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이 잡혔다고는 하나 아직 불씨가 날리는 화재현장. 아침 9시30분에 현장에 출동해 점심은 고사하고 벌써 6시간이 지났지만 요원들의 손길은 여전히 분주하다. 요란한 주변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들은 제자리에서 이따금 쪼그리고 앉은 다리를 펴는 일 말고는 움직임이 거의 없다. 오후 3시30분을 넘기면서 요원들은 서로의 의견을 나눈 뒤 증거물과 감식세트를 챙겼다.
경찰 입문 24년을 넘긴 전북지방경찰청 한남열(53. 과학수사계) 경사. 그가 하는 일은 화재나 사건현장을 감식(鑑識)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증거를 찾아 원인을 밝히는 일이다. 한 경사는 올해로 22년째 감식업무를 맡고 있는 전북지방청 최고의 베테랑 요원이다.
“현장에 가면 일단 주변 상황부터 확인합니다. 과학장비가 좋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읽지 않고는 자칫 증거를 훼손할 수 도 있으니까요. 그 다음에 증거물을 찾아 나섭니다. 어떤 때는 재가 날릴 수 있으니 숨도 크게 못 쉬기도 하죠.”
그가 감식업무를 맡게 된 계기는 평소 사진 찍기를 좋아해‘카메라를 좀 안다’는 이유에서다. 지금이야 지문자동검색기가 일선 경찰서에 일상화 돼 있지만 당시만 해도 카메라와 지문채취 도구와 족적을 뜨는 석고박스가 유일한 감식장비였다.
“감식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경력이 짧은 경찰이 맡는 업무로 여기는 분위기였죠. 지금이야 장비도 좋아지고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도 다양해졌습니다.”
흔히 ‘감식반’으로 통했던 부서가 시대적 흐름을 타고 과학수사계로 발전하면서 5년, 10년 이상 경험을 쌓은 후배 요원들이 늘고 있다고. 그러나 장비의 과학화 못지 않게 요원들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망 후 오랜 시간이 흘러 지문이 보이지 않는 사체에서 분비물을 닦아내고, 주무르기를 수십차례 반복해 겨우 얻어 낸 지문으로 신원을 확인하는 일에는 최첨단의 장비 못지 않게 수사요원의 열정과 인내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1981년 감식반 배정 후 처음 처리했던 사망사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한 농촌마을이었는데 생활고로 아들을 결혼시키지 못하는 것을 비관한 촌로가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었죠. 꼭 ‘아들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눈이었습니다.”
그 후 한 경사는 후배 요원들에게 현장의 증거보전 못지 않게 망자(亡者)에 대한 예의를 강조한다. 미제로 남은 사건현장을 지날 때면 고인에 대한 자책감에 며칠을 고생하곤 한다. 벌겋게 달아오른 함석판에 손을 데기 일쑤고, 못에 찔리고,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고역이지만 그래도 그는 ‘감식요원’이고 싶다고 말한다.
여전히 부족한 전문감정업무 기관의 확대와 특채를 해서라도 의학적 지식을 갖춘 검시관 등이 배치되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전주 이명환 기자 mhan@naeil.com
경찰 입문 24년을 넘긴 전북지방경찰청 한남열(53. 과학수사계) 경사. 그가 하는 일은 화재나 사건현장을 감식(鑑識)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증거를 찾아 원인을 밝히는 일이다. 한 경사는 올해로 22년째 감식업무를 맡고 있는 전북지방청 최고의 베테랑 요원이다.
“현장에 가면 일단 주변 상황부터 확인합니다. 과학장비가 좋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읽지 않고는 자칫 증거를 훼손할 수 도 있으니까요. 그 다음에 증거물을 찾아 나섭니다. 어떤 때는 재가 날릴 수 있으니 숨도 크게 못 쉬기도 하죠.”
그가 감식업무를 맡게 된 계기는 평소 사진 찍기를 좋아해‘카메라를 좀 안다’는 이유에서다. 지금이야 지문자동검색기가 일선 경찰서에 일상화 돼 있지만 당시만 해도 카메라와 지문채취 도구와 족적을 뜨는 석고박스가 유일한 감식장비였다.
“감식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경력이 짧은 경찰이 맡는 업무로 여기는 분위기였죠. 지금이야 장비도 좋아지고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도 다양해졌습니다.”
흔히 ‘감식반’으로 통했던 부서가 시대적 흐름을 타고 과학수사계로 발전하면서 5년, 10년 이상 경험을 쌓은 후배 요원들이 늘고 있다고. 그러나 장비의 과학화 못지 않게 요원들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망 후 오랜 시간이 흘러 지문이 보이지 않는 사체에서 분비물을 닦아내고, 주무르기를 수십차례 반복해 겨우 얻어 낸 지문으로 신원을 확인하는 일에는 최첨단의 장비 못지 않게 수사요원의 열정과 인내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1981년 감식반 배정 후 처음 처리했던 사망사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한 농촌마을이었는데 생활고로 아들을 결혼시키지 못하는 것을 비관한 촌로가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었죠. 꼭 ‘아들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눈이었습니다.”
그 후 한 경사는 후배 요원들에게 현장의 증거보전 못지 않게 망자(亡者)에 대한 예의를 강조한다. 미제로 남은 사건현장을 지날 때면 고인에 대한 자책감에 며칠을 고생하곤 한다. 벌겋게 달아오른 함석판에 손을 데기 일쑤고, 못에 찔리고,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고역이지만 그래도 그는 ‘감식요원’이고 싶다고 말한다.
여전히 부족한 전문감정업무 기관의 확대와 특채를 해서라도 의학적 지식을 갖춘 검시관 등이 배치되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전주 이명환 기자 m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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