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위에 소복하게 쌓이는 흰 눈처럼 영화 <설행-눈길을 걷다(이하 설행)>는 관객들의 마음에 차곡차곡 울림을 얹는다. 격렬한 사건이 벌어지거나 다이내믹한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알코올 중독 때문에 꿈과 현실의 경계를 따라가는 정우(김태훈 분)의 모습은 관객들의 마음을 꽉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김희정 감독이 스스로를 ‘일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배우들의 얼굴은 크게 화려하거나 인상적이지 않다. 물론 여주인공 박소담의 경우 나중에 찍은 <검은 사제들>이 유명해져 눈에 띄는 배우가 되었지만 영화 <설행>에서는 순수하고 신비로운 수녀 마리아의 모습 그대로다.
‘하얀 눈밭을 울면서 걸어가는 남자의 이미지’로 영화를 시작했다는 김희정 감독. 그 남자는 어떤 사연이 있고, 어떤 아픔을 겪었고, 그가 걸어가는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영화는 남자 주인공 정우를 만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치유하는 과정으로 흘러간다. 그 과정 어디에서도 시간을 돌이키거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장치는 없다.
잔잔하게 흐르던 영화가 후반부로 치닫자 갑자기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한다. 돌이킬 수 없는 그의 많은 사연들이 스크린 위로 쏟아져 나온다. 더불어 신비로운 수녀 마리아의 사연도 나온다. 깊은 상처가 있었던 두 사람. 굳이 서로 그 상처를 내보이지 않아도 교감을 느꼈다. 존재만으로 치유가 되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 정우와 마리아는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준다.
영화 후반부에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하얀 눈밭을 배경으로 강렬한 피까지 등장하지만 영화는 시작점에서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굳이 찾자면 마리아가 다른 기도원으로 떠났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이제 관객들은 정우의 마음을 알고 그의 고통을 느낀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오늘이 안타깝고 안쓰러워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이지혜 리포터 angus70@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