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불리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재심 신청이 지난해 12월 서울지방법원에 접수된 이후 7월 현재까지 재판부에서 심사여부를 놓고 고심 중이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혐의를 벗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역시 재판부에서 재심을 받아줄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것에 비춰보면 이번 결정이 늦춰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일고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지난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라고 밝혀진 바 있다. 의문사 규명위에 의하면 중앙정보부는 관련자들이 혐의를 부인하자 온갖 고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하고 범죄를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 사건은 관련자들이 대법원의 상고기각 이후 사형이 확정된 지 불과 20시간만에 8명의 사형을 집행해 사실상 ‘사법살인’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외에도 70·80년대 군부독재시대 당시 누명을 쓰거나 정부의 사건 조작에 의해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재조명되고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례나 법원의 판결은 법에 나와 있는 재심사유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재심청구를 받아들이고 있어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재심을 둘러싼 공방 = 재심의 확대는 대법원에 의해 확정된 판결을 다시 재판한다는 면에서 법적 안정성을 위태롭게 하는 반면 법관도 인간인 이상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인권보장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갖고 있다.
‘법적 안정성이 우선이냐’,‘구체적 사건의 타당성이 우선이냐’라는 쟁점은 사건을 검토하는 법관들이 매번 빠지는 고민이기도 하다.
법관들은 몇몇 특정한 사안들 때문에 재심을 활성화하자는 식의 일반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법원행정처 모 판사는 “재심제도가 활성화되면 대법원 판결에 불복해 재심을 신청하는 사례가 크게 늘 것”이라며 “요즘과 같이 특별사면·가석방 등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재심까지 활성화되면 법원 판결이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서울지법 모 부장판사 역시 “대법원 판결은 소송으로 인한 시간·비용의 낭비를 끝낸다는 종결의 의미도 크다”며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상황에서 몇 십년 전의 증언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재심을 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전제일 간사는 “재심사유를 너무 협소하게 정한 법규에도 문제가 있고 이를 너무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법관들도 문제가 있다”며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지법의 모 부장판사는 “군부독재시절은 비정상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에서 운용되는 법규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며 “강압과 조작이 난무하던 시절임을 고려하면 법원이 특정사건에 이를 반영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 재심 기각 사건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아직 재심 여부를 고려 중이지만 70·80년대 조작간첩 사건으로 연루된 이들에 대한 재심청구는 기각돼 왔다.
대표적인 조작간첩 사건으로 알려진 이장형·강희철씨 사건은 지난 2001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장형(72)씨는 지난 84년 영장도 없이 치안본부 남영동분실로 연행된 뒤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76일간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간첩으로 조작돼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강희철(42)씨 역시 지난 86년 제주경찰청 대공분실로 연행된 뒤 105일간의 불법감금과 고문으로 간첩이 돼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이씨와 강씨는 지난 98년 8·15 특사로 가석방됐다.
천구교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이 같은 조작간첩에 연루된 사람들은 자체 조사결과 수백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간첩으로 낙인찍히면 사회에서 매장되다시피 했던 과거의 역사에서 이들은 심신의 고통은 물론 가정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
또한 지난 7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원춘천의 ‘초등학교 5학년생 파출소장 딸 강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구속 기소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확정 선고받은 정 모씨 역시 관련자들이 모두 증언을 번복했음에도 재심이 기각됐다.
정씨의 억울한 사연을 전해들고 지난해 국회의원 10여명이 대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는데 이때 의원들은 “재판부가 기각판결을 내린 것은 당시 증인들이 경찰의 강요 때문에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시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통탄한 바 있다.
◆“재심사유 융통성 있게 적용” = 형사사건 재심의 경우 법원에서 받아들이는 두가지 중요한 이유는 △원판결의 사실을 인정하는데 사용한 증거가 허위이거나 △원판결의 사실인정을 변경할 만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됐을 때이다.
따라서 재심이 받아들여지고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사건의 가장 확실한 새로운 증거는 진범이 잡혔을 때이다. 군부독재시절 조작사건들의 대부분이 명백한 증거 없이 관련자들의 증언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새롭고 명백한 증거를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이다.
재심이 거론되는 사건들은 관련자들이 “그 때 법정에서 한 진술은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뤄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불거진 것들이다.
재판부가 이런 사건들에 대해 법규에 있는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획일적으로 배척한다면 새로운 물증 자체를 발견할 수 없는 당사자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하다는 것이 재심확대를 주장하는 이유다.
서울지법의 모 판사는 “재심사유를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법관들이 이를 회피하고자 하는 심정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며 “법규에 나온 대로 처리하는 게 문제도 없고 쉽기 때문에 고민 없는 법적용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법관들이 어렵더라도 고민을 거쳐 법규를 탄력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혐의를 벗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역시 재판부에서 재심을 받아줄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것에 비춰보면 이번 결정이 늦춰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일고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지난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라고 밝혀진 바 있다. 의문사 규명위에 의하면 중앙정보부는 관련자들이 혐의를 부인하자 온갖 고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하고 범죄를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 사건은 관련자들이 대법원의 상고기각 이후 사형이 확정된 지 불과 20시간만에 8명의 사형을 집행해 사실상 ‘사법살인’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외에도 70·80년대 군부독재시대 당시 누명을 쓰거나 정부의 사건 조작에 의해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재조명되고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례나 법원의 판결은 법에 나와 있는 재심사유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재심청구를 받아들이고 있어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재심을 둘러싼 공방 = 재심의 확대는 대법원에 의해 확정된 판결을 다시 재판한다는 면에서 법적 안정성을 위태롭게 하는 반면 법관도 인간인 이상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인권보장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갖고 있다.
‘법적 안정성이 우선이냐’,‘구체적 사건의 타당성이 우선이냐’라는 쟁점은 사건을 검토하는 법관들이 매번 빠지는 고민이기도 하다.
법관들은 몇몇 특정한 사안들 때문에 재심을 활성화하자는 식의 일반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법원행정처 모 판사는 “재심제도가 활성화되면 대법원 판결에 불복해 재심을 신청하는 사례가 크게 늘 것”이라며 “요즘과 같이 특별사면·가석방 등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재심까지 활성화되면 법원 판결이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서울지법 모 부장판사 역시 “대법원 판결은 소송으로 인한 시간·비용의 낭비를 끝낸다는 종결의 의미도 크다”며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상황에서 몇 십년 전의 증언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재심을 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전제일 간사는 “재심사유를 너무 협소하게 정한 법규에도 문제가 있고 이를 너무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법관들도 문제가 있다”며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지법의 모 부장판사는 “군부독재시절은 비정상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에서 운용되는 법규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며 “강압과 조작이 난무하던 시절임을 고려하면 법원이 특정사건에 이를 반영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 재심 기각 사건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아직 재심 여부를 고려 중이지만 70·80년대 조작간첩 사건으로 연루된 이들에 대한 재심청구는 기각돼 왔다.
대표적인 조작간첩 사건으로 알려진 이장형·강희철씨 사건은 지난 2001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장형(72)씨는 지난 84년 영장도 없이 치안본부 남영동분실로 연행된 뒤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76일간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간첩으로 조작돼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강희철(42)씨 역시 지난 86년 제주경찰청 대공분실로 연행된 뒤 105일간의 불법감금과 고문으로 간첩이 돼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이씨와 강씨는 지난 98년 8·15 특사로 가석방됐다.
천구교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이 같은 조작간첩에 연루된 사람들은 자체 조사결과 수백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간첩으로 낙인찍히면 사회에서 매장되다시피 했던 과거의 역사에서 이들은 심신의 고통은 물론 가정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
또한 지난 7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원춘천의 ‘초등학교 5학년생 파출소장 딸 강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구속 기소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확정 선고받은 정 모씨 역시 관련자들이 모두 증언을 번복했음에도 재심이 기각됐다.
정씨의 억울한 사연을 전해들고 지난해 국회의원 10여명이 대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는데 이때 의원들은 “재판부가 기각판결을 내린 것은 당시 증인들이 경찰의 강요 때문에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시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통탄한 바 있다.
◆“재심사유 융통성 있게 적용” = 형사사건 재심의 경우 법원에서 받아들이는 두가지 중요한 이유는 △원판결의 사실을 인정하는데 사용한 증거가 허위이거나 △원판결의 사실인정을 변경할 만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됐을 때이다.
따라서 재심이 받아들여지고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사건의 가장 확실한 새로운 증거는 진범이 잡혔을 때이다. 군부독재시절 조작사건들의 대부분이 명백한 증거 없이 관련자들의 증언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새롭고 명백한 증거를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이다.
재심이 거론되는 사건들은 관련자들이 “그 때 법정에서 한 진술은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뤄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불거진 것들이다.
재판부가 이런 사건들에 대해 법규에 있는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획일적으로 배척한다면 새로운 물증 자체를 발견할 수 없는 당사자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하다는 것이 재심확대를 주장하는 이유다.
서울지법의 모 판사는 “재심사유를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법관들이 이를 회피하고자 하는 심정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며 “법규에 나온 대로 처리하는 게 문제도 없고 쉽기 때문에 고민 없는 법적용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법관들이 어렵더라도 고민을 거쳐 법규를 탄력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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