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초기' 검색결과 총 9,846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인터뷰 - 유상욱 그랜드성형외과 원장 눈밑주름 없애면 10년이 젊어보인다 새 수술법 개발 … 절개부위 적어 부기 없고 회복 빨라 미의 기준은 젊어보이는 것 … 수술 뒤 삶의 활력 찾아 “눈밑을 길게 절개하는 기존의 눈밑 주름 수술은 주름을 없앴지만 눈밑에 두툼하게 있는 이른바 애교살이 없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애교살이 없어지면 왠지 인상이 차가워지고 심지어 사나워 보이기도 한다는 게 환자들의 불만이었습니다.” 유상욱(38) 그랜드성형외과(www.grandsurgery.com) 원장은 환자들의 목소리에 귀을 기울이다보니 새로운 눈밑수술법을 개발하게 됐다고 새 수술법을 창안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발상의 전환으로 만족도 높여 “기존 수술법의 단점을 파악하고 새로운 수술방법을 고민하게 됐습니다. 고민 끝에 새로운 수술법을 개발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막상 임상을 하려니 자신감이 덜했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이 수술법의 첫 사례가 됐습니다.” 유 원장은 지난 2004년 자신이 새로 개발한 수술법을 어머니에게 시술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주름도 잘 제거됐고 애교살이 더 도톰해져 나이보다 더 젊어보였다. 어머니도 대만족이었다. 이 수술법을 ‘눈밑 주름 외안각교정술’로 명명한 유 원장은 “1년반동안 1000번정도 시술했다”며 “환자들의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눈밑 주름 외안각교정술은 그랜드성형외과만이 시술하고 있다. 이 수술법은 늘어난 근육과 피부를제거하지 않고 눈의 가장자리인 외안각에 고정시켜 주름을 당기는 원리이다. 수술은 간단하다. 마취 뒤 눈밑 주름의 주 원인인 안륜근을 실로 끌어올려 눈 밑의 탄력성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애교살 아래 처진 피부는 수술범위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에 피부가 과도하게 당겨지는 것을 막는다. 이는 인상의 큰 변화없이 눈밑 주름을 없앨 수 있다. 이 수술법은 절개를 하지 않기 때문에 흉터 걱정없이 주름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강점이다. 수술부위가 붓거나 눈이 뒤집어지는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는다. “기존 방법은 늘어진 피부를 절개하고 아래쪽에서 당기는 원리라면 새 수술법은 애교살쪽으로 당기는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죠.” 이 수술법을 사용할 경우 수술시간은 기존의 1시간 이상에서 10~15분으로 단축된다. 회복기간도 열흘이상에서 3~4일로 크게 줄어든다. 절개부위가 작기 때문에 부기가 없으며 일상생활에 당장 복귀가 가능하다. 시술 당일날 세안이나 화장도 할 수 있다는 게 유 원장의 설명이다. 피부 노화는 20대 후반부터 시작 다른 사람 눈에 가장 먼저 띄는 노화 표식은 얼굴의 주름이다. 얼굴에 하나둘 생기게 되는 주름은 그 사람의 연륜이자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얼굴 주름 가운데도 눈밑 주름은 가장 먼저 다른 사람이 알아챈다. 대화를 할 때나 사람을 만날 때 눈을 가장 처음 보는 만큼 자연스럽게 눈밑 주름도 눈에 들어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주름의 원인은 피부 진피층에 탄력을 유지하는 콜라겐과 엘라스틴 합성이 나이가 들면서 감소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또 자외선 환경공해 식생활 담배, 계절변화와 같은 외적인 요인과 스트레스, 질병, 혈액순환 장애, 유전 등 내적인 원인으로 피부노화가 급속히 진행된다. 특히 피부가 얇은 사람에게 주름이 빨리 나타난다. 즉 노화가 일찍 시작된다는 뜻이다. 인종으로는 백인이 가장 빠르고 다음이 동양인 흑인 순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피부노화가 일찍 찾아온다. 젊었을 때 피부가 좋다는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더 빨리 늙어보인다. 노화가 일찍 시작돼 잘 처지고 잔주름도 많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 노화가 시작되는 20대 후반부터 관리해야 한다. 유 원장은 “자신의 피부가 지성인지 건성인지 파악하고 그에 따라 관리를 해야 한다”며 “세안으로 자신에 맞는 적당한 수분과 유분을 조절하면 된다”고 말했다. 취업·결혼 앞두고 찾는 이 많아 예전에는 주름제거수술은 여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30대후반부터 40대까지 남성들의 이용이 늘고 있다. 이들 남성들이 전체 환자의 20%를 차지할 정도. 예전수술은 며칠씩 사회생활에 지장이 있다보니 부담스러워했으나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자 남성비중이 높아졌다는 유 원장의 설명이다. 결혼이나 취업을 앞둔 사람들이나 보험업과 판매업 등 젊어보이고 활력이 있어야 유리한 직종에 종사한 남성분들의 이용이 잦다. 기존 수술 뒤 다시 주름이 생겨 피부가 쳐진 환자들도 4~5년이 지났다면 새로운 방법으로 재수술이 가능하다. “주름제거 수술은 젊어보이려는 욕구의 충족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젊어보이는 연령대를 길게가져가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 원장은 항노화(anti-aging)로 자신감을 되찾고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20대때는 부분적인 생김새에 신경을 많이 쓰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어보이는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자연스러움 속에서 아름다움을 유지하다보면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26
- “결혼·회갑연 영수증 꼭 챙기세요” 결혼식과 회갑연 등을 위해 예식업체를 찾는 시민들은 영수증을 오랜 기간 보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세청이 예식업체 세무조사를 위해 이용객에게 증빙서류 협조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강동구에 사는 서 모(59)씨는 지난 19일 서울지방국세청 명의의 협조공문을 받았다. 공문에는 ‘귀하가 모 예식장을 사용하신 사실이 있어 자료제출 협조를 요청하오니 확인서를 작성하신 후 팩스 또는 우편으로 송부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취지의 내용이 적혀 있다. 거래사실 확인서에는 △예식의 종류 △예식의 주체·성별 △현금·카드 지불 △금액 등에 대한 항목을 묻고 있다. 또한 현금 결제의 경우 거래증빙영수증을 동봉해 반송해달라는 요구와 관련 문의를 위한 담당자 이름과 전화번호도 적혀 있었다. 서씨는 “국세청에서 공문을 처음 받았기에 깜짝 놀랐다”며 “전화로 문의해보니 지난해 4월 아들이 결혼식을 치렀던 예식장이 매출 누락을 했기에 조사하는 것이라는 답변이 왔다”고 말했다. 국세청이 최근 결혼식장과 회갑연장 등 매출 누락이 의심되는 예식업체에 대해 세무조사에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지방국세청 국제거래조사국 3과 4반 김영균 조사관은 “조사 내용은 비밀이라 말할 수 없으며 공문을 보낸 사실은 맞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국세청의 조치가 ‘행정편의주의’라는 지적도 나온다. 협조공문이라지만 조사항목이 자세하고 관련증빙 서류를 이용객에게 동봉해 반송하라는 것은 지나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앞서 서씨는 “국세청이라면 무서운 기관이라는 생각에 기한에 맞춰 공문을 반송했다”며 “결혼식장을 이용한 시민이 한둘이 아닐텐데 그 많은 사람이 영수증을 찾아야 하고, 없으면 식장에 가 다시 떼 와야 한다는 것은 행정기관의 편의만을 고려한 처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씨는 또 “어떻게 협조대상을 선정해 공문을 보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김 조사관은 ‘협조대상의 선정과정’에 대해 “몇 명에게 협조공문을 보냈는지, 조사대상 업체가 구체적으로 어떤 혐의인지는 공무상 비밀”이라고 답변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26
- 처음 마음으로 다시 출발 할래요 입사 초부터 뛰어난 실적으로 억대연봉을 받던 미모의 미혼 설계사. 회사내 각종 홍보모델은 물론이고 회사를 대표해 홈쇼핑에 출연. 주변의 관심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것은 당연한 일.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며 잘나가던 시절이다. 남부러울 것도, 두려움도 없었다. 대한생명 종로지점 남학영업소 FP(재무설계사)로 활동중인 김혜옥(36)씨의 몇 해 전 모습이다. ◆갑자기 찾아온 시련 = 호사다마라고 했나. 아무것도 거칠 것 없던 김 씨에게 시련이 찾아온 것은 2004년 4월. 갑자기 쓰러졌다. 뚜렷한 원인도 알 수 없었다. 잠시 괜찮아지는가 싶더니 그해 말 또 쓰러졌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에 다시 한 번 모두 세 번 쓰러졌다. 3개월이 넘는 검사를 거쳤다. 스트레스 등으로 신장에 이상이 생겨 발생한 급성 신우신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1년이 넘는 이 기간 동안 김씨가 관리하던 고객들 가운데 상당수는 떨어져 나갔고 실적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어졌다. 최고 설계사 집단인 에이스 클럽에서도 탈락했다.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주위에서는 격려의 말로 용기를 줬고, 병원에 위문까지 오는 고객까지 있었다. 또한 지난해 6월 결혼을 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처음 설계사 생활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고객들을 관리해 줘야 할 설계사가 아파서 입원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 땐 몰랐어요. 지금도 제 곁에 남아있는 고객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에요.” ◆설계사 됐다고 머리까지 잘려 =김씨는 지난 98년 4월 29세의 나이로 대한생명 FP로 입문했다. FP가 되기 전엔 그래픽 디자이너로 6년 정도 활동했다. 과장진급까지 해 디자이너로서도 한창 때였지만 김 씨는 과감히 그만뒀다. 김씨는 “디자이너라고 하면 남들이 보기엔 좋아보여도 야근과 철야 등 몸이 많이 힘들어요. 또 같이 입사해도 남성 직원과 차별대우를 받은 경우도 많죠.”라며 속내를 털어놨다. 당시 생활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김씨가 지금처럼 FP가 될 것이라고는 본인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다. FP에 대해 내심 편견과 혐오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다가 당시 매일 사무실을 찾던 FP와 인연이 돼 교육을 받고 본격적으로 보험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집안에도 숨겼다. 한 달후에 들통이 났다. 허리까지 길게 길렀던 머리카락이 잘리고 외출금지령이 떨어질 정도로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한 번 마음먹은 김 씨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김씨는 선천적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보험업이 상품에 대한 설명을 할 때도 열변을 토한다. 오죽하면 성대결절까지 올 정도다. 성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처음 쓰러지기 전에는 1년 8개월 동안 매주 2건 이상씩의 종신보험 신계약을 체결했다. 매년 100건 이상 신계약을 맺었고 연봉까지 억대를 넘어섰다. ◆수박 한 통이 맺어준 인연 = 김 씨의 고객 가운데 한 사람은 매월 700만원씩 정도씩 들어오고 일시납만 몇 억 원에 이르는 고액계약자가 있다. 만나게 된 사연은 흥미롭다. 7년 전 사무실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는데 내용인즉 ‘자신을 담당했던 설계사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 약속한 것도 처음과 달라졌다는 등의 불평이 가득했다. 화가 머리끝가지 나 있던 이 고객에게 김 씨는 먼저 사과했다. 그리고 직접 찾아가서 만났다. 상계동에 살고 있던 사람인데 여름에 무거운 수박을 들고 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찾아가는 모습이 믿음이 갔던 모양이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보기엔 검소해 보인 그 고객은 큰 청과물 사업을 하는 사장이었다. 수박은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수박 속에 담긴 김 씨의 마음이 대견했던 것이다. 그게 단초가 돼 지금까지 7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고, 모두 22건의 계약을 체결했다. ◆“보험은 가치와 사랑을 판매하는 일” = 김씨는 본인 스스로 아프면서 보험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절감했다. 병원비와 치료비 등을 직접 보장받아봤기 때문에 더욱 확신에 차 있다. 김 씨는 보험에 대해 공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는 모르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면 공기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알게 되잖아요. 내가 막상 닥치고 아파보면서 보험에 대해 더욱 고마움을 느끼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또한 보험으로 혜택을 받은 고객들의 행복감을 느낄 때 역시 보험은 가치와 사랑을 판매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가입자가 사망했을 경우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은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늘 보람이다. 어떤 고객은 어머니가 보험을 들었는데 김 씨가 권유를 해 아버지까지 함께 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았고, 1000만원을 수령했다. 나중에 그 고객이 상품권을 들고 와서 인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상품권을 끝까지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밥까지 김 씨가 샀다. 그 고객은 이런 모습에 더욱 신뢰를 느껴 주위 사람을 4명이나 더 소개시켜줬다. 김 씨는 “제가 그냥 장사꾼이었다면 그냥 상품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보험 장사꾼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FP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2년의 좌절을 딛고 시작하는 병술년. 개띠해 개띠인 김씨의 재도약이 기대된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26
-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출발 할래요 문패: 보험왕 그들에겐 특별한 게 있다. = 대한생명 김혜옥(36) FP 제목: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출발 할래요 입사 초기부터 뛰어난 실적으로 억대연봉을 받는 미모의 미혼 설계사.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동안 최고 설계사 집단인 에이스 클럽회원 가입. 회사내 각종 홍보모델은 물론이고 회사를 대표해 홈쇼핑에 출연. 주변의 관심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것은 당연한 일.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며 잘나가던 시절이다. 남부러울 것도, 두려움도 없었다. 대한생명 종로지점 남학영업소 FP(재무설계사)로 활동중인 김혜옥(36)씨의 몇 해 전 모습이다. ◆갑자기 찾아온 시련 = 호사다마라고 했나. 아무것도 거칠 것 없던 김 씨에게 시련이 찾아온 것은 2004년 4월. 갑자기 쓰러졌다. 뚜렷한 원인도 알 수 없었다. 잠시 괜찮아지는 가 싶더니 그해 말 또 쓰러졌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에 다시 한 번 모두 세 번 쓰러졌다. 3개월이 넘는 검사를 거쳤다. 스트레스 등으로 신장에 이상이 생겨 발생한 급성 신우신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1년이 넘는 이 기간 동안 김씨가 관리하던 고객들 가운데 상당수는 떨어져 나갔고 실적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어졌다. 3년 연속 가입했던 에이스 클럽에서도 지난해 탈락했다.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주위에서는 격려의 말로 용기를 줬고, 병원에 위문까지 오는 고객까지 있었다. 또한 지난해 6월 결혼을 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처음 설계사 생활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고객들을 관리해 줘야 할 설계사가 아파서 입원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 땐 몰랐어요. 지금도 제 곁에 남아있는 고객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에요.” ◆설계사 됐다고 머리카락까지 잘려 =김씨는 지난 98년 4월 29세의 나이로 대한생명 FP로 입문했다. FP가 되기 전엔 그래픽 디자이너로 6년 정도 활동했다. 과장진급까지 해 디자이너로서도 한창 때였지만 김 씨는 과감히 그만뒀다. 창조적 직업에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또한 김씨는 “디자이너라고 하면 남들이 보기엔 좋아보여도 야근과 철야 등 몸이 많이 힘들어요. 또 같이 입사해도 남성 직원과 차별대우를 받은 경우도 많죠.”라며 속내를 털어놨다. 당시 생활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김씨가 지금처럼 FP가 될 것이라고는 본인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다. FP에 대해 내심 편견과 혐오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다가 디자이너로 일할 당시 매일 사무실을 찾던 FP와 인연이 돼 교육을 받고 본격적으로 보험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집안에도 비밀에 부쳤다. 한 달 동안 집안에 숨기다가 나중에 들통이 났다. 허리까지 길게 길렀던 머리카락이 잘리고 외출금지령이 떨어질 정도로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한 번 마음먹은 김 씨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김씨는 선천적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보험업이 상품에 대한 설명을 할 때도 열변을 토한다. 오죽하면 성대결절까지 올 정도다. 성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처음 쓰러지기 전에는 1년 8개월 동안 매주 2건 이상씩의 종신보험 신계약을 체결했다. 매년 100건 이상의 신계약을 맺었고 연봉까지 억대를 넘어섰다. ◆수박 한 통이 맺어준 인연 = 김 씨의 고객 가운데 한 사람은 매월 700만원씩 정도씩 들어오고 일시납만 몇 억 원에 이르는 고액계약자가 있다. 이 고객과 만나게 된 사연은 흥미롭다. 7년 전이다. 사무실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는데 내용인즉 ‘자신을 담당했던 설계사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 약속한 것도 처음과 달라졌다는 등의 불평이 가득했다. 화가 머리끝가지 나 있던 이 고객에게 R김 씨는 먼저 사과했다. 그리고 직접 찾아가서 만났다. 상계동 주공 APT에 살고 있던 사람인데 여름에 무거운 수박을 들고 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찾아가는 모습이 믿음이 갔던 모양이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보기엔 검소해 보인 그 고객은 큰 청과물 사업을 하는 사장이었다. 수박은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수박 속에 담긴 김 씨의 마음이 대견했던 것이다. 그게 단초가 돼 지금까지 7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고, 모두 22건의 계약을 체결했다. ◆“보험은 가치와 사랑을 판매하는 일” = 김씨는 본인 스스로 아프면서 보험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절감했다. 병원비와 치료비 등을 직접 보장받아봤기 때문에 더욱 확신에 차 있다. 김 씨는 보험에 대해 공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는 모르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면 공기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알게 되잖아요. 내가 막상 닥치고 아파보면서 보험에 대해 더욱 고마움을 느끼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미혼일 때 김 씨는 “결혼하면 그만 둘 것이지?” 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내가 먼저 죽지 않는 한 절대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답했다고 한다. 보험으로 혜택을 받은 고객들의 행복감을 느낄 때 역시 보험은 가치와 사랑을 판매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가입자가 사망했을 경우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은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늘 보람이다. 최근에도 27세 미혼여성이 유방암에 걸렸는데 4000만원을 수령해 성형수술까지 가능하게 됐다고 한다. 젊은 여성으로서 치명적일 수 있는 상황을 보험이 도와준 것이다. 또 어떤 고객은 어머니가 보험을 들었는데 김 씨가 권유를 해 아버지까지 함께 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았고, 1000만원을 수령했다. 나중에 그 고객이 상품권을 들고 와서 인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상품권을 끝까지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밥까지 김 씨가 샀다. 그 고객은 이런 모습에 더욱 신뢰를 느껴 주위 사람을 4명이나 더 소개시켜줬다. 김 씨는 “제가 그냥 장사꾼이었다면 그냥 상품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험 장사꾼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FP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항상 열정이 끓어 넘치는 김 씨. 2년간의 좌절을 딛고 다시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가장 먼저 아플 때도 묵묵히 자기를 믿어준 고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병술년에 개띠해에 개띠인 김씨의 재도약이 기대된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26
- [신문로]폭력 불감증을 바라보며 폭력 불감증을 바라보며 김 혁 종 (광주대총장) 40대 이상의 세대에게 ‘폭력’이라는 말은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다. 수많은 폭력을 대면하면서 무감각하게 살아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학창시절엔 초, 중, 고를 가릴 것 없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에, 군 시절엔 ‘군기’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40여 년 넘게 때로는 가해자로 때로는 피해자로 육체적, 정신적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오다 보니 ‘폭력’의 폐해에 무감각해져온 그 세대가 현재 우리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어느 세대보다 폭력의 실체를 이해하고 있는 이 세대가 굳은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사회로부터 폭력을 없앨 수 있을 듯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광기 어린 폭력의 피해자 입장에서 탈바꿈하여 이제는 도리어 폭력에 대한 불감증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도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고, 부지중에 폭력을 대물림하는 악역도 맡고 있다. 한국사회의 폭력성은 이제 국내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3D업종에서 일을 하고 있는 대다수 동남아 출신 근로자들의 입을 통하여 고발되는 한국에서의 가장 참혹한 경험은 수시로 행해지는 무차별적인 폭력과 욕설이었다. 그들의 입을 통하여 고발되는 치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어서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돈 많은 폭력배 이상이 아니다. 구타당하는 아내, 매맞는 청소년 1992년의 보건복지부 보고와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남편의 60% 정도가 결혼이후 한번 이상의 아내구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우리나라 부부 중 34.1%가 1년에 적어도 한차례 이상의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미국보다 2배 이상 많고, 홍콩보다는 3배 가까운 발생률이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동학대 또한 근절되기는커녕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소아정신과 의사들은 아동학대가 대부분 근친간에 이루어져 실상이 숨겨지고 있을 뿐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소아청소년 정신의학회지에 따르면 ‘심하게 매를 맞아본 적이 있다’는 청소년의 비율이 86년 조사에서는 66.2%였으나 92년에는 96.4%나 됐다. 근절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일상화되고 있는 폭력은 사회적 불감증으로 연결되면서 더 큰 맹위를 떨친다. 폭력의 심각성만 노출시켰지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교육이 미흡하다 보니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 악순환의 패턴은 피해자들의 정신을 황폐화시킬 뿐만 아니라 바로 그 피해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학습한 폭력을 통해 가학적인 폭력 행위나 잔인한 살인행위, 자기정체성 혼돈 등 더 큰 부작용으로 표출되고 있다. 최근 시위 진압에 나서는 전·의경들에게 명찰을 패용하게 하자는 안이 나와 경찰 안팎에서 논란이 뜨겁다.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나 시민단체들은 이에 찬성하는 쪽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경찰의 집회시위 관리도 행정활동인데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며 명찰 패용에 대한 찬성 이유를 밝혔고 경찰 내부에서도 “명찰은 지나치게 흥분한 대원에 대한 통제 효과가 있을 것 같다”는 찬성 의견이 있었다. 먼저 폭력 가한 사람부터 처벌을 그러나 상당수의 경찰과 전·의경을 자녀로 둔 부모들은 “시위가 평화적으로만 진행되면 문제될 것이 없고, 불법 시위자에 대한 처벌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해 시각차가 확인됐다. 현재의 시위 양상을 보면 시위대가 먼저 폭력을 행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발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시위 진압 경찰을 처벌하기 위해 명찰을 패용하게 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나는 일이며 폭력 근절을 위한 최선책도 아니다. 누가 되었든 먼저 폭력을 행사한 행위자에 대하여 엄단하는 국민적 공감대가 선행되어야 한다. 폭력 없는 사회와 가정, 학교를 만들기 위해 서로 양보하고 혜안을 모으는 과정과 절차들이 먼저 필요한 것이다.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는 미개한 사회일 뿐이다. 세계 속에서의 문명국 운운은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이성적이고 성숙한 사회를 만들고 난 다음의 일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23
- ‘묻지마’ 펀드 체질개선하고 가자 펀드에도 ‘묻지마’ 투자가 있을까? 그렇다. 이른바 ‘묻지마’ 펀드의 경우 특히 조정장에서 더 도드라진다. 매순간 주가의 움직임에만 신경을 곤두세울 뿐더러 유난히 매수 매도 시점을 찾지 못해 불안·초조해한다. 이재순 제로인 펀드분석팀장에 따르면 “시장 상황이 이런데 환매해야 하느냐 갖고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묻지마 투자일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펀드는 장기투자이고 조정은 2~3년 주기로 찾아온다. 시장 분위기나 옆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매수나 매도를 결정할 게 아니라는 얘기다. 대표적인 묻지마 투자 유형은 무조건 펀드의 수익률만 따지고 따라가는 경우. 조한조 한국증권 펀드평가팀 연구원은 “펀드투자의 기본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모두 묻지마 투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펀드도 공부가 필요하단다. 이번 조정장은 좋은 기회.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는데 쉬는 김에 ‘묻지마’ 체질을 떨어버리고 갈 수 있다. 전문가들은 “2005년의 ‘대박’ 기억을 잊고 목표수익률을 하향조정한 뒤 포트폴리오를 분산하라”고 입을 모았다. ◆안정성 높이며 분산투자 = 30대 초반의 미혼 여성 A씨. 지난 12월 결혼 준비용으로 가입했던 1000만원짜리 적금을 찾았다. 결혼까지는 1년 이상이 남았기에 이 돈을 어떻게 굴릴까 궁리하다가 이달 초 ‘유명 브랜드’ 주식형 펀드에 거치식으로 넣었다. 올 한해 전문가들이 권하는 펀드 전략의 기본은 ‘목표 수익률을 낮추고 자산 배분 차원에서 포트폴리오를 분산하라’는 것. 이재순 제로인 팀장은 “시장 전망을 본다면 대형 성장주가 기대수익 측면에서 장점이 있지만 고수익보다는 안정성에 치중하는 게 나아 보인다”고 조언했다. 변동성이 큰 환경에서 방어력이 뛰어난 배당주쪽에 관심을 가지라는 얘기다. 이병훈 모닝스타코리아 펀드분석팀 과장은 “거치식으로 투자하는 주식형 펀드는 전문가가 운용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직접 투자와 비슷하게 움직인다”며 “이익이 많이 난 펀드를 중심으로 주식형의 비중을 줄이고 안정성을 높이는 쪽으로 움직이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혼합형펀드 안에서 주식의 비중을 조절하는 형태를 권했다. 목표 수익률은 투자기간과 개인적인 위험 선호도에 따라 달라진다. 수익률 예측이 쉬운 채권형을 기준으로 투자 비율을 역산하면 된다. 펀드 스타일은 최근 시장 변동 특성에 따라 고를 수 있다. 수익률을 그 자체로 볼 것이 아니라 펀드의 특성을 이해하는 단서로 활용해야 한다. 조정장에서 상대적으로 덜 깨진 펀드라면 보수적으로 운용하고 있으며 그만큼 하락장에서 방어력이 있다는 의미. 변동기에 위험이 적다. 평균보다 더 깨진 것은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의미. 반면 상승장에서는 수익률이 높다. ◆단기자금은 예금이 낫다 = 40대 초반의 B씨. 지난 여름 은행 창구직원의 권유로 가입한 펀드 덕에 하반기가 즐거웠다. 매달 40만원씩 적립하는 계좌가 둘이었는데 연말에 신규 가입해 총 투자금액을 200만원으로 늘렸다. 내년 상반기에 아파트에 입주해야 해서 1억원 가량 현금이 필요한데 그때 모든 펀드를 해약할 계획이다. 목돈 마련과 은행금리보다 나은 수익률. 보통의 적립식 펀드 투자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내용이다. 1년 이상 투자한다면 그 정도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크지만 확정금리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세진 포도에셋 상담팀장은 “펀드는 이익이 나도 손해가 나도 돈을 빼기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거치식이라면 정작 자금이 필요한 순간에 큰 폭으로 깨질 수도 있으니 사전에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이병훈 모닝스타코리아 과장은 “수익률이 나쁠 때도 견뎌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재순 제로인 팀장은 “3년 이상 투자장기 개념이 없다면 아예 투자하지 마라”고 조언했다. 3년 이상이라는 기간은 단순 수치가 아니라 그만큼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 요즘같은 조정이 2~3년 주기로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유돈 아니라면 투자마라 = 직장인 C씨는 마이너스 통장에서 300만원을 빼내 펀드에 가입한 경우. 액수도 크지 않은데다 ‘대출이자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대했지만 현재까지 20만원 손해보고 있다. 환매 후 다시 들어갈까 고민하고 있다. 펀드는 높은 이익만큼이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투자처. 당연히 여유돈 안에서만 움직여야 한다. 전문가들은 특히 확신이 없는 경우에는 여유자산의 10% 정도만 투자하라고 조언한다. 이병훈 모닝스타코리아 과장은 “여유돈이 아니라면 기대수익률이 높을 수밖에 없고 그만큼 마음이 조급해진다”고 말했다. 제아무리 적립식이고 작은 금액이라도 마찬가지. 분할매수나 매도는 펀드에 가입할 때부터 미리 계획을 세워두어야 하는 부분. 기대 수익률 이상일 때 이익금의 일부를 환매하겠다든지 지수가 어느 정도 하락하면 최소한 얼마 만큼은 보다 안전한 투자처로 돌려야겠다는 자기만의 목표가 필요하다. 이재순 제로인 팀장은 “2004년 중국 쇼크로 시작된 펀드 소동이 4월 말부터 7월까지 갔다”며 “명확하게 자기 기준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계적인 계산법의 좋은 점은 등락에 따른 마음의 흔들림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25
- 수년간 법정공방 국보법 사건 ‘무죄’ 간첩 누명 함주명씨 22년만에 무죄 … 대학교수들 11년 재판 끝에 혐의 벗어 민애청 사건 강효식씨 항소심만 6년 걸려 … 지난해 법원 잇따라 무죄 선고 지난해는 오래 기간 재판이 진행된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해 법원이 잇따라 무죄를 선고한 한해였다. 대표적인 사건은 군사정권 시절 고문·조작수사로 16년간 간첩혐의로 복역했던 함주명씨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함씨가 재심 청구소송에서 무죄를 받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누명을 벗는데는 무려 22년이 걸렸다. 한국사회이해라는 책을 발간한 두 명의 대학교수가 11년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무죄선고를 받았으며 민족통일애국청년회사건에도 무죄가 선고됐다. 남북 관계의 변화 등 시대가 달라지면서 이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는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지난해 강정구 교수 사태에서 보듯이 검찰은 국보법 위반에 엄한 법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법원이 국보법 사건 판결에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많이 반영하는 만큼 검찰도 국보법 사건에 대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된 함주명(75)씨가 22년이 지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조작간첩 사건에 대해 법원이 재심청구를 받아들여 무죄가 선고된 것은 함씨가 처음이다. 함씨의 재심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4부(이호원 부장판사)는 지난해 7월 15일 “함씨가 법정에서 진술내용을 모두 부인하고 있어 증거능력이 없고 45일간 불법구금과 고문, 폭행 등 가혹행위로 인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며 “피고인의 자백은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함씨의 무죄선고는 과거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기 위한 국가기관의 무리한 수사와 기소를 법원이 인정하고 과거사 진상규명에 한발짝 다가간 사례가 됐다. ◆국가가 만들어낸 고정간첩으로 16년간 억울한 옥살이 = 북한에 살고 있던 함씨는 6·25전쟁 이후 월남한 가족을 만나기 위해 대남공작원을 지원했고 1954년 4월 남파됐다. 함씨는 남파직후 자수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30년간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83년 2월 함씨는 서울시내에서 기관원들에게 갑자기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대공분실에는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각종 고문도구가 함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45일간의 고문 끝에 함씨는 고정간첩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함씨는 고등법원과 대법원에 항고했으나 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는 98년 8·15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16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다. 함씨의 막내아들은 ‘간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두 번이나 결혼식을 치르는데 실패하는 등 함씨와 가족들의 수난은 이어졌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99년 자수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과 변호사 13명이 함씨에 대한 고문 등의 혐의로 이씨를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의 수사결과 이씨의 고문사실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함씨는 법원에 2000년 9월 재심을 청구했고, 지난해 법원은 함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에서도 ‘시대흐름으로 볼 때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판결’이라며 법원의 무죄판결에 공감하고 상고를 포기했다. 함씨의 억울함을 검찰에서도 인정한 것이다. 함씨의 재심사건을 맡은 검찰 관계자는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에 의한 간첩행위는 본인의 자백에 기초한 증거가 있어야 유죄 인정이 가능하다”며 “자백 자체가 고문의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 증거는 인정이 안 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고문에 의한 자백이라는 것을 검찰 수사에서 밝힌 마당에 상고를 할 수 없었다”며 “함씨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도 법원에서 인정될것”이라고 말했다. ◆학문의 자유 막은 국가보안법 = 지난해 1월에는 이적성 논란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지난 94년 기소됐던 경상대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 집필교수들에 대해 11년만에 대법원이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학문의 자유와 교수의 교권을 침해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대법원 2부(주심 김용담 대법관)는 북한 체제를 고무·찬양하는 내용의 대학교재를 집필한 혐의(국가보안법상 찬양 고무 등)로 기소된 경상대 정진상·장상환 교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정 교수 등은 경상대 사회과학분야의 일반교양 교재로 ‘한국사회의 이해’를 공동집필한 후 이를 강의해 왔으나 검찰은 94년 11월 이 책자가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기소했고 1·2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당시 정 교수 등을 기소했던 검찰 출신 변호사는 “7년 동안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고 그 동안 사회가 변하니까 유죄가 나기 어려웠던 것”이라며 “당시 재판이 이뤄졌으면 분명히 유죄”라고 주장했다. 그는 “음란물에 대한 기준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다”며 “국가보안법은 음란물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진폭이 있다”고 말해 유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민애청은 무죄, 아주대 자주대오는 유죄 =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와 관련된 논쟁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일부 단체의 경우 이적단체라는 굴레를 벗었지만 법원은 재판부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대법원 2부(주심 김용담 대법관)는 지난 2003년 7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찬양·고무 등)로 기소된 민족통일애국청년회 전 회장 한대웅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및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일부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서울고법 형사2부(전수안 부장판사)는 지난해 4월 같은 혐의로 기소된 강효식씨에 대해서도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민애청은 국가 존립 등 기본 질서에 해악을 줄 명백한 위험이 있는 이적단체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선고 이유를 박혔다. 그러나 ‘아주대 자주대오’라는 대학내 주사파 지하조직에 가입한 혐의(국가보안법)로 구속기소된 최 모(28)씨에 대해서는 대법원과 하급심의 판단이 엇갈렸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지난해 7월 유죄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되돌려 보냈다. 최씨는 ‘아주대 자주대오’에 가입한 혐의로 2001년 구속 기소됐고 재작년12월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가 “아주대 자주대오라는 조직이 실존한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 3부(주심 이용우 대법관)는 “‘아주대 자주대오’라는 명칭은 아니더라도 운동권 학생들이 ‘자주적 학생회’를 건설하기 위해 어떤 조직체를 구성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사실상 유죄를 선고했다. /김선일 이경기 오승완 기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20
- <신문로 칼럼>폭력 불감증을 바라보며(김혁종 2006.01.23) 폭력 불감증을 바라보며 김혁종 광주대총장 40대 이상의 세대에게 ‘폭력’이라는 말은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다. 수많은 폭력을 대면하면서 무감각하게 살아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학창시절엔 초, 중, 고를 가릴 것 없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에, 군 시절엔 ‘군기’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40여 년 넘게 때로는 가해자로 때로는 피해자로 육체적, 정신적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오다 보니 ‘폭력’의 폐해에 무감각해져온 그 세대가 현재 우리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어느 세대보다 폭력의 실체를 이해하고 있는 이 세대가 굳은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사회로부터 폭력을 없앨 수 있을 듯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광기 어린 폭력의 피해자 입장에서 탈바꿈하여 이제는 도리어 폭력에 대한 불감증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도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고, 부지중에 폭력을 대물림하는 악역도 맡고 있다. 한국사회의 폭력성은 이제 국내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3D업종에서 일을 하고 있는 대다수 동남아 출신 근로자들의 입을 통하여 고발되는 한국에서의 가장 참혹한 경험은 수시로 행해지는 무차별적인 폭력과 욕설이었다. 그들의 입을 통하여 고발되는 치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어서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돈 많은 폭력배 이상이 아니다. 1992년의 보건복지부 보고와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남편의 60% 정도가 결혼이후 한번 이상의 아내구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우리나라 부부 중 34.1%가 1년에 적어도 한차례 이상의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미국보다 2배 이상 많고, 홍콩보다는 3배 가까운 발생률이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동학대 또한 근절되기는커녕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소아정신과 의사들은 아동학대가 대부분 근친간에 이루어져 실상이 숨겨지고 있을 뿐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소아청소년 정신의학회지에 따르면 ‘심하게 매를 맞아본 적이 있다’는 청소년의 비율이 86년 조사에서는 66.2%였으나 92년에는 96.4%나 됐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자녀가 잘못했을 때 체벌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72%의 어머니가 그렇다고 답했다 한다. 이것은 태국 23%, 미국 26%, 일본 33%, 영국 28%, 프랑스 30%에 비하면 엄청 높은 수치다. 이 같은 통계를 보면 우리 사회가 그간 사회적 성숙과 발전의 선상에 있었다고 믿어온 터에 폭력 근절에 있어서 만큼은 오히려 뒷걸음질 쳐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절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일상화되고 있는 폭력은 사회적 불감증으로 연결되면서 더 큰 맹위를 떨친다. 폭력의 심각성만 노출시켰지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교육이 미흡하다 보니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 악순환의 패턴은 피해자들의 정신을 황폐화시킬 뿐만 아니라 바로 그 피해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학습한 폭력을 통해 가학적인 폭력 행위나 잔인한 살인행위, 자기정체성 혼돈 등 더 큰 부작용으로 표출되고 있다. 최근 시위 진압에 나서는 전·의경들에게 명찰을 패용하게 하자는 안이 나와 경찰 안팎에서 논란이 뜨겁다.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나 시민단체들은 이에 찬성하는 쪽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경찰의 집회시위 관리도 행정활동인데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며 명찰 패용에 대한 찬성 이유를 밝혔고 경찰 내부에서도 “명찰은 지나치게 흥분한 대원에 대한 통제 효과가 있을 것 같다”는 찬성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경찰과 전·의경을 자녀로 둔 부모들은 “시위가 평화적으로만 진행되면 문제될 것이 없고, 불법 시위자에 대한 처벌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해 시각차가 확인됐다. 현재의 시위 양상을 보면 시위대가 먼저 폭력을 행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발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시위 진압 경찰을 처벌하기 위해 명찰을 패용하게 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나는 일이며 폭력을 근절을 위한 최선책도 아니다. 누가 되었든 먼저 폭력을 행사한 행위자에 대하여 엄단하는 국민적 공감대가 선행되어야 한다. 폭력 없는 사회와 가정, 학교를 만들기 위해 서로 양보하고 혜안을 모으는 과정과 절차들이 먼저 필요한 것이다.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는 미개한 사회일 뿐이다. 세계 속에서의 문명국 운운은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이성적이고 성숙한 사회를 만들고 난 다음의 일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20
- [밥일꿈]조선족 사기피해 이후 10년 조선족 사기피해 이후 10년 김 현 동 (동북아평화연대 사무처장)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시와 중국 길림성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 간에는 2년 전부터 연변의 동북아그룹이 주도하여 매일 1회 국경 버스가 다니고 있다. 이 버스는 국경을 통과하기 때문에 짧은 거리지만 약 8~9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두 도시를 왕래하는 직행 교통편이라 러시아로 돈 벌러 나온 조선족 동포들이 주로 이용하고 근래 들어서는 이곳을 여행하는 한국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우리가 일하는 동북아평화연대 사무실이 연길과 우수리스크 두 도시에 각각 자리잡고 있어 양 사무국 실무자들은 한달에 한번은 이 교통편을 이용한다. 이 버스를 타면 우리 동포들의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지난 12월 말 러시아에서 연길시로 출장을 갈 때였다. 연말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조선족 동포 10여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마침 톰스크에서 일을 하다 3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는 50대 후반의 조선족 동포와 같이 앉게 되었다. 이분은 러시아 여러 곳을 다니며 10년을 일하다 이번에는 아예 귀국하는 길이라 했다. 10년을 같이 일하던 아내는 일주일 전 먼저 중국으로 돌아갔단다. 이 동포는 영하 67도까지 내려가는 사하공화국 노천시장에서 3년 동안 장사를 했고, 그래도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 지금은 두 아이 모두 대학을 가고 이제 결혼 시키는 일만 남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가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묻자, 힘이 남았을 때 자식들 결혼자금을 만들기 위해 한국으로 돈을 벌러 갈 계획이란다. 아내는 벌써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모은 돈 16만 위안(한화 2000만원) 중 8만 위안을 지불하고 한국행 비자를 기다리고 있고, 본인도 길림에 도착하는 즉시 나머지 8만 위안을 낸다는 것이다. 아마 한달이나 3개월짜리 방문비자로 입국, 3개월 후에는 불법체류자가 될 것이다. 곧 한국의 정책이 바뀌어 조선족 동포의 자유왕래와 취업이 보장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하면서도 침통한 심정을 달랠 수가 없었다. 연변에 도착해서 한번 더 확인해보았지만 한국에 가려면 1000만원이 있어야 한다는 건 여전히 상식이었다. 동포 사회의 상처는 점점 깊어지고 있다. 조선족 동포들 사이에서 남한 사람들은 ‘한국놈’이라 불린다. ‘00놈’이란 표현은 예전엔 일본 사람들에게나 쓰던 말이다. 1996년 조선족 사기피해 이후 10년이 흘렀지만 1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야 한국에 갈 수 있는 이들의 처지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 부산 에이펙회의에서 호금도(후진타오) 수상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조선족의 한국 자유왕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언함으로써 그동안 중국 핑계를 대왔던 외교통상부의 논리는 무너졌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인력시장의 수급 조절’ 운운하는 노동부의 논리는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북경올림픽 때까지 남한사회가 조선족 동포에게 진 빚을 풀지 못한다면 기회는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18
- (목요일자 : 일하는 사람들의 꿈-일과 가정사랑) “신항은 우리 가족의 희망” 세계 중심 항만으로 성장기대 …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신항이 세계 중심 항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부산신항만주식회사가 국내 최고 회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산신항만주식회사(PNC)에서 컨테이너크레인기사로 일하는 정수영(37)씨는 19일 신항 개장을 앞두고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개띠’인 자신과 병술년에 첫 출발하는 신항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것 같아 기분도 좋다. ◆ 신항만에서 꾸는 꿈 = 정수영씨는 신항만이 개장하고 나면 아이들에게 회사를 보여줄 계획이다. 수출 최전선에서 일하는 아빠와 아빠가 일하는 직장을 보여주면서 아이들에게 ‘세계 최고의 항만에서 일하는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정씨는 “2007년 회사가 건설하는 9개 선석이 모두 완공되면 배를 대는 선석 길이만 일직선으로 3.2km나 된다”며 “PNC는 단일회사로는 규모에서 세계 최고일 뿐 아니라 철도가 항만에 들어와서 철송 물량도 많이 유치할 수 있고, 선사와 화주들에게 기존 항만에서 못하던 여러 가지 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어 경쟁력이 있다”고 자랑한다. 가족들도 신항만에 대한 기대가 크다. 건설 공사가 한창일 때 아빠와 함께 현장을 구경했던 딸 재윤(10)이와 아들 성용(7)이는 “아빠 회사가 이렇게 커요?”하면서 좋아했다. 1년 전부터 옷가게를 하고 있는 부인 이미향(37)씨도 이 곳에서 소박한 바람이 이뤄지길 조심스레 기대하고 있다. 이씨는 “힘든 일 하는 남편이 사고 없이 일하고 아이들이 착하게 자라면 좋겠다”며 “높은 크레인에 올라 밤낮 교대로 일하면서도 어려운 내색을 하지 않는 남편이 고맙다”고 말했다. 일에 대한 열정이 많고 꾸준히 노력하는 정씨는 회사에서도 ‘멘토’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소그룹의 리더인 멘토는 신입기사들을 교육하는 역할도 맡고 있는데 이들과 함께 크레인에 타서 작업 요령도 알려주고 사고 사례와 작업 형태 등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다. 정씨는 지난해 회사와 노동청 그리고 동명대학 항만물류실습교육센터에서 시행한 ‘크레인기사 맞춤형 교육’을 이수할 때는 새벽 2시까지 공부했다. ‘내 일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 교육도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정씨는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회사의 정책이 미덥다. “회사에서 교육할 때 일만 하지 말고 휴일엔 가족들과 놀러가고 가정에 충실하라고 했다”며 “가정이 즐겁고 튼튼하면 일도 잘된다고 생각하는 경영진이 참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씨는 가정이 튼튼하려면 신항만이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선 회사가 많은 물동량을 유치하고 일을 많이 해야 한다”며 “먼저 열심히 일하고 보상은 나중에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 두 번의 결단 = 김해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학교를 마친 정수영씨는 부산항에서만 13년째 일하고 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를 제대하고 1994년 1월 처음 취직한 곳은 (주)한진에서 운영하던 부산항 감천터미널. 하역할 순서를 정하고 짐을 싣고 갈 컨테이너차량을 배차하는 등 내근직으로 근무하던 그는 2000년 1월부터 컨테이너크레인기사로 직종을 바꿨다. 일 하는 틈틈이 기중기자격증, 지게차자격증, 특수1종운전면허(트레일러 운전)를 딴 후 크레인기사된 것. 그가 직종변경을 결심한 이유는 가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이었다. 1년 6개월 연애를 한 뒤 95년에 결혼한 아내는 보육교사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어린이집을 운영했지만 외환위기로 문을 닫았다. 정씨 부부는 사원 아파트에 들어갈 돈 500만원을 겨우 마련한 뒤 98년 김해로 왔다. 빚을 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이사한 후 둘째도 임신했다. 부인 이씨는 “김해로 이사하던 무렵이 참 힘들었다”며 “남편은 어려운 내색도 하지 않고 가만히 준비하더니 크레인기사가 되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직종을 바꾼 후 정씨는 연봉이 1000만원 정도 더 올랐다. 식구들을 부양하느라 잠 못 이루던 정씨가 신항에 온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부산신항의 비전 때문이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을 겨우 극복하고 안정을 이뤄가던 상황에서 다시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던진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계가 주목하는 최고의 항만에서 일하고 싶었던 그는 아내와 상의한 후 지난해 9월 부산신항만주식회사를 찾았다. 정씨는 ‘용돈을 줄이고 다시 1~2년 더 고생하면 점차 좋아질 것’이란 희망을 얘기했고, 이씨는 ‘성실한 남편이 나름대로 포부가 있으니까 옮기려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동의했다. 동북아 허브항만을 꿈꾸는 신항만에서 정수영 이미향씨 가족의 소박한 희망도 함께 익어가고 있다. 부산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