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층에 일상화한 탈법과 불법
정달영 언론인
두 차례나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국무총리 지명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과정을 통해 확인되는 현상의 하나는 우리 주변에 만연된 탈법과 불법, 그리고 온갖 편법(便法)이 ‘상류층’과 ‘주류사회’ 에서 예외 없이 일상화(日常化)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녀를 ‘좋은’ 지역의 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을 한다든가, 병역이나 교육 등에서 얻어낼 수 있는 편익을 고려해서 자녀의 국적을 손쉽게 취사(取捨)한다든가, 좋은 말로 재산증식의 수단인 ‘투기’ 목적으로 부동산을 사고판다든가 하는 것들이 그 사례다.
세상의 많은 이들이 하는데 나라고 못할 일이 있느냐, 이런 일들은 이를테면 ‘누구나 하는 것’ 인데 나에게만 특별히 법과 규칙을 어기는 짓이 되고, 그것으로 양심의 가책(呵責)까지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 그래서 그들은 입으로는 ‘사과’ 를 하면서, 속으로는 진정한 죄의식은 느끼지 않는다는 태도를 내보이기도 한다.
불법의 일상화는 무법사회(無法社會)의 단면이다. ‘법을 어기고도 살 수 있는’ 사회에서 더 나아가 ‘법을 어길수록 잘 사는’ 사회가 그런 세상일 것이다.
‘해도 너무 했다’ ‘썩어도 너무 썩었다’는, 그런 세상을 향한 서민층의 탄식은 재건축 지역의 아파트를 대상으로 광란에 가까운 투기를 벌인 일부 상류층의 행태를 보면서 쏟아져 나온다.
불로소득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곳이면 어디라도, 너나없이, 가진 이들일수록 앞장서서 달려가는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군상(群像)을 확인하게 된다. 국세청은 그동안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야 나섰다는 것인지 따지고 싶을 정도다.
우리 모두는 언제부턴가 염치도, 체면도, 최소한의 게임 규칙도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함께 사는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없는 세상이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편하고 우리 편만 잘 나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상류층, 배운 사람들, 주류층을 ‘당연한’ 일인 듯이 지배한다. 아무도 우리의 이웃으로서의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총리 청문회에서 입증된 주류사회의 탐욕
이른바 사회적 약자, 낙오된 이들, 힘없는 소수, 소외된 서민, 학업과 능력이 뒤처진 이들의, 이 모든 비(非)주류들이 겪어야 하는 험난한 문제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정운찬 신임 서울대 총장이 추진 방침을 밝힌 신입생 선발 지역할당제는 그 시행에 예상되는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권력형 비리와 부패와 여야 극한대결을 보아 오면서 정치혐오의 늪에 빠져버린 국민들에게 한 가닥 신선한 느낌을 준다.
우리의 입시제도와 서울대학교가 당면한 문제들, 그리고 정치 허무주의 같은 생각들이, 지금 제안된 ‘지역할당제’로 무슨 본질적인 변화에 맞닥뜨리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획일화한 현행 대입전형 방식에 대해 다양한 변화를 주는 방안의 하나라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사회적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시도라는 점에서 그 뜻은 매우 크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 비주류, 마이너리티에 대한 ‘배려’ 의 정신이 표현되고 발휘되는 모습은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언제나 아쉽고 필요한 것은, 사회 공동체 안에서 소외된 계층을 의식하고 배려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오늘이나 예나 다르지 않다. 우리 역사를 거슬러 보더라도 ‘주류만이 영원하다’는 믿음이 입증될 만큼 주류독점의 시대가 오래도록 지속돼 왔다. 비주류에 대한 ‘배려’ 의 전통이 약한 것이다.
남인 세력이 제거된 1694년(숙종 20년)부터 1910년 일제에 의한 병탄까지 216년간을 장기 집권한 노론(老論) 세력은 조선조 후기의 유일무이한 ‘주류’다. 당시의 국왕들까지도 주류에 편입시켜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주류 노론세력은 나라가 망하기(國亡)에 이르자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가 주는 작위(爵位)를 받아 목에 걸고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하여 지배층의 지위를 계속 유지한다.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은 양반으로서는 우당 이회영 6형제가 대표하듯 비주류-야당인 소론(少論)과 일부 남인들이었다.
우리 역사의 가장 참담한 비극의 한 장면은 친일세력으로 옷을 갈아입은 조선조 후기의 ‘주류’ 인 노론들이 해방이후 국내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과 손잡고 이번에는 반공세력이 되어 계속 ‘주류’ 지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된다. 해방이후의 현대사 반세기에도 조선조 이래의 비주류 소외가 계속되어 온 것이다.
서울대 지역할당제, 비주류 소외 달래는 각성
서울대 신입생 지역할당제는 섣불리 정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평가할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소외층, 소수자, 비주류에 대한 새삼스러운 각성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건과 환경이 불리한 처지에 놓인 경쟁자들, 그로써 시작부터 불공정의 핸디캡을 안고 출발하는 지역의 소수자들에게 입학전형에서 특별한 기회를 주는 것은 일찍이 우리 사회가 경험할 기회가 적었던 ‘배려’를 실현하는 것이고 게임 룰로서도 오히려 공정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힘겨워 하는 이웃, 눈물짓는 사람들을 손잡아 이끌고 눈물 닦아주는 것은 사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당연한 책임이다. 이는 정치의 영역만이 아니다. 남부터 배려하는 정신이, 이로써 우리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정달영 언론인
정달영 언론인
두 차례나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국무총리 지명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과정을 통해 확인되는 현상의 하나는 우리 주변에 만연된 탈법과 불법, 그리고 온갖 편법(便法)이 ‘상류층’과 ‘주류사회’ 에서 예외 없이 일상화(日常化)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녀를 ‘좋은’ 지역의 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을 한다든가, 병역이나 교육 등에서 얻어낼 수 있는 편익을 고려해서 자녀의 국적을 손쉽게 취사(取捨)한다든가, 좋은 말로 재산증식의 수단인 ‘투기’ 목적으로 부동산을 사고판다든가 하는 것들이 그 사례다.
세상의 많은 이들이 하는데 나라고 못할 일이 있느냐, 이런 일들은 이를테면 ‘누구나 하는 것’ 인데 나에게만 특별히 법과 규칙을 어기는 짓이 되고, 그것으로 양심의 가책(呵責)까지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 그래서 그들은 입으로는 ‘사과’ 를 하면서, 속으로는 진정한 죄의식은 느끼지 않는다는 태도를 내보이기도 한다.
불법의 일상화는 무법사회(無法社會)의 단면이다. ‘법을 어기고도 살 수 있는’ 사회에서 더 나아가 ‘법을 어길수록 잘 사는’ 사회가 그런 세상일 것이다.
‘해도 너무 했다’ ‘썩어도 너무 썩었다’는, 그런 세상을 향한 서민층의 탄식은 재건축 지역의 아파트를 대상으로 광란에 가까운 투기를 벌인 일부 상류층의 행태를 보면서 쏟아져 나온다.
불로소득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곳이면 어디라도, 너나없이, 가진 이들일수록 앞장서서 달려가는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군상(群像)을 확인하게 된다. 국세청은 그동안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야 나섰다는 것인지 따지고 싶을 정도다.
우리 모두는 언제부턴가 염치도, 체면도, 최소한의 게임 규칙도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함께 사는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없는 세상이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편하고 우리 편만 잘 나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상류층, 배운 사람들, 주류층을 ‘당연한’ 일인 듯이 지배한다. 아무도 우리의 이웃으로서의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총리 청문회에서 입증된 주류사회의 탐욕
이른바 사회적 약자, 낙오된 이들, 힘없는 소수, 소외된 서민, 학업과 능력이 뒤처진 이들의, 이 모든 비(非)주류들이 겪어야 하는 험난한 문제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정운찬 신임 서울대 총장이 추진 방침을 밝힌 신입생 선발 지역할당제는 그 시행에 예상되는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권력형 비리와 부패와 여야 극한대결을 보아 오면서 정치혐오의 늪에 빠져버린 국민들에게 한 가닥 신선한 느낌을 준다.
우리의 입시제도와 서울대학교가 당면한 문제들, 그리고 정치 허무주의 같은 생각들이, 지금 제안된 ‘지역할당제’로 무슨 본질적인 변화에 맞닥뜨리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획일화한 현행 대입전형 방식에 대해 다양한 변화를 주는 방안의 하나라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사회적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시도라는 점에서 그 뜻은 매우 크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 비주류, 마이너리티에 대한 ‘배려’ 의 정신이 표현되고 발휘되는 모습은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언제나 아쉽고 필요한 것은, 사회 공동체 안에서 소외된 계층을 의식하고 배려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오늘이나 예나 다르지 않다. 우리 역사를 거슬러 보더라도 ‘주류만이 영원하다’는 믿음이 입증될 만큼 주류독점의 시대가 오래도록 지속돼 왔다. 비주류에 대한 ‘배려’ 의 전통이 약한 것이다.
남인 세력이 제거된 1694년(숙종 20년)부터 1910년 일제에 의한 병탄까지 216년간을 장기 집권한 노론(老論) 세력은 조선조 후기의 유일무이한 ‘주류’다. 당시의 국왕들까지도 주류에 편입시켜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주류 노론세력은 나라가 망하기(國亡)에 이르자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가 주는 작위(爵位)를 받아 목에 걸고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하여 지배층의 지위를 계속 유지한다.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은 양반으로서는 우당 이회영 6형제가 대표하듯 비주류-야당인 소론(少論)과 일부 남인들이었다.
우리 역사의 가장 참담한 비극의 한 장면은 친일세력으로 옷을 갈아입은 조선조 후기의 ‘주류’ 인 노론들이 해방이후 국내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과 손잡고 이번에는 반공세력이 되어 계속 ‘주류’ 지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된다. 해방이후의 현대사 반세기에도 조선조 이래의 비주류 소외가 계속되어 온 것이다.
서울대 지역할당제, 비주류 소외 달래는 각성
서울대 신입생 지역할당제는 섣불리 정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평가할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소외층, 소수자, 비주류에 대한 새삼스러운 각성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건과 환경이 불리한 처지에 놓인 경쟁자들, 그로써 시작부터 불공정의 핸디캡을 안고 출발하는 지역의 소수자들에게 입학전형에서 특별한 기회를 주는 것은 일찍이 우리 사회가 경험할 기회가 적었던 ‘배려’를 실현하는 것이고 게임 룰로서도 오히려 공정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힘겨워 하는 이웃, 눈물짓는 사람들을 손잡아 이끌고 눈물 닦아주는 것은 사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당연한 책임이다. 이는 정치의 영역만이 아니다. 남부터 배려하는 정신이, 이로써 우리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정달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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