부터 맡고 있던 업무를 신분만 바뀐 상태에서 계속 맡고 있다. 월급은 퇴직 직전에 받던 금액의 80%수준으로 정해졌다. 김씨의 월급은 앞으로 3년 동안 매년 조금씩 하향 조정된다. “은행을 그만둔 동기들 중에 절반은 사장이지만 나머지는 실업자다.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 회사를 나가서 창업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현재 대학에 재학 중인 두 아들의 결혼문제도 작용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의 직업은 결혼할 때 많은 영향을 미친다. 대학 졸업후 고시를 준비하던 김씨는 지난 77년 대학동기들보다 늦게 이 은행에 입사했다. 김씨는 30여년의 회사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전직을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은행생활 30여년 하면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어렵다. 이곳이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씨도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가족과 주위의 시선도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김씨는 정면돌파를 택했다. “친구들한테 고민을 이야기했는데 모두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이라고 하더라. 아내와 자식들도 이해를 해줬다.” 김씨는 현재 지원업무인 여신심사업무를 맡고 있다.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 행정부장직을 맡지는 못하지만 그동안 은행에서 배운 것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여신심사나 프로젝트 지원, 각 부서 전문위원 등 다양한 형태로 은행업무를 지원할 수 있다고 한다. 김씨는 정년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조언했다. “나이 때문에 밀려난다고 생각하면 스트레스만 늘어난다. 계약직으로 바뀌는 것은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김씨도 나이를 기준으로 한 임금피크제도는 앞으로 개선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이를 기준으로 할 경우 일은 쉬워도 조직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가 있다.” 김씨는 선진국처럼 우리 금융기관도 한 분야의 전문은행 키우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문가 양성을 통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을 나이에 상관없이 근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씨는 “개인금융서비스(PB), 여신업무 등 각자 잘하는 분야에서 전문가를 육성하고 한다면 나이에 따라 획일적으로 자르는 현상은 극복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씨는 최근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외국어 공부를 통해 퇴직후 직업 선택의 기회를 넓히겠다는 것이다. “4개 외국어 정도 능통하면 퇴직후에 먹고사는 문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주위에 보면 법정관리인이나 부동산 관련 공부를 하는 사람이 많다.” 기획특집2팀 = 신명식 윤영철 김진명 김은광 기자 msshin@naeil.com 박스기사 어깨:70대에 제2의 인생 개척한 엄원섭·석규관씨 엄원섭 - 71세에 해외에서 창업 석규관 - 71세에 학원강사에 도전 사오정(45세 정년)이나 오륙도(56세까지 회사에 남으면 도둑)라는 말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데 70세가 넘어서 새 인생을 개척한 사람들이 있다. 국내도 아니고 해외창업을 통해 국위선양과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엄원섭씨와 40대만 되도 환갑이 지난 것으로 평가받는 학원가에 강사로 나선 석규관씨가 그들이다. 엄원섭(72) 몽골현대씨티대형써비스공장 사장은 5년전에 몽골에 처음 갔다. 엄 사장은 5년 전까지 국내에서 서울경기양돈축협조합장을 지냈다. “몽골은 잠재력이 많은 나라다. 땅도 비옥해 식량자급률이 낮은 우리나라에게는 중요한 농산물 교역상대국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이곳에 진출했다.” 엄 사장은 농업쪽의 전망을 보고 몽골에 진출했지만 이미 몽골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아들의 권유로 자동차 정비회사인 몽골현대씨티대형서비스공장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차령이 오래된 버스나 포클레인, 화물차 등 각종 차량부품 정비 등을 맡고 있다. “몽골에는 오래된 차량이 많이 매연문제가 심각하다. 시장수요도 많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면 사업성공은 물론이고 한국의 이미지도 높일 수 있다.” 몽골에는 러시아에서 무상공급하는 자동차를 제외하고는 현대·기아차가 신차시장을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한국차 일색이다. 엄 사장은 지난해 아들이 근무하는 몽골현대기아자동차 등이 인수한 울란바트로 제2버스회사 사장을 맡았다. 우리 나이로 71세에 사장에 오른 것이다. 몽골의 평균수명이 65세인데 70세가 넘은 엄 사장의 도전은 현지인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엄 사장은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쉬지 말고 새로운 직업을 찾을 것을 권했다. “무슨 일이든 일에서 보람을 느껴야 한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더라도 쉬지 말고 일하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도 좋다.” 40세만 넘으면 원장으로 물러나거나 은퇴하는 학원가에서 70대의 강사로 복귀하는 사람이 있다. 석규관(71)씨는 오는 9월부터 서울YMCA에서 중국어 강좌를 진행한다. 40대 초반이었던 지난 75년 이곳에서 강의를 했다고 하니 30년 만에 같은 자리에 서는 셈이다. 석씨 강의를 맡기까지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력서를 들고 종로바닥을 돌아다녔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여러 번 퇴짜를 맞았다. 서울YMCA에서도 이사회를 거쳐 어렵게 강의를 맡았다. “강의실을 꽉 채울 수 있다고 장담했다. 젊은 사람들과 경쟁해도 자신있다고 하니 강의로 채용하더라.” 석씨는 중국어 전공자가 아니다. 대학(고대)도 정외과를 나왔다. 그러나 석씨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손문의 삼민주의에 심취해 중국어를 독학했다. 중국어를 배울 데가 마땅치 않아 중국집 주인에게서도 단어를 배웠다. 그는 지난 79년에야 45세의 나이에 대만 유학을 떠났다. 우리나라의 대학원격인 대만대학교 삼민주의연구소를 졸업한 후 귀국해 본격적으로 유명 입시학원과 단과학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중국어를 가르쳤다. 이 시기에 석씨는 수업시간에 당시 군부정권을 비판하다 수사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후 석씨는 최근까지 신문사 문화센터 등에서 중국어 강의를 계속했다. 석씨는 퇴직후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외국어공부를 권했다. “위험부담이 큰 창업보다 어학공부를 통해 취업기회를 넓히는 것이 좋다.” 해외사례-정년제도 없애는 선진국 도요타 “월급 절반만 받아도 일 2005-08-24
- 근대의 여명을 개척한 혁명적 부르주아지의 삶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장 마생 지음, 양희영 옮김, 교양인, 2만9000원 근·현대 인류역사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가져온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정치적으로 절대군주제를 쓰러뜨리고 공화정의 신기원을 개척해 근대 국민국가의 길을 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봉건적 구질서를 해체하고 신흥 부르주아지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근대 정신사상 세계의 이정표를 마련한 것도 프랑스 혁명이었다. 한마디로 프랑스 대혁명은 오늘의 서구사회를 있게 한, 그리하여 현재의 인류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 등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형성한 인류역사의 찬란한 금자탑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어떠한 혁명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민중의 피와 목숨을 요구하기도 하며, 선각자들의 위대한 고뇌와 선견지명이 혁명의 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또한 천지가 개벽하는 혁명의 과정에서 기득권층과 중간계급의 동요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서도 왕권을 중심으로 귀족과 성직자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구세력에 맞서 혁명적 투쟁을 전개한 민중과 이들의 벗이 된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있는 가하면, 구질서와 지배체제에 야합하고 변절하는 기회주의적 혁명세력은 필연적으로 분화과정을 거친다. 이 책의 주인공 로베스피에르는 1789년 촉발된 대혁명의 기간 중 사실상 유일하게 혁명적 절개와 지조를 유지하며 민중의 이익을 결사적으로 옹호한 혁명가이다. 자그마한 지방도시의 재판소에서 변호사 생활을 통해 형성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그의 민중사랑은 1789년 삼부회의 소집과 함께 제3신분의 대표로 의회에 진출해 수도 파리에 입성하면서 찬란하게 꽃피우게 된다. 삼부회→제헌의회→입법의회→국민공회 등을 거쳐 1893년 공포정치가 시작되고, 1894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과 5년의 세월동안 그는 의회안과 밖에서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위해 불꽃같이 살았다. 그는 의회에서 일관되게 민중의 위대성과 구체제의 죄악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1790년 5월 18일 로베스피에르는 의회에서의 발언을 통해 국왕은 결코 ‘국민의 대표’가 아니며, ‘국민의 의지를 집행할 국민의 대리인이자 피위임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어떠한 권력도, 그것이 아무리 위엄 있는 것이라 해도 민중의 대표라는 자격을 가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의회 내에서 수많은 개혁적 조치들도 제안하고 대다수가 부결됐지만 뚜렷한 족적도 수없이 남겼다. 성직자의 결혼을 허가하고, 구질서에서 무한정의 권한을 누리던 성직자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성직자 민사기본법’을 제정했으며, 공명정대한 재판소의 조직과 함께 수없이 터져 나오는 혁명적 민중들의 각종 소요에 대한 옹호책을 제시했다. 특히 외국과의 전쟁에 대한 일관된 반대는 그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보여줬다. 혁명의 초기 프랑스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과 전쟁에 휩쓸리지 않은 것은 사실상 그의 일관된 전쟁반대 정책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배세력은 끝내 1792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시작했으며, 이로 인한 식량부족과 물가폭등으로 혁명의 분위기는 더욱 앙양되었다. 이처럼 혁명의 기운이 높아지자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세력의 근거지인 루이 16세의 폐위와 새로운 의회의 구성을 요구했으며, 민중들은 1792년 8월 10일 왕이 살고 있는 튈르리 궁을 습격해 왕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1793년 6월 최초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 프랑스를 수립했다. 국민공회의 출범과 함께 의회는 상퀼로트(민중)의 요구사항을 받아 들이 수밖에 없었으며, 속속 관련 법률들이 제정됐다. 민중들의 합법적인 공포정치가 구세력을 엄습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들은 분파가 갈라지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통파(온건파)는 로베스피에르를 과격파라고 비난했으며, 에베르파(과격파)는 그를 온건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실권을 장악한 이후 끝내 이들 과거의 동지들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으며, 혁명은 그를 최후의 승자로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국민공회 의원들은 정파를 막론하고 한데 뭉쳐 로베스피에르에게 어떠한 반론의 기회도 보장하지 않은 채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그를 체포했으며, 그는 다음날 단두대의 이슬로 스러졌다. 비록 36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의 혁명적 지조와 민중에 대한 열정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살아났다. 그는 1790년 12월 5일 의회연설에서 “민중의 이익과 소망은 천부의 것이며 인류의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이익이다. 민중을 비탄에 빠뜨린 폐해는 언제나 부자들로 인한 것이었다. 누가 우리의 영광스러운 혁명을 수행했는가. 부자들인가. 권력자들인가. 민중만이 혁명을 열망할 수 있었고 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말해 혁명의 주체가 민중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 책은 로베스피에르의 생생한 연설과 문서가 되살아나 혁명의 한가운데로 이끄는 마력을 느끼게 할 것이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2005-08-22
- <장행훈 칼럼>에바 졸리 ‘검사’와 <파리 선언>(2005.08.23) 에바 졸리 ‘검사’와 한국 검찰이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18일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의원은 옛 안기부의 X파일에서 삼성으로부터 적게는 몇 백만 원 많게는 몇 천만 원의 “떡 값”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전 현직 검사 7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검찰 내부에 “삼성 장학생”이 있다는 풍문이 나돌고 있는지 오래다. 금년 들어 검찰의 “기라성 같은” 전직 간부들이 삼상에 “영입”됐다. 삼성으로서는 검찰을 “잘 관리”해온 성공 사례가 될지 모르겠으나 검찰로서는 결코 자랑스러운 기록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떡 값”도 흔히 쓰는 용어로 “대가성”이 딸린 돈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순수한 떡값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떡 값“이 당장의 대가성이 없었는지는 모르나 불확정 미래의 ”호의“를 기대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선물(先物)대가성“이 내포된 선물(先物)성 뇌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아예 ”떡 값“을 받지 않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 한국처럼 대기업으로부터 ”떡 값“을 받는 검찰이 있는가. 요즘 한국 검찰을 보는 국민의 눈은 차갑다. 형식적 법률 논리를 내세워 도청 내용으로 드러난 불법 행위보다 도청의 불법성 자체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여기에도 삼성이 관련돼 있다. 검찰의 앞으로의 수사 과정을 국민이 주시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한 때 프랑스 검찰도 오늘의 한국 검찰과 비슷했다. 검찰은 거물 정치인이나 대기업이 관련된 사건을 국민들이 속 시원하게 처리해 주지 못했다.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높았을 리 없다. 이러한 분위기에 일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것이 노르웨이 출신의 여성 예심판사(역할은 검사) 에바 졸리였다. 1964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 오 페어(au pair)로 들어 왔다가 그 집 장남과의 결혼으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에바는 주경야독으로 38세에 뒤늦게 판사가 되는데, 92년 파리 법원의 예심판사로 임명된 이후 정상급 정치인과 대재벌 회장이 연루된 대형 부패사건을 소신껏 처리해서 언론의 각광을 받는다.. 에바 졸리를 스타로 만든 사건이 94년에 터진 국영 석유회사 엘프 스캔들이다. 37명의 프랑스 정계 재계 거물들이 연루된 대 사건이다. 7년 남짓 끈 사건에서 에바 졸리는 엘프 회장을 지낸 현직 철도공사 회장을 구속 기소한다. 미테랑 대통령 아래서 외무장관을 지내고 헌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거물 정치인 롤랑 뒤마를 배임죄로 기소한다. 과거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프랑스 언론과 국민은 여성 예심판사(검사)의 용기에 격려를 보내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반면 프랑스의 보수 정치인과 재계는 그를 극도로 증오했다. 이 “불장난 하는” 예심판사가 어디까지 나라를 흔들어 놓을지 모른다고 전전긍긍했다. 에바 졸리는 상관의 눈치나 보고 우유부단한 동료 예심판사들을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용기 있는 젊은 검찰이 에바 졸리와 호흡을 같이 했다. 80년대 이태리에 가 있었다면 90년대 프랑스에는 에바 졸리와 새 세대 검사(예심판사)들이 있었다. 에바 졸리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역 공세는 만만치 않았다. 그가 “외국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루머까지 퍼트렸다. 에바 졸리는 엘프 사건 자전적 저서 (2003)에서 수사과정에 내부의 압력도 받았고 생명의 위협도 있었다고 폭로했다. 외부의 압력과 정신적 고민에 지친 에바 졸리는 2001년 남편이 사망하자 마침내 예심판사 직을 사임하고 2002년 모국인 노르웨이로 돌아가 외무부의 반부패 분야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에바 졸리는 지금도 일반 프랑스인에게는 용감한 검찰의 상징이다. 그는 기구를 조직하고 2003년 6월18일에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의 디 피에트로 검사 등 세계적으로 저명한 검사 14명과 함께 반부패 투쟁을 위한 을 발표했다. 은 특히 대형 부패 사건의 거물 범인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 처벌면제 현상을 강하게 규탄하고 있다. 처벌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의 엘리트로 법보다 더 힘이 세기 때문에 법 위에 살면서 불법행위를 저지르고도 처벌 받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이것은 거꾸로 가는 세상이다. 지도층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있을 수 없다.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 경제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으며 엘리트들이 사실상 법을 위반하고도 처벌 면제의 보장을 받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하고 파리 선언은 묻는다. 한국의 검찰에게 묻는 질문일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부패를 범하고도 처벌을 면제 받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검찰의 몫이라는 것이 파리 선언의 요체다. 에바 졸리는 이 점에서 우리의 좋은 모범이었다. 장행훈 . 2005-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