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꽁꽁 언 땅을 뚫고 움튼 새싹과 마주하듯 어느 봄날 만난 나흥식 명예교수와의 첫 만남은 그런 순간이었다. 감히 비유하자면 ‘따뜻한 인간다움’의 깨달음과 자기반성을 넘어 ‘따뜻한 인간다움의 전도체’에 감전된 듯했다. 나흥식 교수가 고려대학교 핵심 교양과목인 ‘생물학적 인간’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말이자, 그의 저서 <What am I> 머리말 첫 문장이기도 한 ‘모든 학문은 인간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귀결됩니다’라는 의미의 ‘본체(本體)’를 만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묘사일지도 모른다. 뇌의학자이자 생리학자인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나흥식 명예교수와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그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나흥식 명예교수는?
1981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박사를 마쳤으며, 1990년 모교인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부임한 후 기초의학인 생리학 연구와 학생 교육에 매진해 왔다. 고려대 우수 강의상인 ‘석탑강의상’을 19회 수상했으며, 세계 3대 인명사전 중 하나인 ‘마르키즈 후즈후(Marquis Who’s Who)’에 등재(2018년)됐다. 또한, 대한생리학회 이사장, 한국뇌신경과학회 회장, 한국뇌연구협회 회장, 고려대학교 의대 학장 및 의학전문대학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기초의학 분야에서는 최초로 제2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위원에 위촉되었다. 2020년 정년 퇴임 후 현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초·중·고등학교 및 기업체 등에서 활발하게 강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주요 저서
<(생리학자 나흥식 교수와 함께하는) 내 몸이 궁금해서 내 맘이 궁금해서>(출판사 이와우, 출간 2022.08.08.), <What am I(국내 최고 뇌의학자가 전하는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통찰)>(출판사 이와우, 2019.05.27.) 등이 있다.
#나흥식 표 ‘행복’ 물음표? 느낌표!
인생의 참맛?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는 것
나흥식 명예교수는 대중에게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명강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쓴 인류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과학적인 시각으로 풀어낸 책 <What am I>와 인체에 대한 궁금증을 과학, 인문학, 철학으로 흥미롭게 풀어낸 책 <내 몸이 궁금해서 내 맘이 궁금해서>는 의대 지망생들이 많이 읽는 도서이자 의학 및 생명과학 계열 진로 추천 도서로 손꼽혀 왔다. 그는 지금도 초·중·고등학교를 찾아가 수많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지만, CBS TV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여러 번 강연하며 대중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그의 강연 주제는 다양하지만, 세바시 강연 주제였던 ‘뇌의학자가 강추하는 건강과 행복의 비결’, ‘잘 분비만 시켜도 나의 건강과 행복을 지켜줄 호르몬들’, ‘나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타인을 위한 마음이 우리 뇌에 어떤 영향을 만들어내는지)’, ‘건강하게 갓생 사는 법’ 등의 주제를 보면 ‘인간 나흥식의 삶’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저는 매일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등산을 하는 등 꾸준히 운동하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요. 정년 퇴임하기 전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면,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할 수 있죠.”
그는 매일 아침 산에 오르고 독서하는 ‘일상 루틴’에 더해, 자신이 전공했던 생리학의 기틀인 생명현상의 이치에 따라 인생의 참맛을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형태로 풀어낸다. 인생을 요리하는 삶의 쉐프답다.
학교 선생님의 질문,
생명과학에서 느낌표를 찾다!
‘나흥식 표’ 인생의 맛은 지나온 시간만큼 영글고 더 깊은 맛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의 즐거운 시작점은 언제부터였을까?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당시 생물 선생님이 ‘얘들아, 나뭇잎이 왜 초록색인 줄 아니?’라는 질문을 던지셨어요. 그리고 ‘다른 빛은 광합성에 쓰고 초록빛만 반사하는 엽록소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이셨죠. 그때 선생님의 질문이 저에게는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그 당시에 ‘만일 초록색 등불로 빛을 제한한다면 식물이 굶어 죽게 되는 건가?’라는 궁금증이 생겨, 집 지하실에서 실험해 봤죠. 그때부터 생명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의과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의대에 다니는 6년 동안 ‘운화회’라는 동아리에서 운영한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운화회’는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고려대 교육봉사 동아리로, 지금까지 5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의대 시절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육하는 법’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당시의 경험이 제가 ‘고려대 강의왕’으로 발전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뇌를 열어주는 역할, 고려대 강의왕의 교육철학
나흥식 명예교수는 학생들이 손꼽는 ‘고려대 강의왕’답게 남다른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다. 공부는 ‘노동’처럼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즐겁게’ 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고려대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기식’의 경쟁 방식이 아닌, ‘옆으로 나란히 서서 모두 함께 1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하기’를 목표로 하는 강의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그의 저서 <What am I> 1장 ‘집단 사냥의 속성을 이용하라’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방글라데시 무함마드 유누스 교수는 ‘빈민들을 위한 무담보 소액 대출 제도’를 개발해 빈곤퇴치에 앞장선 공을 인정받아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어요.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무담보로 돈을 빌려주면 떼이기 쉽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으며 자신의 이론을 증명했고, 그의 방식은 전 세계에 도입되어 수많은 이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저는 그 방식에 착안해 2006년부터 ‘팀기반학습’이라는 강의법을 개발했습니다. 공부가 기계적으로 외우는 형태의 ‘노동’이나 ‘전투적인 대결’이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로 인식된다면 성공이겠지요. 기본적으로 인간의 뇌는 닫혀있습니다. 재미나 논리가 없는 정보라면 뇌는 입력을 거부하기까지 합니다. 선생님들도 재미없고 지루한 연수교육을 듣기 싫어하지요. 저는 뇌과학자로서 어떻게 하든 공부를 재미있게 만들어 학생들의 닫혀있는 뇌를 열려고 노력했고 이것이 교육의 ‘키(Key)’라고 생각했습니다.”
나흥식 명예교수가 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경기지역 과학교사모임인 ‘신과람(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과 서울특별시교육청의 중·고등학교 과학교사 연수교육에서 ‘스토리텔링으로 과학을 재미있게 가르치는 법’에 대해 다수의 강연을 해왔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각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과도 만나는 등 정년 퇴임 이후에도 활발한 강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의과대학 교수가 말하는 1등의 의미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길
의과대학 입학생들은 저마다 고등학교에서 1등을 했던 우수한 학생들이다. 그러나 나흥식 명예교수는 예과 1학년이 되면 ‘1등’이라는 생각은 버리라고 말한다. 수많은 1등이 모여 있으니 자만하지 말라는 의미일 거로 생각했으나, 그의 답변은 결을 달리했다.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1등을 했다는 사실이 환자한테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식을 습득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즉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고려대에서 15년간 입학사정관을 했습니다. 의대에 지원하는 학생들의 성적은 모두 우수하고 아주 적은 점수 차이만 날 뿐이죠. 저는 지원하는 학생들의 학교생활기록부에서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담임선생님이 쓰신 의견을 주의 깊게 봤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의 마음도 헤아려야 하고, 간호사 등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마음도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는 비단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에게 국한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강남서초교육지원청의 인성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 서초구 학부모를 대상으로 교육 재능기부 강연도 하고 있어요. 강의 주제는 ‘아이를 똑똑하게 키우는 것에 국한하지 말고 따뜻함을 겸비하게 해야 인공지능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인성 교육은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려대 의과대학 강의, 나란히 서서 함께 성장하기
그의 이런 교육철학은 독특한 강의 방식에서도 오롯이 엿볼 수 있다. 그가 개발했던 일명 ‘팀기반학습’은 다음과 같다.
“고려대는 의과대학 본과 1학년 학생이 120명 정도인데, 1등부터 줄 세우기식 경쟁을 붙이는 게 아니라 10명씩 12개 팀으로 나눠서 100개가 넘는 문제에 대한 리포트를 팀당 하나만 제출하게 했습니다. 이후 ‘구술 평가제’를 시행했지요. 10명의 팀원 중에 무작위로 1명을 뽑아서 질문을 던지고 답변에 대한 점수를 나머지 팀원에게 똑같이 주겠다고 한 거죠. 누가 됐든 뽑힌 한 명이 모든 팀원의 점수를 좌우하는 거니까, 학생들이 서로의 공부를 봐주고 내용을 확인하며 경쟁이 아닌 ‘같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구술평가 도중 다른 팀의 발표를 보며 안타까워하거나 박수를 쳐주는 등 마치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보였습니다. 서로를 경쟁자라기보다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는 것 같아 교수로서 뿌듯했습니다. 여러 학번 중 특히 기억에 남을 정도로 단결이 잘 되었던 한 학번이 있었습니다. 기특한 마음에 ‘상위 3개 팀에 선정되면 팀원 30명 모두를 패밀리 레스토랑에 데려가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지요. 그런데 선정된 모든 학생이 구술평가 문제를 다 맞췄습니다. 2차전, 3차전까지 연장전을 했는데도 마찬가지였어요. 결국 모든 팀이 만점을 맞는 ‘무승부’가 되어 120명 학생 모두를 패밀리 레스토랑에 데려갔습니다. 지갑은 텅 비었어도 마음은 풍요로웠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 강의 방식을 도입한 후의 성적이 도입하기 전보다 좋아졌다는 것은 고무적인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육의 목적이 학생들의 등수가 아닌 학생들이 알게 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고려대 의대에서는 나흥식 교수가 정년 퇴임한 후에도 팀기반학습으로 배웠던 학생들이 교수가 되어 자기의 전공과에서 좀 더 발전된 형태로 이 학습법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입시를 위해, 혹은 더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점점 더 과열된 경쟁 구도가 당연시 여겨지는 분위기에 허를 찌르는 이야기다. 제자들이 즐겁게 공부하는 것을 넘어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의사’가 되도록 이끌어 주고 싶었던 나흥식 명예교수의 마음이, 이제는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의 길라잡이가 되고 있다.
청출어람! 따뜻한 인간다움을 퍼뜨리다
나흥식 명예교수가 고려대 의과대학에서 가르쳤던 제자 중에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훌륭한 인재가 많다. 각 분야에서 존경받는 저명한 의사도 여럿 있고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교수가 된 제자도 있다. 또한 초·중·고등학교에 찾아가 강연했던 나흥식 명예교수를 롤모델로 삼아 고려대 의과대학에 입학한 학생도 있고, 과학 교사들을 대상으로 ‘교육자의 역할’과 ‘즐거운 공부’에 대한 깨우침을 전하며, 미래 세대의 밝은 내일을 만들어 가기 위해 공교육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의과대학과 사범대학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돌보는 전문인을 길러내는 곳이니까요. 많은 학부모님이 자녀를 똑똑한 아이, 성공한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판단 기준이 재물에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항상 아이의 마음에 들어가서 공감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이는 아이가 공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커가는데 큰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든 ‘당신의 마음을 좀 훔치겠습니다’라고 말해도 뭐라고 하진 않을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의대생들, 그리고 청소년 여러분! 세상에 유익하고 남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마지막 말처럼 ‘따뜻한 인간다움’이 메아리가 되어 더 많은 이의 마음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묵직한 울림을 되새긴다.
의대생들, 그리고 청소년 여러분!
세상에 유익하고 남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_ 나흥식 명예교수(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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