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

소년, 지리산에서 남자의 세계를 엿보다

지역내일 2016-05-09

지난달까지 많은 여성의 마음을 흔든 이는 단연코 송중기였다. 뽀얀 피부의 예쁘장했던 소년은 ‘태양의 후예’에서 특전사 중대장 유시진 대위가 되어 나타났다.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멋진 ‘남자’가 된 그는 아시아를 흔들었다. 여기 ‘소년’으로 입학해 ‘남자’의 세계를 엿본 우리 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라.
우리 학교는 초창기부터 전문 산악인 선생님이 계셨던 까닭에 산악반이 조직되어 암벽타기까지 했다. 그들은 교내에 인공암벽장도 만들었고 사제동행으로 줄곧 명산을 즐겼다. 그러나 산악반 지원자가 줄고 엄마의 품속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인공암벽장도 산악반도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나약해지기만 하는 아이들을 안타까워하는 선생님의 사랑과 열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인공암벽장과 산악반 있는 ‘엉뚱한’ 학교
대학에서 산악반 활동을 했던 정 선생님은 산악동아리를 부활시켜 동아리 시간에 관악산 둘레길을 먼저 걷게 했다. 하지만 학교와 학원, 집을 반복하는 길에만 익숙한 소년들에게 관악산 둘레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정 선생님은 충격을 받았나 보다. 나약함을 단번에 깨어버리자는 계획을 세웠다. 산악반 아이들을 이끌고 여러 날에 걸쳐 큰 산을 종주한다는 거창한 계획은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주변의 만류에도 정 선생님은 사전 지도를 철저히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안전 대책이 포함된 구체적인 계획서를 제출해 결국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받았고 드디어 산악반 학생들에게 지리산 종주계획을 발표했다. 첫날은 서울에서 구례까지 버스로 가서 노고단대피소에서 1박, 다음날은 세석산장에서 1박, 3일차에는 세석에서 천왕봉을 찍고 장터목을 거쳐 백무동으로 내려온단다. 이 일정이 얼마나 고단한지 산악반 녀석들은 예상하지 못한 채 들떠 있었다.
평소 지리산을 자주 찾는 나도 지도교사로 초대받았다. 정 선생님은 산악반 학생들에게 체력훈련과 함께 장비사용법 등의 기초부터 응급처치까지 지도했다. 교장선생님은 배낭 등의 물품을 지원하고 금일봉까지 건넸다.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하려는데 느닷없는 교육청 긴급모임 관계로 나는 세석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남부터미널에서 정 선생님과 아이들을 배웅했다. 다음날 백무동에서 한신계곡을 따라 세석산장에 도착한 나는 예정시간이 넘어도 도착하지 않는 아이들과 정 선생님이 걱정되어 선비샘 쪽을 향해 걸었다. 저 멀리 커다란 배낭을 메고 천천히 걷고 있는 선두그룹이 보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헉헉, 흐악흐악, 아야”
“세석산장이 도대체 어디야?”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이끌고 걷고 있는 녀석들은 작은 등성이 위에서 내가 서서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불만을 가득 쏟아냈다. 지리산을 종주하는 이들에게 벽소령에서 세석산장 구간은 지치는 구간이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은 산악반은 중간에 비를 만나 우의를 입은 채 걸었고 그중 한 녀석은 저체온증으로 정 선생님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나를 만나자 아이들은 세석이 멀지 않았음을 눈치 채고 다시 속력을 냈다. 후미는 선두가 도착하고서도 한 시간이 훨씬 넘어서야 도착했다. 정 선생님의 어깨에는 낙오한 학생의 배낭까지 올린 상태였다. 지쳤음에도 버너를 켜고 저녁을 준비하는 녀석들은 마냥 행복했고 무용담이 펼쳐졌다. 비에 젖은 등산화를 벗은 녀석들의 발에는 물집이 가득 잡혀 있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제 녀석들은 더는 소년이 아니었다. 늠름한 수컷, 아니 남자의 모습이었다.
다음날 세석평전을 거쳐 장터목으로 향하면서 아이들은 구름 속에 숨었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아름다운 경치에 탄성을 질렀고 발걸음도 가벼워 어느새 천왕봉 정상에 닿았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아이들에게 사진을 일일이 찍어주는 정 선생님의 얼굴에서 나는 사랑과 열정을 읽었다. 정 선생님은 아이들의 자부심과 행복한 얼굴을 사진에 담았다. 나의 흐뭇함도 담겼다.


꼭 필요하고 소중했던 ‘그들만의’ 체험
백무동으로 내려온 산악반 아이들은 마무리 1박을 더하며 푸짐하고 단 세상에 없는 삼겹살을 먹었다. 종주하는 동안 겪었던 일을 쉼 없이 떠들어대는 그들은 지금 생각해보니 ‘태후’의 송중기와 그 동료들이었다. 그들의 종주 후기는 이랬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주저앉고 싶었는데 선생님은 친구 배낭까지 메고 계셨어요. 산악반 친구들과 함께한 35㎞ 지리산 종주는 고교생활 중 가장 가슴 뭉클한 경험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을 수 있게 도와주신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다음해 산악반은 정 선생님의 사랑과 열정에 감염된 또 다른 두 분의 선생님과 함께 설악산 종주에 나섰다. 설악 소청산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대청봉에 올랐다. 지리산의 무용담을 설악산 종주 내내 후배들에게 자랑했다. 지리산과 설악산을 섭렵하고 3학년이 된 녀석들은 지금 그보다 훨씬 어렵다는 입시라는 산을 넘고 있다. 한편 지리산, 설악산의 정기를 듬뿍 받은 정 선생님은 올해 쌍둥이를 얻었다.
요즘 남녀공학의 중학교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의 발랄함에 밀린다고 들었다. 하지만 남고에 진학한 후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축구공과 농구공에 목숨을 걸고 체육수업이 든 날 비가 오거나 학교 사정으로 체육을 못하게 될라치면 분위기는 폭동 직전이 된다.
점심시간 식판의 밥을 청소기처럼 흡입하고 운동장을 향해 달려 나간다. 그 넓은 운동장을 다른 녀석들이 차지하기 전에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보건실에는 수시로 찰과상을 입은 학생들이 들락거리고, 골절상을 입은 학생을 업고 담임교사는 병원으로 향한다. 가끔은 몸을 사리지 않고 사냥감 쫓는 원시인처럼 축구공을 향해 달려가다 호흡곤란으로 실려와 119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기도 한다. 수컷의 본능이 살아 숨 쉰다.
하지만 남자로 거듭나기 위해 이들은 ‘태후’의 송중기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동료애를 발휘해야 하고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승부근성, 위기대처 능력 등을 갖추어야 한다. 순간적인 결단력과 강인한 체력도 필수 요소이다. 산악반 경험은 소년을 남자로 나아가게 하는 소중한 체험이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살아있는 체험은 나중에라도 큰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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