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옥(42세 ·성사1동)씨. 천주교 신자인 그녀의 기도 속엔 건강에 대한 감사가 넘쳐난다.
그녀가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지는 약 20년. 그 동안 여러 곳에서 다양한 모습의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기까지는 건강한 육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하루는 새벽 미사가 있는 날이면 새벽 5시에 일어나고 성당에서 연계되는 사회봉사 외에 일주일에 한번은 덕양노인종합복지관에서의 한글교실, 원당사회복지관에서의 도시락 배달에 이은 이동목욕봉사, 일주일에 두 번은 늦게 시작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가야하는 일과로 짜여져 있다. 이 모든 일을 다하면서도 살림 또한 빈틈없는 솜씨로 남편의 퇴근이나 중학교 3학년인 딸과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항상 귀가하여 식구들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어 그녀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자정을 넘기기가 일쑤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맞지 않는 경우에는 아이들을 동반하여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김씨. 이는 자신의 의지도 있지만 아이들을 혼자 두지 말고 잘 보살펴야 한다는 친정어머니의 간곡한 당부가 늘 뇌리 속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편은 같은 성당에서 봉사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김씨의 생활을 적극 도와주고 있고 아이들은 방학이면 어김없이 김씨와 봉사활동을 함께 하고 있는 봉사가 생활화 된 가족이다. 그래도 칭찬을 받기엔 별로 한일이 없어 부끄럽다며 겸손해하는 김명옥씨.
동네 어른들과 함께 한 따뜻했던 어린 시절(소제목)
김씨는 장애인 등 불우 이웃을 위한 여러 일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녀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외로운 노인들이다. 지금도 한글교실에서 노인들을 만날 때 행복하다는 김씨. 어려서부터 또래와 이야기하는 것보다 어른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고 회상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직장에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동네 아주머니들의 정겨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척이나 고마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일까. 김씨는 결혼 후 자녀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는 늘 동네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정자 아래로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 노인들의 시중을 들어들이고 말벗 역할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의 심성이 누구보다 따뜻하고 생각의 폭 또한 넓고 깊은 것 같다는 김씨. 그 당시 특별한 교육 목적을 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그 당시를 추억하며 기억 하나 하나를 아름답게 떠올리는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정말 잘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엔 아파 누운 노인 댁을 방문하여 청소와 살림 등을 봐주는 도움에서 시작, 이제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장소와 기회를 제공해주는 중간역할까지 하게되면서 봉사의 개념을 다시 정립하고 체계적으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는 김씨. 언젠가 국가의 의료혜택과 지원을 받기 위해 생계가 막연한 시어머니를 위해 고의로 며느리가 자식들을 남기고 가출을 해야했던 가슴아픈 사연을 이야기하며 현실과 법의 모순됨을 피부로 느끼며 더욱 공부에 뜻을 두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난 시간동안 진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법에 묶여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가슴아픈 경우를 접할 때마다 공부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 같아요. 또한 돈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봉사 과정에서 물질적인 도움 또한 적지 않게 해보았지만 개인이 감당하기엔 한계가 있어 좌절이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앞으로 저희 부부의 바램은 능력을 성장 시켜 불우 이웃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서 더불어 살고 싶어요.”
전미정 리포터 flnari@naeil.com
그녀가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지는 약 20년. 그 동안 여러 곳에서 다양한 모습의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기까지는 건강한 육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하루는 새벽 미사가 있는 날이면 새벽 5시에 일어나고 성당에서 연계되는 사회봉사 외에 일주일에 한번은 덕양노인종합복지관에서의 한글교실, 원당사회복지관에서의 도시락 배달에 이은 이동목욕봉사, 일주일에 두 번은 늦게 시작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가야하는 일과로 짜여져 있다. 이 모든 일을 다하면서도 살림 또한 빈틈없는 솜씨로 남편의 퇴근이나 중학교 3학년인 딸과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항상 귀가하여 식구들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어 그녀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자정을 넘기기가 일쑤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맞지 않는 경우에는 아이들을 동반하여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김씨. 이는 자신의 의지도 있지만 아이들을 혼자 두지 말고 잘 보살펴야 한다는 친정어머니의 간곡한 당부가 늘 뇌리 속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편은 같은 성당에서 봉사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김씨의 생활을 적극 도와주고 있고 아이들은 방학이면 어김없이 김씨와 봉사활동을 함께 하고 있는 봉사가 생활화 된 가족이다. 그래도 칭찬을 받기엔 별로 한일이 없어 부끄럽다며 겸손해하는 김명옥씨.
동네 어른들과 함께 한 따뜻했던 어린 시절(소제목)
김씨는 장애인 등 불우 이웃을 위한 여러 일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녀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외로운 노인들이다. 지금도 한글교실에서 노인들을 만날 때 행복하다는 김씨. 어려서부터 또래와 이야기하는 것보다 어른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고 회상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직장에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동네 아주머니들의 정겨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척이나 고마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일까. 김씨는 결혼 후 자녀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는 늘 동네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정자 아래로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 노인들의 시중을 들어들이고 말벗 역할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의 심성이 누구보다 따뜻하고 생각의 폭 또한 넓고 깊은 것 같다는 김씨. 그 당시 특별한 교육 목적을 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그 당시를 추억하며 기억 하나 하나를 아름답게 떠올리는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정말 잘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엔 아파 누운 노인 댁을 방문하여 청소와 살림 등을 봐주는 도움에서 시작, 이제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장소와 기회를 제공해주는 중간역할까지 하게되면서 봉사의 개념을 다시 정립하고 체계적으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는 김씨. 언젠가 국가의 의료혜택과 지원을 받기 위해 생계가 막연한 시어머니를 위해 고의로 며느리가 자식들을 남기고 가출을 해야했던 가슴아픈 사연을 이야기하며 현실과 법의 모순됨을 피부로 느끼며 더욱 공부에 뜻을 두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난 시간동안 진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법에 묶여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가슴아픈 경우를 접할 때마다 공부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 같아요. 또한 돈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봉사 과정에서 물질적인 도움 또한 적지 않게 해보았지만 개인이 감당하기엔 한계가 있어 좌절이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앞으로 저희 부부의 바램은 능력을 성장 시켜 불우 이웃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서 더불어 살고 싶어요.”
전미정 리포터 flnari@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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