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아이의 방학에 맞춰 떠났던 여름휴가. 그러다보면 늘 무더위에다 인파까지 몰려 휴가라기보다는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특히 고등학생인 아이를 데리고 휴가철에 동해바다 쪽으로 행선지를 정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올해는 대학생이 된 아들과 함께 세 식구가 몇 년 만에 휴가철을 피해 설악산과 동해바다의 풍광에 유유자적 젖어들었다.
이선이 리포터 2hyeono@naver.com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 빛과 파도를 보며 유유자적
서울을 출발해 강원도로 들어서자 오붓한 세 식구 가족여행을 시기라도 하듯 하늘은 비를 흩뿌렸다. ‘햇살이 따가운 것보다는 낫지’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대신 흥겨운 음악을 틀고 속초를 향해 달렸다.
오랜만에 찾은 대포항은 휴가철이 지나서인지 왁자지껄한 수산시장 분위기가 아니었다. 베이커리와 커피숍이 있는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서 더 이상 예전의 정겨운 항구모습은 사라져 왠지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아바이순대국으로 간단히 점심을 하고 낙산의 숙소로 향했다.
숙소의 발코니에서 바라본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풍광에 가슴 속까지 시원해졌다. 파도가 높이 이는 비 내리는 바다를 우리 세 식구는 발코니에서 수십여 분이나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각자 쌓인 시름이 녹아내려 저절로 힐링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어떤 말이 필요하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는 눈앞의 바다풍광이 장관이라 우리는 오후에 잡혀있던 낙산 인근 나들이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숙소에서 뒹굴뒹굴 휴식을 취했다. 저녁 무렵엔 가장 가까운 물치항에서 모둠회를 떠다가 파도치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얼마 전까지 미성년자였던 아들이 이제 술자리를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누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으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운무에 싸인 설악산 풍경에 마음까지 정화되는 듯
다음날 아침 우리는 느지막이 설악산으로 향했다. 등반으로 대청봉 정상을 밟을 생각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좀 무리를 하면 울산바위 코스, 아니면 비선대나 비룡폭포까지 산책만 할 작정으로 출발했다. 설악산 소공원에 도착하자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으로 오르자는 아들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코스를 수정했다. 휴가철도 지났고 날씨도 흐려서인지 케이블카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아들 나이인 스무 살에는 설악산, 지리산을 비롯해 남한의 이름 있는 높은 산의 정상은 다 밟고 다녔는데, 왕복 4시간 코스인 울산바위를 오르자는 말에 기겁을 하는 아들을 보니 왠지 씁쓸했다. 체력과 체격이 훨씬 더 좋은 요즘 아이들이 인내가 필요한 등산을 기피하는 것은 아마도 빠른 속도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이기 때문인 것 같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로프를 잡고 권금성 봉화대에 오르니 한쪽으로는 높이를 자랑하는 봉우리들이 운무에 싸여 희미하게 보이고, 한쪽으로는 장엄한 울산바위가 위용을 드러냈다. 또, 계곡을 따라 속초시내와 바다까지 이어지는 풍경도 한 눈에 들어왔다. 로프를 잡고 후들거리면서도 기꺼이 오른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비가 개이면서 제법 시야가 확보된 것도 행운이었다. 시원한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자 마지못해 오르던 아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하산하면서 우리는 설악산 초입에서 별미인 막국수와 옥수수동동주로 시원함을 더했다.
파도가 아름다운 휴휴암(休休庵)과 하조대(河趙臺)
강원도 최북단 고성에서 속초-양양-강릉-동해-삼척을 잇는 동해안의 빼어난 해안절경을 ‘낭만가도’라고 한다. 설악산의 위용을 가슴에 품은 우리는 다음날 이른 아침 숙소 인근인 낙산해변에서 일출을 본 후, 해오름의 고장 양양의 ‘낭만가도’ 절경을 훑어보기로 했다.
여름의 끝자락이어서 해는 제법 게으름을 피웠다. 새벽 5시부터 서둘렀던 우리는 바닷가를 1시간 정도 산책한 끝에 6시가 다 되어 떠오르는 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인적 없는 낙산해변에서 유일하게 우리 가족만이 그날의 시작을 맞이하는 듯했다.
다음 코스는 쉬고 또 쉰다는 뜻을 가진 휴휴암. 미워하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시기와 질투, 증오와 갈등까지 팔만사천의 번뇌를 내려놓는 곳이라고 한다. 막상 휴휴암 입구로 들어서자 사찰의 고즈넉함이나 차분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요즘은 조그만 사찰은 어딜 가나 구석구석 불전함과 기념품점이 눈살을 찌푸리게 해 안타깝다. 그렇지만 바위가 있는 해안으로 내려가자 파도치는 장관이 모든 번뇌를 내려놓게 했다. 구석구석 풍기는 상업적인 냄새에 살짝 눈만 감으면 인공 아닌 자연이 주는 최고의 휴식처였다.
휴휴암에서 차로 북쪽을 향해 조금만 달리면 하조대. 조선 개국공신 하륜과 조준이 은거하던 곳이라 하여 두 사람의 성을 따서 하조대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아담한 등대와 전망대에서 바라본 해변에는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파도, 그리고 노송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했다.
파란만장 역사의 아픔 간직한 낙산사(洛山寺)
낙산사에 도착한 것은 저녁 6시경. 2005년 화재로 사찰의 대부분이 소실된 후 재건된 상태라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1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구석구석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이 가던 길의 발목을 잡아 제대로 둘러보려면 적어도 3시간은 필요했다. 해가 떨어진 후 반딧불과 함께 한 어둠 속의 산책은 새로운 운치를 풍겼다.
낙산사는 신라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창건(671년)한 천년고찰이다. 몽골의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 창건 이래 여러 차례 화재와 전쟁으로 파괴와 재건이 계속되었고, 특히 2005년에는 대형 산불로 보물인 동종과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으니 우리민족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찰이다.
역사의 아픔만큼 가슴 저리게 하는 것은 이곳의 절경이다. 해안가에 있는 홍련암과 의상대 주변의 풍광, 사찰과 동해안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해수관음상의 온화함과 위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래스가 다르다”는 아들의 말에 우리는 웃음이 터졌다. 오랜만에 세 식구가 함께한 힐링 여행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외설악 코스 소개>
* 설악동 코스: 소공원, 비선대를 지나 천불동 계곡을 따라 대청봉에 오르는 코스로 수려한 계곡과 기암절벽의 절경을 감상하며 오를 수 있다. 이 코스는 연중 인기가 많으며 특히 1박 2일 산행의 탐방객들에게 만족도가 높은 대표 코스. 편도 11km, 6시간 20분 소요
* 울산바위 코스: 울산바위는 속초시와 대청봉, 설악의 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인기가 많은 코스로 오르는 중간에 흔들바위도 흔들어 볼 수 있다. 안양암, 내원암, 계조암 등의 사찰을 볼 수 있다. 편도 3.8km, 2시간 소요
* 비룡폭포 코스: 소공원에서 가장 가까운 코스로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다닐 수 있다. 자연관찰로를 따라 숲 속의 여유로움을 느껴볼 수 있으며, 육담폭포와 비룡폭포를 감상할 수 있다. 편도 2.4,km, 1시간 소요
* 권금성 코스: 소공원에서 케이블카로 오르는 코스로 울산바위, 동해바다, 속초시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총 1.5km 중 1.2km를 케이블카로 이동하며 권금성의 봉우리인 봉화대까지 올라가는 길은 위험해서 로프를 잡고 올라가야 한다. 편도 1.5km, 30분 소요. 케이블카 이용권은 일반 왕복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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