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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생활은..대학등록금 40년전의 121배↑> (서울=연합뉴스) 심재훈 기자 = 우리나라 인구의 5분의 1 이상이 거주하는 서울은 과연 어떤 곳일까. 8일 통계청과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물가는 30~40년 전보다 최대 121배가량 올라 생활비 부담이 커지고 있으며 전국 최대의 인구 이동, 통행, 소비 활동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끌고 있었다. 서울 남성들은 취업 연령과 결혼이 갈수록 늦어지고 서울 여성들은 일생에 1.06명만 출산하며 가사 부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대학등록금 121배 급등서울 생활의 변화를 물가로 살펴보면 대학등록금의 경우 1970년대 3만3천원에서현재 400여만원으로 무려 121배가 뛰었다. 버스 요금은 1977년 40원에서 현재 1천원으로 25배, 지하철 요금은 1974년 30원에서 현재 1천원으로 33배, 택시 기본요금은 1972년 90원에서 현재 2천400원으로 27배가 올랐다. 연탄값은 1970년 18원에서 현재 500원으로 28배, 소줏값은 1975년 120원에서 현재 1천200원으로 10배가 상승했다. 서울의 하루는 극도로 번잡하다. 하루 평균 264명이 태어나고 106명이 사망한다. 197쌍이 혼인하는 반면 64쌍이 이혼한다. 하루 평균 인구 전출입은 7천349명, 통행인구는 3천150만9천명, 지하철 이용인구는 721만명에 달한다. 시내버스 이용인구는 하루 평균 461만5천명이며 지방세는 하루 360억원씩 걷힌다. 헌혈은 하루 평균 2천93명이 하며 자동차 증가 대수는 44대, 운전면허 취득자는249명이다.하루 평균 119구급활동은 1천31건, 1인당 급수량은 311ℓ, 건축허가는 35동, 전력사용량은 12만812㎿H, 여권발급은 3천174건, 유류소비량은 13만4천배럴, 도시가스소비량은 1천329만3천㎥다. ◇ 경제활동 주축 인구 감소서울의 남성은 전체 인구의 49.6%며 이 가운데 경제활동의 주축을 이루는 25~54세 인구가 2009년 53.1%에서 20년 후에는 43.8%까지 줄어들 전망이다.서울 남성의 초혼 연령도 점차 높아져 주혼인 연령층인 25~34세 남성의 68%가 미혼이며 서울 남성의 초혼 평균 연령은 31.7세로 30~34세에 결혼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서울 남성의 사망률 1위는 암과 심장질환이다. 연령별로는 40대부터 간과 심장질환, 50대부터 뇌혈관 질환 발생이 늘었다. 서울 여성의 평균 초혼 연령은 29.3세로 1990년의 25.5세보다 4세가량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있다. 여성들이 일생에 출산하는 자녀 수는 평균 1.06명으로 부산(1.02명)에 이어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1970년의 합계출산율 3.05명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인 셈이다. 서울 여성의 평균 수명은 82.7세로 남성(76.1세)보다 6년 더 오래 산다. 서울 여성의 3대 사망원인은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이며 암 사망률이 1위다.서울 여성의 취업자 분포는 25~29세가 가장 높다. 출산과 육아의 영향으로 30~34세에는 취업자 분포가 낮아졌다가 이후 다시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서울 여성 중 가정생활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51.4%로 남성의 41.2%에 비해 높았다. president21@yna.co.kr(끝)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08
- [이 사람이 사는 법]엄지호 전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 공직 35년 불우이웃돕기 앞장 퇴임 후에는 무료급식소 운영 “도청 공보계장 엄지호는 이 시대의 희귀식물이다. 음지에서 자라는 이름 모를 민초를 빼닮았다는 눈빛과 목소리가 그렇고 숱한 남의 자식 키워 장가보내는 마음씨가 또한 그렇다 …” 얼마 전 작고한 고 최석하 시인이 지은 시 제목은 ‘희귀식물 엄지호’다. 시인의 말처럼 엄지호(64) 전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은 괴짜다. 평생을 소외된 이웃과 함께 살고 있는 ‘희귀식물’이기도 하다. 포털사이트 다음에 개설한 카페 ‘손잡고 가요’에서도 범상치 않은 그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 ◆구두닦이 대부로 공직 시작 = 출발은 1970년 7월 군복무를 마치고 대구시 서구 내당5동 서기보(5급)로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다. 당시 일대는 속칭 ‘창돌이(창과 돌멩이)’로 불리던 부랑아들이 종이집에서 거주하며 구걸과 넝마주이로 연명하던 곳이었다. “공무원도 박봉이었지만 ‘꿀꿀이죽’같은 음식으로 생계를 잇는 그들에 비하면 너무 풍족해보였습니다.” 급여 중 일정액을 떼어 밀가루를 사주고 수제비를 끓여먹게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엄씨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정부에서도 그들을 보살필 여유가 없었지만 대책없이 방치하는 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1972년 경북도청으로 전입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자활지원에 나섰다. 고 이태영 전 대구대 총장이 주도한 BBS(Big Brothers and Sisters)운동에 참여하면서다. 구두닦이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BBS 형제’들은 당시 서구 이현동 대구시 부지에 합숙소를 짓고 함께 살았다. 엄씨도 숙식을 함께 하며 형제들 고충해결에 앞장섰다. 병원에서는 보호자였고 경찰서에서는 신변 보증인이었다. “사고뭉치들이 모여 살다보니 수시로 경찰서에 불려갔습니다. 당시 경찰은 지역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BBS 합숙소부터 덮쳤죠. 공무원이 보호자로 함께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됐나 봅니다.” 경찰과 친분을 쌓은 뒤에는 신원조회 협조를 받아 합숙소로 들어온 미아들을 가족 품으로 돌려보낸 일도 많았다. 퇴근 후에도 ‘민원 해결’을 위해 뛰다가 통금시간을 어기기 일쑤였다. 그의 사정을 아는 이현파출소에서 팔뚝에 통행허가 도장을 찍어줄 정도였다. 형제들 학습지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해 4명이 대학에 진학할 때도 있었지만 등록금이 아깝지 않았다. 때로는 직접 담당 교수를 찾아가 ‘특별관리’를 부탁해 졸업을 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정성을 쏟아 합숙소 출신 중에 대학교수며 의사로 성공한 이도 있다. 형제들이 성장해 결혼을 하게 되면 엄씨는 총각 혼주가 되기도 했고 주례를 맡기도 했다. ◆죽어가는 목숨 살리기도 = 숱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엄씨가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 ‘자랑스러운 경북인상’을 수상한 김금옥(57)씨와 ‘욕쟁이 스님’으로 통하는 통허 스님이다. “1987년 도청 위민실에 근무할 때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1985년 서무계에서 포상을 담당할 때 ‘자랑스러운 경북인상’을 받은 김금옥씨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술집에서 일하면서 옷을 떠 고아원에 나눠주는 예쁜 색시였는데 중병에 걸려 죽게 될 지경이 됐다는 겁니다.” 병명이라도 알고 싶다며 김씨를 찾아갔다. 2년 전 만났던 예쁜 색시는 오간데 없고 말기 암환자 몰골이었다. BBS 지도위원 때부터 도움을 받은 동산병원(계명대 부속의료원)에 도움을 청했다. 동산병원은 의료보험이 도입되기 전부터 사회사업실을 만들어 어려운 환자들을 돕고 있었다. 18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김씨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지금은 엄씨와 함께 이웃을 위해 일하고 있다. 통허스님은 중구 보현사 입구에서 청소년을 지도하고 급식봉사를 하는 이였다. 스님이 폐암선고를 받은 뒤 엄씨는 ‘생을 정리하는 일’을 도왔다.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스님을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모시고 다녔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지켰다. “운명하시기 전에 외상값을 갚으라는 유언을 남기셨어요. 꽃집이며 보살 등에게 빌린 600여만원 빚이 걸리셨던 모양이예요.” 장례며 빚 청산 역시 엄씨가 정리했다. ◆490명 ‘손잡고’ 서로돕기 = 1980년대 중반에는 이웃돕기를 ‘조직화’했다. ‘서로 돕고 살자’는데 뜻을 같이 한 지역 언론사 간부와 함께 모임을 꾸렸다. 매달 1000원을 내는 회원 1만명을 확보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2001년 다음에 카페 ‘손잡고 가요’를 개설한 뒤 지금가지 공무원 변호사 사업가 스님 주부 등 회원 490여명이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움을 요청하는 모든 사연을 가급적 해결해주려고 합니다. 카페에 사연이 올라오면 바로 번개 모임을 갖고 해결책을 의논합니다. 단순 불우이웃돕기부터 수술비 학비 연탄 지원은 물론 다양한 직업군에 있는 회원들 노력봉사까지 형태는 다양합니다.” 카페에서는 2008년 12월 남구 대명동에 작은 식당을 냈다. ‘서로 돕고 사는 집’이다. 회원들이 낸 회비로 운영하며 매주 두차례 차상위계층 21가구에 도시락을 배달한다. 지난해 12월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직에서 물러나 ‘실직자’가 된 엄씨는 요즘 이 식당으로 출근, 잡일을 돕고 있다.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이웃을 도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웃보듬기’는 평생 업으로 삼고 있어요.” 대구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초등학생 때부터 장사해 학비 마련 아들장가 보내며 생애 첫양복 구입 평생 남을 위해 살고 있는 엄지호씨는 자신에게는 철저한 구두쇠였다. 지난해 11월에야 생애 처음으로 양복을 구입할 정도였다. 둘째 아들 결혼식을 앞두고 대형할인점에서 10만원도 안되는 것으로 샀다. 공직에 있을 때는 ‘근무복’, 퇴임 후에는 점퍼나 재킷으로 버텼다. 하의는 주로 검은색 등산복. 한번 구입하면 구멍 날 때까지 입었다. “고령군에서 도청 발령을 받았는데 정장차림으로 사령장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정장이 없어 사령장을 받지 못했어요. 도청 과장으로 재직할 때는 도의원들이 성화(?)를 해서 고리형 넥타이를 사무실에 두고 의회에 갈 때만 착용했죠.” 엄씨의 구두쇠 노릇은 가난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학창시절에는 소풍과 수학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계란이며 생선 과일 등을 팔아 학비를 조달했다. 최종학력은 고졸이지만 졸업장이 없다. 중·고등학교 등록금이 없어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고3때는 4기분 등록금 5960원을 내지 못해 졸업시험도 거부당했다. 군대도 ‘로비’해서 갔다. 당시 2인 동시입영으로 생계가 곤란할 경우 한명만 입대하면 되는 시기였다. 교사로 가족 생계를 책임지던 형이 입대를 하면 7남매의 집안생계가 어려워 대신 군생활을 자원했다. 시력이 나빠 면제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계를 책임진 형을 대신해 입대를 고집했다. 경북도청 공무원시절에는 남을 돕는 보직만 맡았다. 서무계 포상담당, 위민실, 공보관실 공보계장을 거쳐 서기관으로 승진해서는 가정복지과장과 노인복지과장, 도민연수과장 등으로 공직을 마무리했다. 공직 말년에는 부단체장 발령도 거부했다. 엄씨는 “늙어서 부군수라고 폼잡으면 추해질 수 있어 사양했다”고 말했다. 공직에서 물러나서는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으로 4년간 일했다.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08
- “국운 융성할 때 힘 모으자” 이명박 대통령의 36번째 라디오연설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접수된 편지를 소개하며 일일이 답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36차 라디오연설은 8일 오전 라디오와 인터넷을 통해 방송됐다. 청와대는 올 초부터 홈페이지에서 신년이벤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시했으며 두달반만에 2000통이 넘는 사연이 접수됐다. 이날 연설에서 이 대통령은 환경미화원과 장애인 대학생, 비정규직 근로자, 현직군인 부인 등의 사연을 직접 소개했다. 이 대통령은 방송통신고교를 나와 동부산대학에 다니며 만학의 꿈을 키우고 있다는 환경미화원 김병옥씨의 사연을 소개했다. 김씨가 궁금하게 생각했던 한국장학재단의 일반학자금 대출, 고용보험기금, 전문계 고졸재직자 특별전형 등을 설명하고 “주경야독하는 분들이 재교육을 받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제도를 보완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또 장애로 휠체어를 이용하는 대학 신입생 박은수씨에게는 건축물 시설기준 개정, 장애인 특수교육법, 장애인 채용 확대 정책 등을 소개했다. 비정규직 근로자 현햇님씨에게는 “정규직과 기간제 근로자의 차별을 줄이고 파견직, 계약직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일에도 더욱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군인과 결혼한 지 7년만에 7번 이사했다는 주부 박진영씨에게는 병영생활관과 관사, 의료체계 개선 등 군(軍) 사기 진작 대책을 설명했다. 이와 함께 “군이 합당한 명예와 대우를 받아야 우리의 번영과 자유도 지킬 수 있다”며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병영생활관과 관사, 의료체계를 개선하고 있다. 또 예편하는 직업군인들이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답했다. 특히 이 대통령은 공직자들에게 민생을 보다 적극적으로 챙겨줄 것을 당부했다. 이 대통령은 “‘힘들다. 안되겠다’하는 말보다는 ‘좀 더 도울 수 있는 게 없을까, 열심히 찾으면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챙겨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유치와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전 등을 언급하며 “이렇게 국운이 융성할 때 함께 힘을 모으면 반드시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성홍식 기자 hssung@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08
- 중소기업청 해외시장과 김유숙 과장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요람 대덕연구단지에서도 부부연구원은 그리 흔치 않다. 중소기업청 해외시장과 김유숙 과장은 미국유학을 다녀 온 부부연구원 출신이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선임연구원이던 그는 2003년 7월 대전시 이달의 과학기술인상을 수상하는 등 연구원으로서도 성과를 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을 꿈꾼 그는 2005년 대전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를 거쳐 2007년 5월 중소기업청 국제협력팀장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생 쉰 살. 연구원 출신의 공무원, 사회적 성취를 이룬 워킹맘.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글 : 윤덕중 리포터 dayoon@naeil.com 중간제목 : 김유숙, 나의 일을 말하다그와의 만남은 그리 쉽지 않았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설을 며칠 앞둔 지난 10일, 그에게 전화를 했다. 인터뷰 약속은 일주일을 넘겨 17일 오후 2시로 잡혔다. 17일 오후 1시 20분쯤, 마침 공주에서 인터뷰가 있었던 터라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연락이 왔다. 예정에 없던 급한 회의가 생겼단다. 오후 5시로 약속은 연기됐다. 오후 5시, 그는 자리에 없었다. 계속되는 회의. 다시 약속은 다음 날 오후 2시로 연기됐다. 그렇게 그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쉰 살의 그에게 일은 무엇이냐고.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긴장하게 하고 깨어있게 하는 것, 나 자신이나 가족이라는 협소함에서 벗어나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과 의무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바쁘다.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의 해외시장 개척을 도와주는 일이 그가 맡은 일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300만개에 달한다. 그중 해외시장에 물건을 파는 수출기업은 7만7000여개. 수출이 나라 경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나라라는 걸 생각하면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다. 더 많은 기업이 수출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김유숙 과장의 생각이다. “기술력도 있고 해외시장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자금이나 경험, 정보 등이 없어서 해외시장으로 나가지 못하는 중소기업들이 많아요. 이들에게 시장조사나 자사브랜드 개발 지원, 해외민간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 해외인증획득 지원사업 등을 통해서 수출기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맞춤형 지원사업을 펼치는 것이 저희 업무죠.”지난 해 7000여개 기업을 지원했다. 올해는 더 많은 기업에 도움을 줄 계획이다. 언뜻 들어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볼 때 공무원이라면 정년보장이 되고 신분이 안정되어 있으니까 마냥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죠. 하지만 저희 부서만 해도 야근은 기본이고 밤샘 근무하는 날도 많아요. 다양한 국민들의 요구를 적당한 시기에 적절한 정책을 펼쳐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죠.”하긴 중소기업청만 해도 300만개에 달하는 중소기업의 이해와 요구를 만족시키는 일이 어찌 말처럼 쉽겠는가.그래서 그는 말한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공무원 하지 말라”고. 정책 하나를 만들고 시행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빠질 정도로 고민하고 중압감을 느끼며 엄청난 업무량에 시달려야 한다. 하지만 또 바로 그 점이 공무원의 매력이란다. 그 속에서 느끼는 ‘성취감과 보람’, 그것이 그가 말하는 ‘나의 일’이다. 중간제목 : 나의 삶터, 대전을 말하다그는 대학 졸업 후 화장품회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대덕연구단지의 연구원이었던 남편과 1985년 결혼하면서 대전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1987년 미국유학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1994년 대전에 돌아 온 그는 지금까지 대전의 일터에서 일하며 대전에서 살고 있다. 미국 유학 전 대전에서 태어난 큰 아들은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대학진학을 위해 서울로 간 아들은 군대생활도 대전에서 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낳은 딸도 대전이 고향이다. 그에게 대전은 애정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는 대전을 사랑한다. 그에게 대전은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가진 도시다. “대전은 대덕연구단지를 비롯해 훌륭한 인적·물적 자원을 가지고 있는 도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만큼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걸맞게 발전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대전에 사는 것만으로도 대전시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아직도 할 일이 많은 것 같아요.”그는 대덕연구단지가 세계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연구단지라고 역설한다. 그걸 기반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조해내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런 그의 생각은 연구원시절부터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벤처기업활성화를 위한 모임을 만들고 같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가 대덕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를 거쳐 현재 중소기업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도 이런 그의 관심이 점차 범위를 넓혀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전이 살기 좋은 곳이 되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환경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2002년 대전시립교향악단 후원회로 활동을 시작한 ‘높은음자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같은 맥락.“높은음자리표는 대전이 살기 좋은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일터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놀이문화가 갖춰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단체죠. 저도 재미있는 동네를 한 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참여하게 됐고요.”훌륭한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해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를 선도해나가는 도시 대전.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며, 더불어 살아가면서 대전시민의 자부심을 지켜가는 도시 대전. 그가 바라는 ‘나의 삶터 대전’의 모습이다. 중간제목 : 워킹맘, 가정을 말하다그는 표준과학연구원에 근무하는 남편과 대학 재학 시절 만났다. 남편이 연세대 화학과 2년 선배다. 어려운 집안의 장남 장녀, 둘의 신혼은 단칸방에서 시작됐다. 양쪽 집안을 부양하는 것도 부부의 몫이었다. 직장 생활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대학생활도 장학금으로 한 부부는 미국유학도 장학금으로 버텼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힘이 들기도 했지만 지나고 나니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밀고 온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생각해 보면 직장 생활이 단순히 경제적인 힘이 됐던 것은 아니었다. 나 자신의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기여도 했다는 생각이다. 그의 큰 아들은 연세대에 재학 중이다. 작은 딸은 중학교 3학년이 된다. 공부도 곧잘 한다. 워킹맘으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유학시절 미국에서는 오히려 어려운 점이 별로 없었어요. 큰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왔는데 학부모회의를 오전 10시에 하더라고요. 미국에서는 부모들이 퇴근한 후에 했거든요. 당연히 전업주부들의 네트워크에 끼지 못했죠. 그 덕분에 아이가 왕따 아닌 왕따가 됐어요. 연구원 시절에 여성연구원이 6명 있었는데 애가 둘인 것은 나 밖에 없었어요. 그만큼 일하는 엄마 노릇이 어렵다는 얘기지요.”아들은 귀국 후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주위 엄마들은 ‘직장이 뭐가 중요하냐 아이가 중요하지’라며 충고했다. 하지만 그는 아이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일들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자율적인 생활습관을 키워주고 간섭하지 않았다.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자기가 보여주기 전에는 성적표를 보지 말아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궁금하기는 했지만 보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3학년 2학기 학기말 고사에서 전교 1등한 성적표를 처음으로 보여주더군요. 그전에 2010-03-07
- “국운 융성할 때 힘 모으자” 이명박 대통령의 36번째 라디오연설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접수된 편지를 소개하며 일일이 답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36차 라디오연설은 8일 오전 라디오와 인터넷을 통해 방송됐다. 청와대는 올 초부터 홈페이지에서 신년이벤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시했으며 두달반만에 2000통이 넘는 사연이 접수됐다. 이날 연설에서 이 대통령은 환경미화원과 장애인 대학생, 비정규직 근로자, 현직군인 부인 등의 사연을 직접 소개했다. 이 대통령은 방송통신고교를 나와 동부산대학에 다니며 만학의 꿈을 키우고 있다는 환경미화원 김병옥씨의 사연을 소개했다. 김씨가 궁금하게 생각했던 한국장학재단의 일반학자금 대출, 고용보험기금, 전문계 고졸재직자 특별전형 등을 설명하고 “주경야독하는 분들이 재교육을 받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제도를 보완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또 장애로 휠체어를 이용하는 대학 신입생 박은수씨에게는 건축물 시설기준 개정, 장애인 특수교육법, 장애인 채용 확대 정책 등을 소개했다. 비정규직 근로자 현햇님씨에게는 “정규직과 기간제 근로자의 차별을 줄이고 파견직, 계약직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일에도 더욱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군인과 결혼한 지 7년만에 7번 이사했다는 주부 박진영씨에게는 병영생활관과 관사, 의료체계 개선 등 군(軍) 사기 진작 대책을 설명했다. 이와 함께 “군이 합당한 명예와 대우를 받아야 우리의 번영과 자유도 지킬 수 있다”며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병영생활관과 관사, 의료체계를 개선하고 있다. 또 예편하는 직업군인들이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답했다. 특히 이 대통령은 공직자들에게 민생을 보다 적극적으로 챙겨줄 것을 당부했다. 이 대통령은 “‘힘들다. 안되겠다’하는 말보다는 ‘좀 더 도울 수 있는 게 없을까, 열심히 찾으면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챙겨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유치와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전 등을 언급하며 “이렇게 국운이 융성할 때 함께 힘을 모으면 반드시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성홍식 기자 hssung@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08
- 맛으로 베트남의 문화를 전하다 황둔 찐빵으로 유명한 신림면. 찐빵으로 유명한 이곳에서 베트남의 맛을 전하는 이가 있다. 베트남 이름은 판티비치트, 한국 이름은 판진하(27). 그녀는 19살에 그녀의 고향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7살과 5살, 두 딸아이의 엄마다. 한국말도 하나 모르고 시집온 그녀지만 문화센터에서 열심히 배우고 익혀 한글도 쓸 줄 알고 의사소통이 어렵지 않을 정도로 한국말을 구사한다. 그녀는 여느 한국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다 소화하고 있다. 이번 설은 어찌 지냈는지, 한국 문화는 어렵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에 "똑같아요, 제사지내는 것도 다른 것도"라며 짧게 말한다. 판 씨는 한국 문화와 베트남 문화가 많이 차이가 나지 않아 힘들지 않다며 씩씩하게 말해준다. 판 씨는 2007년 12월에는 강원도지사로부터 모범적인 다문화가정으로 표창까지 받았을 정도로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해 살고 있다. 이런 판 씨의 결혼 후 모습은 베트남에 살고 있던 그녀의 동생마저 시집오게 만들었다. 오픈한 지 1년도 안됐다는 ''내 고향 베트남 쌀국수''. 가게 안을 들어서니 베트남 현지에서나 볼 수 있는 각종 베트남 상품들이 가게를 가득 메우고 있다. 가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베트남어와 함께 한글로 조금은 삐뚤삐뚤 적어 내려간 메뉴판과 베트남 음식 사진은 정겹기 마저 하다. 베트남의 어느 작은 동네의 가게를 옮겨 놓은 듯 한 이곳 ''내 고향 베트남 쌀국수''. 이번 주말에는 베트남인이 직접 만들어 주는 베트남 쌀국수 한번 먹으러 가 볼까? 문의 : 761-6437 이지현 리포터 1052jee@naver.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05
- [주말을 여는 책]‘신화와 인생’ 세계적 종교학자 캠벨 입문서 … “모험 나서면 마법 인도자가 도울 것” 조지프 캠벨 지음·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갈라파고스/1만8천원 세계적인 신화종교학자인 조지프 캠벨은 25세이던 1929년부터 1934년까지 미국 뉴욕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서 책만 파고들었다.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고 니체, 쇼펜하우어, 칸트, 괴테를 읽었다. 논문만 쓰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캠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대학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과감하게 ‘유리병’을 깨뜨리고 나온 것이다. 캠벨은 그 5년 동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게 무언지 찾으려고 애썼다. 작은 서랍장 안에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넣어 두고는 아직 빈털터리까지는 아니라고 자위하면서 자유롭고 재미있으며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달랑 1달러밖에 없으면서도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캠벨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누구든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게 캠벨의 지론이다. 인생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캠벨이 전하는 핵심은 바로 “자신의 희열을 좇으라(Follow your bliss)”는 메시지다.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지난날을 내팽개치고 떠나라”고 다그친다. ‘신화와 인생’은 캠벨 입문서와 같다. 그가 생전에 미국 에설런 연구소에서 한 달여 간 진행한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다이앤 K. 오스본이 그의 저서와 그가 인용한 여러 작품들의 발췌 글을 더해 엮은 캠벨 사상의 지침서인 셈이다. 아울러 신화와 종교 뿐 아니라 캠벨 자신의 인생을 얘기하며 돈, 사랑, 결혼, 죽음, 직업, 예술 등 현실에서의 삶에 대한 지혜를 풀어놓은 인생 철학서라고도 할 수 있다. 캠벨은 인간이란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안고 홀연히 태어나 각자만의 여행길에 올라 있는 존재라고 했다. 누구든 스스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기에, 희열을 좇으려면 ‘황무지’를 떠나는 ‘영웅의 여정’의 길을 가라고 말한다. 타의에 의해 자신을 가두어야 하는 세계를 벗어나 ‘삶에 있어 가장 높은 영적인 성취인 성배(聖杯)를 찾아 떠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서. 일단 떠나면 오늘만 걱정하라고 캠벨은 말한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므로 새로운 것도,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캠벨은 “그냥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그 것만을 생각하라”고 속삭인다.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버려야 희열이 오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자신을 찾는 것이다. 바로 ‘성배’를 찾는 일이다. 성배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도달하는 영적 성취, 자신이 원하는 희열을 의미한다. 캠벨은 그 상태를 “지금 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의지와 의도와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활동 공간, 그 곳이 어디든, 성소를 마련하고 성배를 찾는 여정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성배는 어떻게 찾아 나설 것인가.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는 믿음으로 일단 “뭔가를 깨뜨리는 것”이다. 빵이란 결국 밀의 죽음으로부터 나온 것 아닌가. 황무지를 자발적으로 떠나는 게 첫걸음이다. 떠나지 않을 어떤 이유를 생각해 낸다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사회 속에 남아 있는 경우,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신 그 모험은 그저 남을 따라가는 여행이 아닌,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난 진정한 모험이어야 한다. 깊은 영적 필요 또는 준비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캠벨은 그런 모험에 나서면 마법의 인도자가 홀연히 나타나 도울 것이라고 했다. 일단 그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이전까지는 열리지 않았던, 그리고 다른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열리지 않을 문들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캠벨이 말하는 성배는 ‘행복이 바로 지금 여기 있음’의 경험이다. 앞에서 말했듯, 천국이 아니 현세에서 일을 하며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성배로 향하는 열쇠는 ‘공감’이다. 나와 대립하는 ‘너’도, 죽음과 악까지도 포용하면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공감은 타인에 대한,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이해다. 무슨 의미인가. ‘영웅의 귀환’과 연관이 있다. 영웅의 귀환이란 여행에서 자신이 찾은, 이 세계에 결여된 것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그 선물을 ‘영리적인 방식’, 즉 돈을 받고 파는 게 아니라 수많은 나 아닌 ‘너’들이 최소한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에 맞추거나 아니면 삶의 은혜로 가공해 전달하라는 것이다. 모험은, 깨뜨리고 떠나 깨달음을 얻고는 다시 돌아와 그 선물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캠벨이 지향하는 고귀한 인생이란 결국 삶을 알고, 사랑하고, 베푸는 것이다. 시작은 ‘깨뜨리고 나오는 것“이다. 두려운가.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소년이 입문제의를 행할 때 얻은 조언이 힘이 될 것이다.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멍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 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어경선 칼럼니스트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05
- [책소개]서가에 앉아 시대의 지성을 읽는다 ‘세계도서관기행’ 유종필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1만5천원 박물관 기행은 들어봤어도 도서관 기행은 처음 들어본다. 전 세계 40여개 도서관을 다닌 국회도서관장이 도서관 정보록이라고 할 수 있는 기행문을 썼다. 유종필 국회도서관장은 도서관 입장에서 보면 ‘창밖의 남자’였다. 창밖의 남자가 어느날 도서관의 안주인이 됐다. 저자는 갈고리처럼 생긴 의문부호를 주머니에 담고 세계 도서관 기행에 나섰다. 세계 최초의 도서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도서관에서 시작한 기행은 유럽 대륙을 거쳐 미국과 중국, 일본, 북한과 한국에 이른다. 저자는 북한의 국립도서관에 해당하는 인민대학습당의 모습과 현황도 담았다. 11개국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2년여간의 대장정을 모두 책에 옮겼다. 저자가 도서관 순례를 다니면서 가장 공들여 탐독하고 소개하는 곳은 러시아 도서관이다. 유난히 대문호가 많았던 러시아의 문학적 토대를 방증하듯 국가도서관과 민족도서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국립도서관 등은 모두 세계에 내놓을 만한 규모와 가치를 지녔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공개한다. 러시아 도서관에는 다름아닌 볼테르의 방이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개인 장서가 프랑스가 아닌 러시아 민족도서관에 있는 이유는 다름아닌 예카테리나 2세가 볼테르의 미망인으로부터 그의 장서와 서지, 유품까지 모두 사들였기 때문이다. 청년시절 도서관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다 사서와 결혼한 저자는 도서관은 대지이자 땀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런 도서관의 세계를 돌아본 것은 오랜 로망을 이룬 것이라고 했다.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05
- 이사람이 사는 법 - 엄지호 전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 이사람이 사는 법 - 엄지호 전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 ‘이웃보듬기’는 평생 풀어야 할 업 공직 35년 불우이웃 돕기에 앞장 … 퇴임 후에는 무료급식소 운영 “도청 공보계장 엄지호는 이 시대의 희귀식물이다 음지에서 자라는 이름 모를 민초를 빼닮았다는 눈빛과 목소리가 그렇고 숱한 남의 자식 키워 장가보내는 마음씨가 또한 그렇다…” 얼마 전 작고한 고 최석하 시인이 지은 시 제목은 ‘희귀식물 엄지호’다. 시인의 말처럼 엄지호(64) 전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은 괴짜다. 평생을 소외된 이웃과 함께 살고 있는 ‘희귀식물’이기도 하다. 포털사이트 다음에 개설한 카페 ‘손잡고 가요’에서도 범상치 않은 그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 ◆구두닦이 대부로 공직 시작 = 출발은 1970년 7월 군복무를 마치고 대구시 서구 내당5동 서기보(5급)로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다. 당시 일대는 속칭 ‘창돌이(창과 돌멩이’로 불리던 부랑아들이 종이집에서 거주하며 구걸과 넝마주이로 연명하던 곳이었다. “공무원도 박봉이었지만 ‘꿀꿀이죽’같은 음식으로 생계를 잇는 그들에 비하면 너무 풍족해보였습니다.” 급여 중 일정액을 떼어 밀가루를 사주고 수제비를 끓여먹게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엄씨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정부에서도 그들을 보살필 여유가 없었지만 대책없이 방치하는 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자활을 도울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1972년 경북도청으로 전입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자활지원에 나섰다. 고 이태영 전 대구대 총장이 주도한 BBS(Big Brothers and Sisters)운동에 참여하면서다. 구두닦이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BBS 형제’들은 당시 서구 이현동 대구시 부지에 합숙소를 짓고 함께 살았다. 엄씨도 숙식을 함께 하며 형제들 고충해결에 앞장섰다. 병원에서는 보호자였고 경찰서에서는 신변 보증인이었다. “사고뭉치들이 모여 살다보니 수시로 경찰서에 불려갔습니다. 당시 경찰은 지역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BBS 합숙소부터 덮쳤죠. 공무원이 보호자로 함께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됐나 봅니다.” 경찰과 친분을 쌓은 뒤에는 신원조회 협조를 받아 합숙소로 들어온 미아들을 가족 품으로 돌려보낸 일도 많았다. 퇴근 후에도 ‘민원 해결’을 위해 뛰다가 통금시간을 어기기 일쑤였다. 그의 사정을 아는 이현파출소에서 팔뚝에 통행허가 도장을 찍어줄 정도였다. 형제들 학습지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해 4명이 대학에 진학할 때도 있었지만 등록금이 아깝지 않았다. 때로는 직접 담당 교수를 찾아가 ‘특별관리’를 부탁해 졸업을 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정성을 쏟아 합숙소 출신 중에 대학교수며 의사로 성공한 이도 있다. 형제들이 성장해 결혼을 하게 되면 엄씨는 총각 혼주가 되기도 했고 주례를 맡기도 했다. ◆죽어가는 목숨 살리기도 = 숱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엄씨가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 ‘자랑스러운 경북인상’을 수상한 김금옥(57)씨와 ‘욕쟁이 스님’으로 통하는 통허 스님이다. “1987년 도청 위민실에 근무할 때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1985년 서무계에서 포상을 담당할 때 ‘자랑스러운 경북인상’을 받은 김금옥씨였습니다. 술집에서 일하면서 옷을 떠 고아원에 나눠주는 예쁜 색시였는데 중병에 걸려 죽게 될 지경이 됐다는 겁니다.” 병명이라도 알고 싶다는 김씨를 찾아갔다. 2년 전 만났던 예쁜 색시는 오간데 없고 말기 암환자 몰골이었다. BBS 지도위원때부터 도움을 받은 동산병원(계명대 부속의료원)에 도움을 청했다. 동산병원은 의료보험이 도입되기 전부터 사회사업실을 만들어 어려운 환자들을 돕고 있었다. 18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김씨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지금은 엄씨와 함께 이웃을 위해 일하고 있다. 통허스님은 중구 보현사 입구에서 청소년을 지도하고 급식봉사를 하는 이였다. 스님이 폐암선고를 받은 뒤 엄씨는 ‘생을 정리하는 일’을 도왔다.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스님을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모시고 다녔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지켰다. “운명하시기 전에 외상값을 갚으라는 유언을 남기셨어요. 꽃집이며 보살 등에게 빌린 600여만원 빚이 걸리셨던 모양이예요.” 장례며 빚 청산 역시 엄씨가 정리했다. ◆‘이웃보듬기’는 평생 업 = 1980년대 중반에는 이웃돕기를 ‘조직화’했다. ‘서로 돕고 살자’는데 뜻을 같이 한 지역 언론사 간부와 함께 모임을 꾸렸다. 매달 1000원을 내는 회원 1만명을 확보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2001년 다음에 카페 ‘손잡고 가요’를 개설한 뒤 지금가지 공무원 변호사 사업가 스님 주부 등 회원 490여명이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움을 요청하는 모든 사연을 가급적 해결해주려고 합니다. 카페에 사연이 올라오면 바로 번개 모임을 갖고 해결책을 의논합니다. 단순 불우이웃돕기부터 수술비 학비 연탄 지원은 물론 다양한 직업군에 있는 회원들 노력봉사까지 형태는 다양합니다.” 카페에서는 2008년 12월 남구 대명동에 작은 식당을 냈다. ‘서로 돕고 사는 집’이다. 회원들이 낸 회비로 운영하며 매주 두차례 차상위계층 21가구에 도시락을 배달한다. 지난해 12월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직에서 물러나 ‘실직자’가 된 엄씨는 요즘 이 식당으로 출근, 잡일을 돕고 있다.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이웃을 도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웃보듬기’는 평생 업으로 삼고 있어요.” 대구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초등학생때부터 장사해 학비 마련 아들 장가보내며 생애 첫 양복 구입 평생 남을 위해 살고 있는 엄지호씨는 자신에게는 철저한 구두쇠였다. 지난해 11월에야 생애 처음으로 양복을 구입할 정도였다. 둘째 아들 결혼식을 앞두고 대형할인점에서 10만원도 안되는 것으로 샀다. 공직에 있을 때는 ‘근무복’, 퇴임 후에는 점퍼나 재킷으로 버텼다. 하의는 주로 검은색 등산복. 한번 구입하면 구멍 날 때까지 입었다. “고령군에서 도청 발령을 받았는데 정장차림으로 사령장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정장이 없어 사령장을 받지 못했어요. 도청 과장으로 재직할 때는 도의원들이 성화(?)를 해서 고리형 넥타이를 사무실에 두고 의회에 갈 때만 착용했죠.” 엄씨의 구두쇠 노릇은 가난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학창시절에는 소풍과 수학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계란이며 생선 과일 등을 팔아 학비를 조달했다. 최종학력은 고졸이지만 졸업장이 없다. 중·고등학교 등록금이 없어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고3때는 4기분 등록금 5960원을 내지 못해 졸업시험도 거부당했다. 군대도 ‘로비’해서 갔다. 당시 2인 동시입영으로 생계가 곤란할 경우 한명만 입대하면 되는 시기였다. 교사로 가족 생계를 책임지던 형이 입대를 하면 7남매의 집안생계가 어려워 대신 군생활을 자원했다. 시력이 나빠 면제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계를 책임진 형을 대신해 입대를 고집했다. 경북도청 공무원시절에는 남을 돕는 보직만 맡았다. 서무계 포상담당, 위민실, 공보관실 공보계장을 거쳐 서기관으로 승진해서는 가정복지과장과 노인복지과장, 도민연수과장 등으로 공직을 마무리했다. 공직 말년에는 부단체장 발령도 거부했다. 엄씨는 “늙어서 부군수라고 폼잡으면 추해질 수 있어 사양했다”고 말했다. 공직에서 물러나서는 경북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으로 4년간 일했다.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07
- 장소에 맞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코디해 드려요 원주에서 처음 한복 대여점을 열어 한복 대중화에 힘쓴 이가 있다. 개운동 한복대여점 ''만수무강'' 대표 김미정(45)씨. 늦은 오후 매장 안에 들어서니 색색가지의 한복들이 가득 차 있다. 족히 1000벌은 넘어 보인다. 화려한 색상에, 다양한 디자인의 한복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한복이 유달리 잘 어울리는 김 대표. 알고 보니 그녀는 결혼하기 전인 23살에 괴산 진에 뽑혔던 미인대회 출신. 그렇게 한복을 자주 입어야 했던 그녀가 이제는 한복을 코디해 준다. 2003년도에 남편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원주로 이사 온 그녀는 친척분의 권유로 우연찮게 한복 대여점을 시작했다. 원주에 한복 대여점을 열 당시만 해도 한복을 ''대여''한다는 건 일반인에게 생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는 손님 손님마다 최선을 다해 코디해 주고 심지어는 옷고름 매는법부터 여러 가지 한복에 대한 매너까지 덧붙여 설명해 주니 점점 단골이 늘어 지금은 명절이며 특별한 날에 그녀에게 자신의 한복 코디를 맡기는 손님이 많다. 그녀는 한복 한 벌 해 입기 어려운 형편의 국제결혼을 하는 가정이나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한복을 무료로 대여해 주기도 하는데, "그래도 세탁비는 받아요"라며 "그렇게 해야 본인들도 미안해하지 않고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세워주거든요"라며 옅은 미소를 보인다. 한복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입을 수 있게 한복을 알리는 그녀. 그녀야 말로 진정한 한복 전도사가 아닐까 싶다. 문의 : 766-3909 이지현 리포터 1052jee@naver.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